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에 버스에서 읽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아이티 사태를 다루고 있는데, 개인적인 관점과 국가적 관점 사이의 '시차'를 읽을 수 있어서 같이 읽으면 좋겠다 싶었다(이 가난한 섬나라의 비극에 대해선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칼럼은 나란히 30면과 31면에 실렸다.

경향신문(10. 01. 25) [아침을 열며]울지 마, 아이티의 소녀여
늦은 저녁 국밥집에서 TV뉴스를 보다가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따끈한 국밥 앞에서 도저히 숟가락을 뜰 수 없었다. 뉴스에서는 아이티 대지진의 현장에서 리포터가 한 소녀의 죽음을 전하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구출된 11살난 소녀가 “엄마, 죽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끝내 숨을 거뒀다는…. ‘살찐 소파’처럼 부푼 내 몸이, 기아문제에 무관심했던 내 이기심이 한꺼번에 부끄러워졌다.
그랬다. 대지진 전까지 나에게 아이티는 상반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카리브해의 뜨거운 열정을 담은 그네들의 리듬, 강렬한 삼원색의 색채가 인상적인 아이티 무명 화가의 그림들은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반면 원색의 이면에 도사린 어둠도 또렷하다. 몇 년 전 읽은 일본의 소설가이자 유니세프 친선대사인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책 <토토의 눈물>에는 슬픈 대목이 나온다. 아이티에서 성매매에 나선 12살 소녀에게 작가가 물었다. “에이즈가 무섭지 않니?” “차라리 에이즈에 걸리는 게 나아요. 에이즈에 걸려도 몇 년은 산다잖아요. 우리 식구는 당장 내일 먹을 게 없어요.” 그 소녀는 매춘을 한 번 할 때마다 6굴드(400원)를 받고 있었다고 작가는 전했다. 또 하나의 충격은 아이티 사람들이 먹는다는 ‘진흙쿠키’-쿠키라는 표현이 거슬리지만-였다.
미국의 흔적 새겨진 슬픈 현대사
아이티의 역사를 한국의 근·현대사에 투영해 보면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많다. 206년 전 아이티는 흑인 노예들의 투쟁으로 프랑스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미국은 1915년 아이티를 침공하여 20년간 통치했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도 배후 조종자로 남아있다. 세계적인 석학 노엄 촘스키는 “미국의 침공은 극단적인 인종주의로 점철된 추악한 전쟁”이라고 비판하면서 “앞으로 수십년간 (아이티는) 살기 어려운 땅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70년대 초부터 미국은 자국의 이익과 공산주의 쿠바에 대항하기 위해 아이티의 독재정권인 뒤발리에 부자를 지원해왔다. 그 사이 뒤발리에 정권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각종 개발을 남발하면서 사익을 챙겼다. 결국 잘못된 국토 개발과 농업정책의 실패로 인해 도시빈민이 늘어나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이후 미국은 민주정부의 수립과 군사쿠데타가 거듭되는 아이티를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자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요해왔다. 아이티의 대지진이 ‘천재’가 아닌 ‘인재’인 이유다.
아이티의 슬픈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한국 근·현대사에 개입한 미국의 흔적들이 떠오르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일본의 식민통치, 해방과 한국전쟁, 독재정권의 광주학살 만행 등 역사의 고비마다 미국이 있었다는 건 초등학생들도 아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는 아이티와 달리 특유의 역동성을 앞세워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수혜국’에서 ‘지원국’이 됐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만났던 한 저널리즘 교수가 “한국은 (뉴스가 많아) 신문 만들기 좋은 나라”라고 하기에 “그래서 한국의 오늘이 있다”고 맞받아쳤던 기억이 있다.
그랬다. 우리는 버릇처럼 모두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해왔다. 온 국민이 모두 정치평론가이자 경제전문가다. 한 가족을 이끌다보니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늘어났다. 환경문제가 불거지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가 어떤 모습일까 걱정하고, 교육문제가 불거지면 내 아이가 불편해지지 않을까 우려한다. 또 4대강이니 행정도시니 하는 문제도 기실 나보다는 다음 세대를 위해 고민하게 된다. 최근 겪은 글로벌 경제위기 때마다 치열하지 않으면 굶을 수 있다는 교훈도 얻었다. 그래서 더 전투의지가 불타오른다.
아름다운 풍광 다시 볼수 있기를
요즘 걱정되는 건 이러한 역동성이 현 정권의 일방주의에 희생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다. 머리 터지게 싸우면서도 슬기롭게 결론을 도출해온 저력이 희석될까 두렵다. 우리의 미래가 몇몇 일방주의자들에 의해 결정되면 안된다. 당장은 아이티 소녀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게 급선무다. 아이티의 무명 화가가 다시 붓을 잡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티를 위해 1억원을 쾌척하는 김연아가 있는 나라다. 더 많은 김연아를 만들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싸워야 할 때다.(오광수 문화2부장)

경향신문(10. 01. 25) [국제칼럼]아이티 원조의 국제정치학
아이티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조가 본격화하면서 이를 둘러싼 물밑 샅바싸움도 한창이다. 프랑스에서 보낸 야전병원 설비를 실은 비행기는 한동안 공항에 착륙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프랑스 정부의 당국자 주앙데는 공항 통제를 맡은 미군을 나무랐다. “아이티를 원조해야지 점령을 해서는 안된다”며 불편한 심기를 라디오에 흘렸다. 프랑스의 위신도 말이 아니지만 유럽연합도 굼뜬 대응에 발언권을 잃어버렸다. 협의만 하다 보니 적기에 강력하고 명쾌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카리브 통제 호기로 보는듯한 미국
미국은 이번 지진을 카리브해역의 통제권을 다잡는 호기로 보는 것 같다. 이미 해병대 2000명을 포함한 1만2000명의 대규모 파병을 시작했다. 항공기 30대, 항공모함 칼 빈슨, 순양함 노르망디, 구축함 언더우드도 함께 출동한다. 미국 국방부와 산하의 남부사령부(사우스컴)가 통제 지휘부가 된다. 사실상 무정부상태의 아이티에서 치안 유지와 질서 회복 업무를 맡게 될 것이다.
‘미국의 호수’로 불리는 카리브해역에 대한 미국의 안보 이해는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아이티에서 대량 탈출하는 사람들의 미국 내 불법 유입을 막아야 한다. 보트 피플을 사전에 차단하려 한다는 얘기다. 둘째, 미국으로 유입되는 마약의 중간 기착지가 돼있는 이곳을 이번에 정리하고 싶을 것이다. 멕시코·콜롬비아와 연계된 마피아들이 아이티 거리에서 힘을 쓰고 있다. 셋째, 이번 기회에 아이티 문제를 확고하게 해결하고 미국의 교두보를 구축하면, 쿠바·베네수엘라와 같은 반미국가들의 위세도 위축될 것이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카리브 빈국들에 석유를 싼 값으로 원조하는 프로그램인 ‘페트로-카리베’는 여러 나라들을 끌어모은 바 있다.
차베스는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아이티 사태에 대한 미국의 파병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3000명의 미군이 이미 도착했다고 한다. 마치 전쟁터에 가는 군인처럼 무장한 해병대들이라고 한다. 정작 보내야 할 것은 의사, 의약품, 연료, 야전병원이 아닌가! 미국은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아이티를 점령하려 한다.” “길거리에서 그들을 볼 수가 없다. 그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던가? 부상자를 수색하던가? 대체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결손국가인 아이티에는 이미 9000명가량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해 있다. 여기에 1만2000명의 군대가 투입되니, 인구 900만명에 병력 2만1000명이 주둔하게 된다. 2800만 인구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미군이 7만명이니, 인구 당 파병 숫자는 비슷한 수준이다. 그만큼 군사화의 수준이 높다. 미국은 유엔 및 역내 이해관계자인 브라질·캐나다와 협력해 원조작업을 조정할 것이다. 이미 국가는 붕괴되고 유엔의 사무소 설비도 파괴됐다고 하니, 미군 시설이 정부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등 물밑 파워게임 계속
물론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아이티 방문시 이런 우려를 일축했다. “우리는 (아이티 국가를) 지원하려고 할 뿐이지,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도 파병은 “무정부 상태에서 아이티인들과 무고한 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 해병대는 1915~34년 사이 근 20년간 아이티를 점령했다. 94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함정을 파견하여 쫓겨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다시 옹립한 적이 있다. 하지만 2004년 미국은 프랑스와 캐나다의 동의 아래 반정부 세력을 밀어주어 아리스티드 정부는 전복되고 말았다. 사탕수수밭과 커피농장의 흑인 노예들이 프랑스의 압제에서 벗어나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공화국을 탄생시킨 아이티. 원조사업 속에서도 파워 게임은 진행된다.(이성형 | 서울대 라틴아메리카硏 교수)
10. 01. 26.

P.S. 아이티의 역사와 현실을 보여주는 책 두 권에 대해서는 수년 전의 리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21(07. 02. 09) 아이티를 아십니까
우연히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에 대한 책 두 권이 동시에 나왔다. 이 멋진 우연은 우리를 아이티의 현재와 과거로 안내한다. <가난한 휴머니즘>(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이후 펴냄)은 아이티의 빈곤 문제에 대한 사회운동가의 통찰을, <블랙 자코뱅>(C. L. R 제임스 지음, 우태정 옮김, 필맥 펴냄)은 프랑스혁명과 함께 시작된 아이티 흑인 노예들의 해방전쟁을 보여준다.
아이티란 어떤 나라일까. 이 나라의 이름을 들으면 우리 뇌는 관심 영역에서 영원히 추방된 나라들의 목록을 잠시 뒤적이다가 곧 다른 일을 하게 된다. 아이티는 1804년 세계 최초로 노예해방 혁명을 성공시키고 독립을 쟁취한 나라다. 제3세계에 특히 무관심한 대한민국 시민들이 잊고 있는 진실. 우리는 점점 타자를 이해하지 않는 것이 폭력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블랙 자코뱅>부터 살펴보자. 카리브해의 영국 식민지였던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태어나 전투적 마르크스주의자로 평생을 살아온 지은이는 아이티 노예해방 운동의 역사를 계급적 관점에서 구성한다. 아이티 혁명사 연구에 기념비가 된 책이지만 역사 연구서라기보다는 소설처럼 읽힌다. 이 역사극의 정점에는 투생 루베르튀르라는 혁명가가 서 있다.
1629년 프랑스의 모험가들(혹은 그렇게 오인되는 부랑자와 범법자들)이 산도밍고 섬의 북부 해안에 상륙했다. 사탕수수 농장이 번성한 아이티는 1789년 프랑스 해외무역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부유한 식민지였다. 그러나 이 섬은 카리브해의 소돔과 고모라였다. 농장 건설과 함께 유럽인이라면 몇 분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악취가 나는 선실 속에 주검들과 뒤엉킨 아프리카인들이 실려 들어왔다. 노예들은 1789년 46만 명에 이른다. 곧 백인 농장주들의 약탈과 강간으로 생긴 제3의 인종, 물라토(흑백혼혈)가 등장한다. ‘더러운 풍요’가 혁명의 시작이었다. 백인 농장주들은 차마 입에 옮기기도 힘든 잔혹한 방법으로 흑인들을 지배했다. 물라토들은 백인과 흑인의 중간지대에 서서 백인의 마름 역할을 하며 그들에게서 받은 경멸을 흑인들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멀리 본국에서 프랑스혁명의 소식이 들려온다.
백인 농장주들은 왕당파니 애국파니 편을 가르며 싸웠지만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눈이 멀어 있었다. 물라토들도 정치적·경제적 권리를 따내기 위해 일어섰다. 프랑스의 의회, 백인, 물라토들은 서로 아귀다툼을 벌였지만, 아프리카 노예들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어느 날 갑자기 노예들의 폭동이 시작된다. 혁명 초기 폭동은 지배층의 분열 사이로 터져나온 분노였지만, 곧 조직화된다. 투생은 마흔 살이 넘어 혁명에 참여해 탁월한 지도자로 부상한다. 그는 농장주와 프랑스군뿐만 아니라 군침을 흘리며 들어온 스페인군과 영국군의 침공도 막아낸다. 지은이는 자신이 아는 한 세계 최고의 전략가는 나폴레옹과 투생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폴레옹 군대에 잡혀 생을 마감했지만 아이티의 아프리카인들은 세계 최초의 해방을 이뤄낸다. 지은이의 관점에 따르면 아이티 혁명은 중앙아메리카 모든 지역에 영향을 끼쳤으며 쿠바 혁명에까지 이른다.
<가난한 휴머니즘>은 아리스티드가 빈곤 문제에 대해 쓴 8통의 편지다. 그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다 세 차례 대통령직에 오르고 모두 쿠데타로 쫓겨났다. 2004년 미국이 주도한 쿠데타 때엔 유명한 미군의 ‘납치’ 논란을 일으켰고 아직까지 아프리카에 유배돼 있다. 책은 2001년 그의 동지였던 르네 프레발이 대통령직에 있을 때 쓰여졌다(‘동지’ 프레발은 지금 우여곡절 끝에 다시 대통령직에 올라 아프리카에 있는 아리스티드의 입국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그의 글엔 아이티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애정이 가득하다. 그의 언어는 따뜻하고 명상적이다. 그는 미국과 세계기구가 처방한 ‘신자유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가 얘기하는 제3의 길은 ‘존엄한 가난’이다. 대안은행, 문맹퇴치, 어린이 구호활동 등 여전히 가난할지라도 ‘뱃속의 평화’와 ‘머릿속 평화’를 이루는 길을 조근조근 설명한다. 그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든, 이것은 제3세계의 모든 빈자들을 위한 실현 가능한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