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볼 책들이 있어서 관내 도서관에 갔다가 정간실에서 <인물과사상>(6월호)에 실린 김진석 교수 인터뷰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한 가지 정도만 빼면 그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한국일보에 실린 그의 칼럼들을 찾아 옮겨놓으려다가 우연히 이기호 소설가의 지난주 칼럼을 읽게 됐다. 원래 벌어지는 일은 하려던 일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철학자의 칼럼 대신에 소설가의 칼럼을 스크랩해놓기로 한다. 참고로 칼럼에서 언급되는 가라타니 고진의 대의제 비판은 <일본 정신의 기원>(이매진)에서 읽을 수 있다.
한국일보(10. 05. 22) 과두정이냐, 제비 뽑기냐
6.2 지방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목요일, 천안함 사건 민군 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있었다. 전국에 생중계된 발표가 끝난 시각은 점심시간 바로 직전. 그래서인지 식당에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화두는 온통 그쪽으로만 쏠렸다.
유능한 엘리트만 뽑는 선거
선거 운동 첫날을 발표 시점으로 삼은 저의를 의심하는 사람과, 조만간 국지전이라도 발생하지 않겠냐며 우울한 낯빛으로 우울한 예측을 내놓는 사람, 교신기록 미공개를 예로 들며 음모론을 설파하는 사람까지, 오가는 이야기들은 심각했다. 그러나 그래서 식당 안은 아연 알 수 없는 활기로 들끓고 있었다. 그런 식당 안으로 들어와 명함을 돌리며 허리를 숙이는 구의원 입후보자까지, 2010년 5월 하순의 대한민국은 요란스럽고 수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구의원 후보자가 주고 간 명함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명함이어서 그랬겠지만, 공약은 온데간데 없고 후보자 약력만 열 줄 넘게 빼곡히 적혀 있다. 행정학박사라는 입후보자는 캐치프레이즈 역시 '행정학박사가 만들어가는 명품 구정 실현'으로 큼지막하게 박아 놓았다. 바로 그 문구가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했던 내 마음을 더욱더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우리의 대표를 선출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선출된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 사회의 유능한 엘리트 집단이다. 예외 없이 일류라고 일컫는 대학을 졸업했으며, 각종 고시에 패스했거나, 이른 나이에 공직이나 기업 대표를 역임한 사람들이다. 국회의원 중에는 유독 교수, 변호사, 기업체 사장이 많다.
사람들은 국민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들보다 우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대표로 선출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선출된 엘리트들은 다시 민의의 대표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계몽하고, 정해진 방향으로 이끌고 가려 애를 쓴다. 정파적 입장에 따라 소소하게 의견이 갈릴 수 있겠지만, 출신 성분으로만 따지자면 가히 엘리트들의 과두정(寡頭政)이 실현된 곳이 바로 이 땅의 의회이고, 이 땅의 민주주의의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 본질은,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어느 글에선가 말했듯, 제비 뽑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데모크라시의 어원 그대로 '누구라도 좋은', '하찮은' 사람들이 통치하는 체제이다. 그 말인즉슨, 민주주의 체제란 그 누구도 그 누구를 계몽하려 들지 않고, 무언가를 독점하려 들지도 않으며, 소수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현상 또한 발생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제비 뽑기와 같은 상태에선 '북풍'이니 '노풍'이니 하는 바람은 일지 않을 것이며, 누군가가 정보를 손아귀에 쥔 채 시기를 저울질하는 일 따위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태 자체를 지금 이 땅에서 바라는 것은 다분히 이상적인 일이겠지만, 이 과두정의 체제를 모두들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역시 충분히 괴이쩍다. 우리가 선거철만 되면 자꾸 누군가가 만들어낸 바람에 몸을 맡기고, 거기에 휩쓸린 선택을 하게 되는 것도 다 그와 같은 연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찮은'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우리의 투표가 보다 더 민주주의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선, 바로 그 바람을 배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바람을 만드는 자와, 바람을 가르치는 자들을 우선적으로 솎아내는 일 역시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그래야 우리도 나중에 1 번부터 8 번까지, 그 누구를 제비 뽑기 하듯 뽑아도 아무 걱정 없는 그런 상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행정학박사이지만 행정학박사 학위 따위를 자신의 약력에 포함시키지 않는 명함, 나는 그런 명함을 받아보고 싶었다. 출신학교 따위는 더더군다나 말할 나위도 없고. 그런 '막 돼먹은' 명함이 보고 싶어졌다.(이기호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소설가)
10. 05. 29.
P.S.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휴머니스트, 2010)에서 과두정과 추첨제(제비뽑기)에 관해 참고할 만한 대목을 뽑아본다. 먼저, 박명림 교수의 지적.
시민됨의 인정이라는 것은 주권을 이양함으로써 공적 존재(즉 국가)를 형성한 뒤 국가의 역할을 통해 안전과 권리와 형평을 제공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별적인 시민의 존재가 전체로서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의 원칙에 의해서 국가를 구성한 뒤 다시 국가에 의해서 개별적인 시민의 권리를 보장받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구성한 국가가 소수 과두집단에 포함된 시민 외에는 개별적으로 열심히 먹고살라고 한다면 곧 공동체로부터 전혀 시민됨을 보장받지 못하는 겁니다. (90-91쪽)
그리고 그리스 민주정에 대한 김상봉 교수의 설명. 우리가 더 '진보한' 민주주의를 갖고 있는 건지 생각해볼 문제다.
제가 아는 한 역사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평등한 사회는 적어도 남성 시민들 내에서는 고대 아테네였어요. 아테네 시민들의 관심사는 철저히 권력의 평등한 공유 원칙에 입각한 민주주의였죠.(...) 오늘날 공직자를 뽑을 때 어떻게 뽑는 게 민주적인 방식입니까? 우리는 선거잖아요. 그런데 아테네 시민들한테 선거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건 '과두정'이에요. 그들은 '추첨'을 민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원래 그게 고전적 구분이에요.
선거로 할 경우 열이면 열, 돈 있는 사람만 선거에 나갈 수 있습니다. 생업을 제쳐놓고 선거에 나갈 사람이 있겠어요? 특히 그 시대에? 그리고 거기 나가면 인물 좋은 사람이 한 표라도 더 얻게 돼요. 집안 좋고 학벌 좋고 돈 많은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어요. 아테네 시민들은 그걸 집요하게 거부한 거예요. 그 다음에는? 추첨해서 아무나 맡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시민이 모이는 민회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국회인 평의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권력기관 중 하나인 재판정 배심원까지 모두 추첨으로 뽑은 겁니다. 당시에는 판사, 검사가 따로 있지 않았으니까요. 해마다 추첨을 통해 뽑았어요.(167-1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