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전공의 역사학자 오항녕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2010)을 사들고 왔다. 두 가지를 깜박했는데, 하나는 저자가 작년 여름 이덕일 소장의 '십만양병설 및 송강행록 조작설'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여 한겨레 지면에서 잠시 '이덕일-오향녕 논쟁'을 촉발한 당사자라는 점을 잊고 있었고(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67319.html 참조), 또 하나는 그 논쟁을 언젠가 옮겨놓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책에는 그 논쟁을 이루는 두 편의 글이 7장의 보론으로 들어가 있다. 책으로는 한겨레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이덕일의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역사의아침, 2009)과 이번에 나온 <조선의 힘>이 짝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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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박사는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일지사, 2009) 같은 학술서의 저자이기도 한데, <조선의 힘>은 <역사교육>에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대중서'이다. 비록 저자가 "어려운 것을 쉽게 전달할 방법은 없다.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다."라고 적어놓았음에도 나처럼 새로이 조선사 입문서를 찾던 독자에게는 유익한 길잡이가 될 듯싶다. <조선의 힘>에 대해서는 따로 서평기사가 아직 없기에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 대한 리뷰기사와 함께 오항녕 박사의 두번째 반론을 참고삼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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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경향(09. 09. 10) [이주의 책]십만양병설은 조작됐다?
율곡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 유성룡이 십만양병설을 반대했다는 것도 그러므로 성립할 수 없는 명제다. 십만양병설은 후대에 조작된 허구다.
역사학자 이덕일씨의 주장이다. 이씨는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십만양병설은 조선 시대 노론 문인들이 정파적 목적으로 날조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십만양병설의 원적지는 김장생의 <율곡행장>이다. 김장생은 구체적인 연대는 밝히지 않은 채 “경연에서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썼다. 그의 제자인 송시열은 한 발 더 나갔다. 송시열은 <율곡연보>에서 ‘선조16년’(1583)이라고 연대를 특정했다. 십만양병설이 사후 창작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이의 시호에서 발견된다. <율곡연보>를 보면 유성룡은 이이를 ‘이문성’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이이가 ‘문성’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죽은 뒤인 인조2년(1622)으로, 유성룡이 사망한 지 이미 17년이 지난 후다.
문제는 십만양병설이 허구라는 데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유성룡의 반대로 십만양병설이 무산된 것으로 서술돼 있다”는 점이다. 서인 출신 김장생과 송시열은 제 당파의 영수 이이가 주장한 십만양병설을 반대 당파인 남인 영수 유성룡이 반대했다고 서술했다. 저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발언을 있던 것처럼 가정해 반대 당파의 영수를 공격하는 것은 전형적인 정치공작”이라고 말한다.
2007년도 개정판에서 바뀌기는 했지만 ‘노론이 중상주의 실학 사상을 주도했다’는 2007년 이전 국사 교과서의 서술도 사실과 다르다.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중농주의 실학 사상을 주장한 이들은 당시 재야 세력인 남인들이었다. 게다가 중상주의 실학의 선구자라고 알려져 있는 유수원은 노론이 아니라 노론이 적대시했던 소론이다. 유수원은 노론에 의해 능지처참을 당해 죽은 인물이다. 개정판 교과서라고 해서 이 문제가 완전히 수정된 건 아니다. 중상주의 실학을 “노론이 주장했다”는 말은 빠졌지만 중농주의 실학을 “남인이 주장했다”는 사실마저 삭제됐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긴 것일까. 저자는 “이 모든 것은 아직까지 노론 정체성을 지닌 학자들의 사고로 국사 교과서가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주류 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은 일제 식민사관과 조선 후기 노론 사관으로, 이 두 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을 공유하고 인맥으로도 연결된다. 책은 이 두 사관이 역사 서술에 끼친 폐해를 앞에서 든 사례 이외에 ‘한사군 한반도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등에서도 찾아내 조목조목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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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구미를 잡아당기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책은 올해 초 ‘정조어찰첩’이 공개된 후 언론을 통해 알려진 ‘정조독살 사실 무근설’도 반박한다. 저자는 정조어찰첩을 근거로 정조가 독살됐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 또한 “소수 학벌 카르텔의 당파적 해석”이라고 본다.
독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십만양병설이나 정조어찰첩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여전히 논쟁 중인 사안이다. 지적인 편식을 경계하는 독자들은 뉴스 검색창에서 역사학자 오항녕, 유봉학 한신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의 이름을 입력해보시길. 역사 해석의 다양성과 중층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정원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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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09. 08. 06) ‘십만 양병설 허구론’ 오항녕씨 재반론
저는 지난번, 이이의 십만양병론을 부정한 이덕일 소장의 주장이 판본과 전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으며, 기축옥사에 대한 김장생의 기록이 서인에게 유리하게 날조되었다는 이덕일 소장의 주장 역시 연도의 착각에서 시작된 왜곡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오류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장은 ‘이이의 십만양병론에 대한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면 간단’하다고 했는데, 저는 이미 서인과 남인이 함께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이정구의 ‘시장’(諡狀), 이항복의 ‘신도비문’ 등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이 소장은 십만양병설을 부정할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황해도 군적을 잘 정비한 것과 십만양병 주장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군사를 키우려면 현황부터 파악하는 건 상식입니다. 군적 정리와 십만양병론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그의 해설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는 제가 ‘서지학자처럼 문정(文靖)이니 문성(文成)이니 하는 판본의 문제를 장황하게 서술해 논점을 흐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논거가 무너진 것을 모르나 봅니다. 이 소장은 또 ‘이이의 주장은 현 국방부 장관이 국세 징수는 20% 이상 삭감하되 군사비는 1000% 이상 올려 군사를 600만명으로 늘리자고 주장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이 비유에 나온 통계의 근거가 궁금하기만 합니다.
정철과 유성룡의 대화를 기록한 김장생의 ‘송강행록’이 조작이라고 이 소장은 주장했습니다. 선조 23년에 위관(委官)은 정철이었는데, 마치 유성룡인 것처럼 김장생이 기록하여 이발의 노모와 아들을 유성룡이 죽인 것처럼 덮어씌웠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선조 23년이 아닌 선조 24년의 일이었다고 바로잡아 그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광해군 9년(1617) 생원 양몽거(楊夢擧)의 상소’와 ‘아계 이상국(이산해) 연보’를 근거로 선조 23년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조반정 이후의 서인들 기록에서부터 ‘선조 24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몽거의 상소는 광해군 9년이 아니라, 60년 뒤인 숙종 3년(1677)의 일이었습니다. 그 뒤 이 양몽거의 상소에 대해, 신묘년(선조 24년)을 경인년(선조 23년)으로 잘못 보았다는 다른 이들의 비판이 이어집니다. ‘아계 이상국 연보’도 광해군 때가 아니라 인조반정 이후에 편찬된 것입니다. 이것이 ‘장황한 판본 조사’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들이 죽은 시기는 분명 선조 23년 5월이 아니라 유성룡과 이양원이 위관을 맡았던 선조 24년 5월입니다.
이덕일 소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논조를 바꿉니다. 아니지요. 기본 성격은 바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에서 도출되는 것입니다. 이 소장과 같은 방식으로 사료를 인용하면서 주장하는 ‘기본 성격’을 저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덕일 소장에게 편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편견의 기반은, 식민사관에서 시작되어 근대주의적 역사관, 즉 ‘자본주의맹아론-실학’ 구도에서 강화된 당쟁론입니다. 제가 ‘콩쥐-팥쥐’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한국지성사의 안타까운 일면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장은 비장하리만큼 자신과 ‘주류학계’를 구별하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주류학계’의 충실한 일원입니다.
제가 근대주의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근대사회의 이성과 자유, 민주주의는 긍정적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성은 독단적 신화가 되고, 자유는 일자리에서 밀려날 자유만 남고, 민주주의는 인민을 합법적으로 주권에서 배제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장차 근대적 삶과 가치에 대해 성찰하든 대안을 찾든, 역사학자가 볼 때 조선시대는 참으로 풍부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 계기를 통해 조선시대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논의가 계속되었으면 합니다.(오항녕/역사학자·조선시대사)
10. 02. 06.
P.S. <조선의 힘>의 프롤로그를 읽었는데, 저자가 표나게 내세우는 것은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주의는 일제 식민사관의 토양이었다. 광복 이후에 한국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의 극복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근대주의에 빠져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근대주의로 다시 근대주의(식민주의)를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위의 식민주의와 근대주의를 합쳐 '범식민주의'라고 부른다.
요컨대, 조선사를 이해하는 저자의 시각은 '범식민주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와 무관하게 저자가 '제도사' 연구자라는 데 있고,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시론서'로서 이 책이 조선사 "500년 시스템을 유지한 '힘'과 그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한다고 소개된 데 있다. 말하자면 조선이라는 국가체제를 500년간이나 유지한 힘이 '조선의 힘'이다. 문화사보다는 먼저 제도사에 대한 독서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게 한국사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내가 세운 기준이고, 그래서 때마침 출간된 <조선의 힘>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