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마크 릴라의 <사산된 신>(바다출판사, 2009)에 대한 서평기사다.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긴 하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몰입하기는 어려운 책이었다. '정치가 저지른 모든 악행의 근원에는 종교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도 좀 지나친 것으로 여겨졌고 은근한 서구 근대 우월주의도 독서를 불편하게 했다. 포인트를 잡지 못해 꽤나 애를 먹으며 쓴 걸로 기억에 남을 만하다.   

한겨레21(09. 09. 14)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이유, 종교 

‘종교는 왜 정치를 욕망하는가’란 부제가 붙어 있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크 릴라의 <사산된 신>(바다출판사 펴냄)은 입장이 분명한 책이다. “인간이 전쟁에서 짐승도 하지 않을 만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신을 믿기 때문이다. 짐승은 먹이나 번식을 위해서 싸울 뿐이지만,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려고 싸운다.” 곧, 저자는 인간을 짐승보다도 더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광신주의이고 메시아주의적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는, 이른바 ‘정치신학’에서 비롯한다.  

사실 인류사의 대다수 문명과 시대, 지역에서 인간은 정치적 사안의 답을 구하려 할 때 신에게 의존해왔다. 곧 정치신학은 유구한 전통이자 인간 사고의 원시적 형태다. 하지만 서구에서 정치신학은 그에 맞선 17세기 계몽철학자들의 지적 반란과 도전에 의해 무너진다. 기독교 정치신학에서 탈피해여, 신의 계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정치를 생각하고 말하고자 한 새로운 철학이 대두한 것이다. ‘정치신학’에 견주어 말하자면 이것이 ‘정치철학’이다.  

정치신학을 대체함으로써 정치철학은 서구 사회를 정치신학의 반대쪽 강기슭으로 옮겨놓았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많은 문명이 정치신학에 예속된 강 저편에 남아있다는 점이고, 동시에 서구인들이 이룩한 ‘사고혁명’이 아직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다시금 계시와 이성, 독단주의와 관용주의, 신탁과 합의, 신성한 소명과 통속적 가치관 사이의 충돌을 목도하고 있고, 이것은 16세기 투쟁의 되풀이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그는 정치신학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정치신학과 근대 정치철학의 논쟁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그것을 재구성한다.    

기독교 정치신학은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이 신성한 연계를 이루고 있다는 이미지에 의존한다. 그러한 이미지에 가장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 철학자가 토머스 홉스이다. 그의 대표작 <리바이어던>(1651)의 목표는 기독교 신학의 전체 전통에 대한 공격과 파괴였다는 것이 마크 릴라의 평가다. 인간을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피조물이라고 보는 성서의 관점과는 달리 홉스는 인간 자신의 경험에서 모든 것을 끌어내고자 한다. “종교의 징조나 열매가 오직 인간 속에만 있다는 점으로 보아 종교의 씨앗 역시 인간 속에 있다는 점은 의심할 근거가 없다.”고 홉스는 말했다. 그는 정치적이건 종교적이건 간에 모든 인간 행위의 기본 동기는 공포와, 무지, 욕구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법은 정치신학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홉스는 ‘지상의 신’이라는 절대 군주 형상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렇듯 정치신학의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 종교와 공익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것이 홉스의 가장 기여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주의 전통에서 종교가 이전처럼 정치를 위협하거나 광신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한다. 독일의 사례인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광신적인 신앙심이 더 이상 근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으리라고 보았다. 다만 그들은 종교의 도덕진리를 근대 정치생활과 화합시키고자 했고, 그것이 그들이 지향했던 목표이자 ‘신’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 신학은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무너진다. 더불어 그들이 꿈꾸었던 신은 ‘사산된 신’에 불과했다는 것이 폭로된다.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더라도 종말론적 구원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언제라도 악용됐다.  

따라서 저자가 보기에 ‘종교의 시대’가 끝났으며 사적 신앙은 존재하더라도 정치신학은 부활될 수 없다는 확신은 아직 성급하다. 정교 분리주의는 아직도 도전이자 실험이라는 것이다. 책은 서구의 근대 사상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지만, 서구만이 ‘정치신학’을 극복했다는 서구 우월주의적 편견도 간과하기 어렵다.  

09. 09. 10.  

P.S. 책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리바이어선>이라고 표기하는데, 기왕에 번역본들에서의 표기가 <리바이어던>인 만큼 통일시켜주는 것이 좋았겠다. 이 <리바이어던>에 대한 반응을 소개하는 한 대목은 이렇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출간 이후 한 세기 동안 널리 비방을 당했다. 대부분의 비판은 교회와 정치신학자들로부터 날아왔고, 그들은 유럽 독자들에게 유서 깊은 기독교 체제를 벗어날 때 따를 위험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을 때마다 홉스를 희생양으로 이용했다. 인간을 짐승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본 홉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인간은 더욱 짐승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96쪽)   

내가 붙이진 않았지만 기사의 제목과도 연관이 있는 대목인데, 번역엔 약간의 착오가 있다. 세번째 문장의 원문은 "Hobbes treated human beings as little more than beasts, they said, and would only make them more beastly if he were listened to."(91쪽)이다. 부정의 뜻을 가진 'little more than'을 'a little more than'으로 잘못 본 듯싶다. "인간을 짐승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본 홉스"가 아니라 "인간을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존재로 본 홉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게 문맥상으로도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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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9-10 04:31 
    [책] '사산된 신' 내용요약 — (via 로쟈)
 
 
펠릭스 2009-09-10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삭 줍는 농부의 마음!

로쟈 2009-09-11 07:01   좋아요 0 | URL
벌써 수확의 계절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