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이나 문화계 동향 기사를 스크랩해놓는 것도 제대로 하자면 '일'이다. 기록 혹은 자료로서의 가치만 고려하더라도 매일 몇 건씩은 페이퍼감이 뜨기 때문이다. 그래도 블로그를 '스크랩북'으로만 만들 수는 없어서 자제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의무감'을 갖게 하는 기사도 있다. 어제 피곤하다는 이유로 제쳐놓은 오태석 공연대본 전집 완간 소식이 그런 경우다(엊그제 경향신문의 김우창 선생 인터뷰 기사도 조만간 코멘트와 함께 스크랩해놓아야 한다). 연극 관련서로는 올해의 가장 중요한 성과가 아닌가 싶다. 나는 평민사에서 나온 대본 몇 권을 오래전에 챙겨놓은 적이 있는데, 판본을 연극과인간사 걸로 바꿔야 할 모양이다(이윤택 공연대본 전집도 출간돼 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16권 전체를 챙겨놓는 건 현재로선 가능하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한겨레(09. 12. 23) 연극계 큰어른 오태석 ‘걸작의 유산’ 물려주다 

“열한살 때 한국전쟁에서 세상이 뒤집히는 것을 본 뒤로 세상을 믿지 않게 됐어요. 그래도 살아가야 하니까 아마 세상 아닌 것을 만들어 보려고 했던 것 같고…. 내 고향인 충청도 아롱구지 마을 옆에 있는 이야기만 좀 모아놓으면 ‘그래도 이런 삶이 있었다’는 정도는 되지 않을까 했는데 그것도 잘 안 되었어요. 횡설수설한 것이 작품이 아닌데 활자화까지 될 줄은 몰랐지요.” 



칼바람 매서웠던 지난 19일 저녁 서울 대학로의 한 피자집에서 원로 극작가이자 연출가 오태석(69)씨의 공연대본 전집(16권, 연극과 인간 펴냄) 출판을 기념하는 모임이 열렸다. 1984년 극단 목화 창단 이래 ‘오태석 사단’을 지켜온 조상건, 한명구, 정원중씨 등 나이 지긋한 배우들과 지인 등 20여명이 마련한 자리였다. 한국 연극계의 봉우리로 우뚝 선 노 연출가의 출판기념회치고는 검박했으나 분위기는 흥겨웠다. 연세대 철학과 2학년 시절인 1962년 발표해 자신의 연출로 서울 옛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 무대까지 올린 첫 작품 <영광>부터 미발표 신작 <아롱구지 흥망성쇠>까지 노 작가가 47년간 조탁한 작업들을 전집 한두름에 꿰어 첫선을 보이는 행사였다.   



두달 전 고희를 넘긴 오씨는 “부끄럽다. 책이 될 만한 글이어야지. 괴발개발 다 모아놓은 거야”라며 쑥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제자들의 깜짝 선물에 기분이 좋았던지 “앞으로 스무 권은 채워야지”라며 특유의 쩌렁쩌렁한 웃음을 터뜨렸다.

전집은 그의 오랜 지우인 서연호(68)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와 장원재 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43·전 숭실대 교수)이 2000년 8월부터 매달려온 고된 공동작업의 결산이다. 두 사람은 “한국을 대표하는 극작가의 대본에 정본이 없다면 후학들의 연구가 어렵다”는 데 뜻을 모으고 그를 설득했다. 장씨는 “오 선생님이 저희 말씀을 다 듣고 난 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며 허락하셨다”고 떠올렸다.

그 뒤 세 사람은 4박5일간 함께 생활하면서, 오씨가 서씨와의 대담에서 밝힌 연극 제작원리를 <오태석 연극: 실험과 도전의 40년-원리, 방법, 세계관>이란 대담집으로 정리했다. 오씨의 공연 일지·목록을 짜고 인터뷰로 확인하면서 대본을 수집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김미도 서울산업대 교수, 이상우 고려대 교수 등 후학 30여명도 무료 봉사로 매달렸다. 유실된 일부 초기작들은 수집조차 어려웠고, 작가가 기억하지 못한 작품도 있어서 거의 탐문수사를 방불케 하는 수작업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끝내 1962년 발표한 첫 작품 <영광>과 그 이듬해 공연된 두번째 작품 <사중주>는 기록만 남길 수밖에 없었다. 또 1968년 공연된 <고초열>도 소장자가 공개를 꺼려 대본을 구하지 못했다.

전집에는 그가 쓴 대본 78편과 작품연보, 평론가들의 글이 실렸다. 그 가운데는 연습, 리허설만 하고 공연되지 못했거나, 육필 원고로만 보관된 작품도 있다. 그럼에도 전집은 오태석이라는 걸출한 극작가·연출가를 세상에 올바르게 드러내는 일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고 저자들은 입을 모았다.

다시 말해 한국의 전통적 소재와 공연 기법을 활용한 실험적·창의적 연극으로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온 한 연극인의 자화상인 셈이다. 생략과 비약, 의외성, 즉흥성이라는 전통연희 기법에 능란한 장인, 전통의 현대화를 겨냥해 우리 말과 우리 몸짓, 우리 소리에 매달려온 고집쟁이의 모습이 담겨 있다. 또한 그가 11살 때 한국전쟁에서 부친이 북한군에 납치되고 집안이 풍비박산 난 상흔이 다양한 작품에 변주되는 과정도 엿볼 수 있다.

연극평론가 안치운 호서대 교수는 “작가의 완간본이 나왔다는 것은 개인의 유산에서 사회의 유산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며 “연극계에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오씨도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연극은 콘크리트 담긴 레미콘 트럭과 같다. 자갈과 모래, 시멘트가 뒤섞여 끊임없이 돌아가야 한다. 안 그러면 굳어버린다.”

그는 현재 <춘풍의 처>(31일까지)와 <분장실>(내년 1월31일까지)을 대학로 소극장에 올리고 있기도 하다. “멍석 한 잎 넓이에서도 연극은 가능하다”는 노 연극인의 끊임없는 실험은 “스무 권의 전집을 채우고 싶다”는 바람처럼 계속될 것 같다.(정상영 기자) 

09. 12. 24. 

P.S. <춘풍의 처>는 시한이 촉박하지만, <분장실>은 꼭 한번 보고 싶은 연극이다. 간단한 소개기사도 참고삼아 옮겨놓는다.     



주간한국(09. 12. 22) 순수한 여배우들과 천진한 귀신들… 연극 '분장실'

일본의 대표적인 극작가 시미즈 쿠니오의 원작을 바탕으로 오태석 연출이 우리 정서와 언어에 맞게 각색한 작품. 극에는 생전 주연을 하지 못해 한이 맺혀 분장실에 머무는 두 여배우 귀신과 주연을 연기하면서 자신의 삶이 잔혹하다고 느끼는 한 여배우가 등장한다. 3명 외에도 현재 주연의 뒤에서 대사를 불러주는 프롬프터 역할을 맡고 있는 한 여배우도 있다. 이들 4명이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있는 일'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벌이는 사건이 극의 중심이다.

극의 공간적 배경은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가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어느 극장의 분장실. 현실 세계와 죽은 유령의 세계가 공존하는 분장실이라는 공간 구성(관객을 비추는 대형거울과 바퀴가 달려 움직이는 화장대)이 특징적이다. 러시아풍의 음악, 브레히트 극의 음악은 극적 구성을 돕는다.

2001년에 이어 오태석 연출과 오랫동안 함께해 온 4명의 여배우가 출연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우 조은아와 문현정, <맥베스>의 장은진,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의 구옥자 등이다. 그들은 인간적인 순수한 내면을 가진 여배우들과 천진한 귀신을 연기한다. 또한 놓쳐버린 기회 혹은 그 기회마저 포기해버리는 현대인들의 삶을 어루만진다. 12월 18일부터 1월 31일까지. 디마떼오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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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25 08:32   좋아요 0 | URL
관심있는 스크랩에 대한 의무감에 동감합니다. 로쟈님의 스크랩 덕을 봅니다. 저 역시 쌓여 갈 수록 특별한 것들이 일반화되는 것을 봅니다. 원로 연출가에 대한 공연대본집은 후학들에게 좋은 책이 되겠습니다. 특히 어려서 가족을 잃은 상처로 인해 세상을 보는 남다른 눈이 작품에 선명히 드리워저 있겠습니다.

로쟈 2009-12-27 09:16   좋아요 0 | URL
'스무 권'이 마저 채워지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