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배송받은 잡지는 홍대앞 상상마당에서 펴내는 컬처 매거진 <브뤼트>(제4호)다(http://www.sangsangmadang.com/magazine/brut/). '우리 시대의 텍스트'란 기획특집 설문에 참여하여 '우리시대의 고전' 10권을 추천하고(애초에 '우리시대의 텍스트'라고 했으면 목록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그중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 대해서는 간단한 설명도 붙였다. 짧은 글이지만 옮겨놓는다(오타들은 수정했다).
브뤼트(09년 9월호) Our Generation, New Text - <트랜스크리틱>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1941- )의 <트랜스크리틱>은 스스로가 ‘특별한 책’이라고 자부한 대표작이다. ‘나쓰세 소세키론’으로 데뷔한 문학평론가이기도 하지만, 가라타니는 도쿄대학 경제학부 출신으로 그의 평생 화두는 마르크스와 <자본론>에 대한 새로운 독해다. 이미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4)을 통해 첫걸음을 뗀 고진은 마침내 <트랜스크리틱>을 통해서 청년시절부터 40년간 골몰해온 문제를 마침내 일단락짓는다.
가라타니가 골몰해온 문제란 ‘자본주의 국가체제’의 극복이 어떻게 가능한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의 <자본론> 독해에 동의할 수 없었고 경제학자들의 제한적인 <자본론> 해석에 불만이었다. 가라타니의 독특한 착안은 흔히 헤겔과의 관계에서 읽는 것이 보통인 마르크스의 이론을 칸트와의 관계 속에서 읽고자 한 것이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내가 트랜스크리틱이라 부르는 것은 윤리성과 정치경제학 영역의 사이, 칸트적 비판과 마르크스적 비판 사이의 코드 변환, 즉 칸트로부터 마르크스를 읽어내고 마르크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는 시도이다.”
그런 견지에서 가라타니는 <자본론>에 비견될 수 있는 유일한 책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발견임과 동시에 칸트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낳는다. 가라타니는 코뮤니즘의 형이상학이 어떻게 재건될 수 있을까란 관점에서 칸트를 다시 읽으며, 칸트적 ‘지상명령’의 문제로 마르크스의 코뮤니즘을 재해석한다. 그 결과 전지구적 세계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이론적 원리를 구축하게 된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현재의 자본주의 국가는 각기 상이한 교환양식에 근거한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의 삼위일체 체제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대항은 동시에 네이션=스테이트에 대한 대항이어야 하며, 국가의 강화를 통한 자본제 폐지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 대신에 그가 제안하는 것이 ‘어소시에셔니즘’이다. 노동자가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로서 참여하는 생산-소비의 협동조합의 조직화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모델로서 제시된다. 거기서 비자본제적 생산-소비 협동조합의 지역통화는 “화폐가 없으면 안된다”와 “화폐가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자본론>에서의 이율배반에 대한 칸트식 해법이기도 하다.
가라타니가 제안하는 ‘대항운동’이 얼마나 현실적이며 어느 정도까지 실현가능한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운동이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는 원리를 스스로 실현하지 못할 때, 장래에 자본과 국가를 지양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가라타니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트랜스크리틱>은 충분한 탐독과 고구(考究)의 대상이 될 만하다.
09. 09. 05.
P.S. 책에서의 인용문도 한 단락 포함됐는데, 내가 고른 세 핵심 대목 가운데 아래의 것이 책에 실렸다.

폴라니는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암에 비유했다. 자본주의는 농업적 공동체나 봉건적 국가 ‘사이’에서 시작되었고, 곧 내부로 침입해 그것들을 자신들에 맞춰 새롭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기생적인 존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자=소비자의 초국가적(transnational) 네트워크는 자본과 국가라는 암에 생기는 대항 암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본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유통의 장을 거점으로 한 내재적 또는 초출적 대항운동은 완전하게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어떠한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도 손을 댈 수가 없다. <자본론>은 그것에 논리적 근거를 부여했다. 가치형태에서의 비대칭적 관계(상품과 화폐)는 자본을 낳지만, 동시에 거기에 자본을 종식시키는 ‘전위적인’(transpositional) 모멘트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한 트랜스크리틱이다.(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