“그리고 어쨌든 날씨는 이상적이었다”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를 일단 마무리하는 내용이다(다음 회에 약간 더 부연될 수 있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에 쾌적하지 않은 컨디션 상태에서 쓴 글인데, 블로그에는 깔끔하게 정리돼 올라와 있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6729 를 참고하시길. 

 

잠시 철학사 상식을 들추자면, 칸트를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은 <인간본성론>의 저자 데이비드 흄(1711-1776)이었다. 칸트 자신의 고백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은 또 다른 인물이 있으니 스코틀랜드의 사상가 헨리 홈(1696-1782)이다. 칸트 연구자인 한스 파이잉거에 따르면 칸트는 홈은 <비평의 원리>(1762)란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일본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과 <네이션과 미학>(도서출판b, 2009) 등에서 대략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다. 

“칸트가 홈에게서 배운 것은 ‘취미판단’, 즉 미학적 취미판단의 가능성에 대한 반성과 그 근거에 대한 연구였다. 홈은 취미판단의 보편성, 즉 미추의 기준을 찾아 그것을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원리에서 도출해내려고 애를 썼으며, 미추에 관한 인간 감수성의 선천성을 주장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홈과 칸트에게서 공통적으로 문제된 것은 취미판단의 주관성(개인성) 주장과 보편성 요구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이때 칸트가 도입한 것이 일반성과 보편성의 구별이다. 취미판단은 규칙에 의거하지 않기에 일반성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모든 사람의 동의를 요구할 수는 있다.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을 통해서다.  

공통감각이란 무엇인가. 고진은 이 공통감각을 개인의 쾌/불쾌, 쾌적함과는 구별하면서 ‘공동의 언어게임’ 문제로 재규정한다. “취미판단에서의 보편성은 서로 다른 규칙체계를 소유하는 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이니까.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상대방(타자)의 입장이 돼보는 일이다. <도덕감정론>의 저자이기도 한 아담 스미스가 ‘공감(sympathy)’이라고 부른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상상력’이다. 즉 스미스의 ‘도덕감정’이란 칸트식으로 말하면 “자유로운 존재로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도덕법칙”이다. 요컨대, 도덕감정의 바탕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봄으로써 공통감각의 토대를 마련하는 상상력이다.  



<가든파티>에서 ‘예술가 타입’ 로라가 갖고 있는 자질 또한 이 상상력이다. 천막을 치러 온 일꾼들을 감독하기 위해 어머니와 언니들을 대신하여 나선 로라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을 어른스럽게 가장하는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버터 바른 빵조각을 손에 들고 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어머니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그렇지만 끔찍하게도 꾸민 것처럼 들려서, 창피해진 나머지 조그만 계집아이처럼 말을 더듬었다. “아, 저, 용건이…… 천막 때문에 오신 거죠?”

로라는 ‘어머니를 흉내내는 조그만 계집아이’다. 이 ‘아이’는 인부들을 ‘사무적’으로 대하려고 하지만 친근감을 억누르지 못한다. 그녀는 인부들의 웃는 모습에서 “기운내요, 잡아먹지는 않을 테니까”란 ‘메시지’를 읽어내며, 천막을 치기에 적당한 장소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인부들과 ‘공통감각’을 만들어낸다. 가령, 로라가 백합 잔디밭쪽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한 인부는 별로라고 말하면서 “저기, 천막 같은 것은요. 눈을 팍 때리는 그런 데다 쳐야 하거든요. 무슨 뜻인지 아시려나.”라고 덧붙인다. 로라는 잠시 ‘눈을 팍 때린다’(bangs slap in the eye)란 표현이 예의에 맞는지 미심쩍어 하지만, 그의 말뜻은 잘 이해한다(she did quite follow him). ‘공동의 언어게임’ 공간이 확보되면서 이해의 가교가 놓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때문에 로라가 인부들의 모습에서 상당한 호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아, 일꾼들은 어쩌면 저다지도 멋질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춤 상대가 되고 일요일 밤 저녁식사에 오기도 하는 바보 같은 남자애들이 아니라 일꾼들과 친구가 되면 왜 안되는지? 이런 사람들하고 훨씬 더 잘 지낼 수 있을 텐데.
키 큰 남자가 뭔가 둥글게 매달아놓거나 늘어뜨릴 것을 봉투 뒷면에 그리는 사이, 그녀는 모두가 이 말도 안되는 계급적 구분 탓이라고 단정했다. 자기만큼은 그런 차이를 느낀 바 가 없다. 전혀, 눈곱만큼도……

그러니까 로라의 생각으론, 같은 계급의 ‘바보 같은 남자애들’보다 더 멋진 ‘일꾼들’과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건 말도 안되는 ‘계급적 구분’ 탓일 뿐이다. 그녀는 그런 구분에 동의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어리석은 인습’으로 경멸한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일꾼 처녀(work-girl)’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느낀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깨달음’의 순간을 깨뜨리는 것은 “로라, 로라, 어디 있니? 전화 왔다, 로라!”라는 목소리다. 이 목소리야말로 그녀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며 원래의 자리로 ‘소환’하는 역할을 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일꾼 처녀’는 로라의 상상이 빚어낸 가상의 정체성이자 일시적인 ‘기분’일 뿐이지만, ‘전화’는 현실이다. 가정용 전화가 매우 드문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화’라는 말 자체가 그녀의 ‘계급성’을 말해준다. 그것은 하나의 지표다. 일꾼들과는 결코 동일시될 수도, 동질화될 수도 없는 계급성의 지표인 것이다.(...)

이미 셰리던 집안의 자녀들은 이웃 빈민가에는 근접하지 않도록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은 터다. 하지만 로라와 로리 남매는 가끔씩 그 골목을 지나가본 경험이 있고, 무엇보다도 ‘예술가 타입’인 로라는 이웃의 불행에 대해서 특유의 공통감각을 발휘한다. 그녀는 “거기다 그 불쌍한 여자한테 악단 소리가 어떻게 들리겠어.”라고 조스에게 말하고, 어머니한테는 “악단도 오고 모두들 올 텐데. 그 사람들한테도 다 들릴 거예요, 엄마. 이웃이나 마찬가지잖아요!”라는 이유를 대며 파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고집한다. “엄마, 우리가 정말 너무 무정하게 구는 게 아닐까요?”라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아무도 로라의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으며 셰리던 부인은 로라에게 파티용 모자를 씌워줌으로써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이 모자는 네 거다. 너한테 딱 어울리네. 내가 쓰기에는 너무 젊은 취향이잖니. 이렇게 그림처럼 예쁜 네 모습은 처음이네. 자, 한번 봐!”라고 말하며 손거울을 들이민다. 로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지만 맨스필드가 준비한 건 또 한 번의 반전이다.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로라는 말하고 재빨리 방에서 빠져나와 자기 침실로 들어갔다. 정말 우연히도, 방에 들어섰을 때 맨 처음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황금색 데이지로 장식한 까만 모자에 긴 까만 벨벳 리본을 맨, 거울에 비친 이 매력적인 소녀의 모습이었다. 자기가 이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해보았다.  

여기서 ‘예술가 타입’의 심미적 주체는 나르시시즘적 주체이기도 하다. 이웃의 사고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오빠 로리와 상의하려다가도 그가 옷차림과 모자가 근사하다고 말해주니까 로라는 “결국 그에게 한마디도 못하고 말았다.” 로라의 윤리적 가능성과 한계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장면이다. 파티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다시금 이웃의 불행이 화제에 오르자 셰르던 부인은 남은 음식을 갖다 주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로라는 다른 의견을 피력한다. “파티에서 남은 음식을 가져다주다니. 그 불쌍한 여자가 그것을 정말 달가워할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역시나 로라의 공통감각이 가능하게 한 의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적 도덕을 자연스럽게 체현하고 있지는 않다.

부르주아적 도덕이란 무엇인가? 파티용 차림 그대로 음식 바구니를 가지고 가면서 셰리던 부인은 칸나 백합도 같이 가져가라고 권한다. “그 계층(class) 사람들은 이 꽃을 대단하게 여기거든”이라는 게 이유다. 여기에도 공통감각이 작용한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이 공통감각은 곧바로 ‘현실주의’의 저항에 직면한다. 꽃줄기에 레이스옷이 망가질 거라는 게 조스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것을 받아들여 결국 셰리단 부인은 로라가 바구니만을 들고 가게 한다. 요컨대, “이웃을 도와야 한다, 하지만 나의 옷을 더럽히면서까지 도움을 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 부르주아적 도덕이다. 그것은 정해진 한계를 초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한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책임에 붙들리는 윤리와 구별된다. 로라는 과연 그러한 도덕적 주체에서 윤리적 주체로 넘어갈 수 있을까?   

로라가 바구니를 들고 남편을 잃은 스콧 부인을 문상하러 간 장면이 <가든파티>의 결말이다. 그녀를 맞는 것은 미망인의 언니다. 로라가 이웃이나 마찬가지(they're nearly neighbors)라고 했던 스콧 부인과 죽은 스콧이 소위 그녀의 ‘타자’다. 이 결말 장면에서 로라는 그들과 차례로 조우한다. 먼저, 스콧 부인과의 대면하는 모습이다.

그 순간 화롯가의 여자가 돌아보았다. 눈이 퉁퉁 붓고 입술도 퉁퉁 부은,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이 끔찍해 보였다. 로라가 왜 거기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듯 보였다. 무슨 일인가? 이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어째서 바구니를 들고 부엌에 서 있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리고 그 가엾은 얼굴은 다시 일그러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지만 여기서는 어떠한 ‘만남’이나 ‘교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런 커뮤니케이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들은 서로에게 타자다. 그것이 ‘살아있는 이웃’이 타자로서 갖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이웃’은 어떤가? 

거기에는 한 젊은 남자가 깊은 잠에 빠진 채 - 너무나 곤히, 너무나 깊이 잠들어서 두 사람 모두에게서 멀리, 멀리 떨어진 채 - 누워 있었다. 아, 이렇게 초연하고,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다시는 그를 깨우지 마라. 그의 머리는 베개에 파묻혀 있고, 눈은 감겨 있었다. 감은 눈꺼풀 아래 두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온통 꿈에 빠져든 것이었다. 가든파티니 바구니니 레이스 드레스니 하는 따위가 그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심지어 망자는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만족한다고.”까지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게 보는 시점은 로라의 것이다. 여기서 로라의 시점은 망자의 시점과 일체가 되고 있다. “그는 만족한 듯 보였다”가 아니라 “나는 만족한다”라고 기술된다. 말 그대로 ‘공통감각’의 실현이다. 특이한 것은 이 죽음이 아무런 ‘타자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정말 멋있고 아름다웠다. 그들이 웃어대고 악단이 연주하는 동안, 이런 기적이 이 골목에 찾아온 것이다.”라고 로라는 느끼며, 죽은 스콧은 더없이 행복한 모습이다. 이런 발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그에게 무언가 말도 없이 방에서 나가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로라는 큰 소리로 어린애처럼 흐느꼈다. “이 모자,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말했다.

로라의 ‘모자’는 그녀의 나르시시즘과 가든파티의 성공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이 모자, 용서해주세요(Forgive my hat)”란 사과를 통해서 로라는 규범적인 차원에서 예의를 갖춘다. 그렇게 하여 상가를 나온 로라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작품은 종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맨스필드는 오빠 로리와의 만남은 마지막에 남겨놓았다. 로라에게는 분신이자 멘토 격의 인물이다. “그렇게 끔찍했니?(Was it awful?)”라는 로리의 질문에 로라는 “아니, 그저 경이로웠어.(It was simply marvellous.)”라고 답한다. 경이로웠다는 느낌은 물론 행복해보이던 시신과의 조우를 떠올린 것이겠다. ‘죽은 이웃’과의 대면 말이다.  

하지만, 로라는 아직 ‘끔찍함’에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살아있는 이웃’과의 만남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윤리적 주체는 이제 형성중인 주체다. 그런 미진함이 ‘인생’에 대한 정의를 어렵게 만든다. 머뭇거리게 하고 말을 더듬게 한다. “인생이란 게-”를 반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작품에서 이 열린 물음에 대한 봉합은 “그러게 말이야, 응?(Isn't it, darling?)”이란 로리의 대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을 임시방편적으로 보는 시각도 가능하다. 아직 제대로 답해지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 로라의 물음은 텍스트를 빠져나와 독자에게 전이된다. “그리고 어쨌든 날씨는 이상적이었다”란 작품의 첫 문장에서 ‘그리고’가 끌어들인 효과와 마찬가지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로라에게 “따뜻하고 사랑이 담긴 목소리”로 답해줄 준비가 돼 있는가? 지금은 곤란하다고?.. 

10. 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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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28 0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상적인 날씨와 참 그런 삶이 만나는군요...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로쟈 2010-07-28 09:01   좋아요 0 | URL
글이 좀 긴 편인데,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

구보 2010-07-2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긴 편이었군요.의식 못하고 단숨에 읽었습니다.스콧부인과 교감이 이루어졌다면 그렇고 그런 통속소설이 됐겠지요. 가능성의 영역일망정 그만한 시도조차 용기로 느껴집니다.


로쟈 2010-07-28 21:34   좋아요 0 | URL
네, 그건 어려운 일이죠. 이 문젠 맨스필드의 다른 작품을 통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