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목동으로 외출했다가 돌아와보니 계간지 하나가 배송돼 있다. 계간 <쿨투라> 가을호다. 날은 아직 무덥지만, 이번주부터, 아니 지난 주말부터 본격적으로 계간지 가을호들이 나오는 듯하다. 긴 글은 아니지만 나도 몇 편 실은 것이 있어서 수확을 거둬들이는 기분이 된다. 여름나절에 내가 무얼 했던 것인지 약간은 '변명'해주지 않을까 싶다. <쿨투라>에 실은 건 서평이며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것이다(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만 세 편의 서평을 쓴 셈이 되는데, 그래도 아직 세 편 정도의 거리는 더 남아 있다. 아직 안 '뜯어먹은' 곳은 언제 해치워야 할까?..  

 

쿨투라(09년 가을호) 충돌의 교착상태, 무엇이 필요한가? 

슬라보예 지젝이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은 <시차적 관점>(마티 펴냄)은 ‘시차’라는 개념을 키워드로 삼아서 자신이 천착해온 사유와 문제를 종합하고 재구성한 책이다. 가히 ‘슬라보예 지젝의 모든 것’이라고도 부름직하다. 이 두툼한 저작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구축하고 세계를 보는 시각 자체의 변경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한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에 육박하는 것이지 않을까.       

‘시차(parallax)’란 무엇인가? “관찰하는 위치에 따라 새로운 시선이 제시되고, 이 때문에 초래되는 대상의 명백한 전치”를 가리킨다. 이 개념을 지젝은 두 층위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시차적 간극이 변증법의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는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는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러한 재건이 필요한가? 그것은 오늘날 변증법적 유물론이 퇴각 국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국면에서 오히려 레닌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군대가 퇴각할 때는 진격할 때보다 백 배 더 많은 규율이 요구된다는 것이 레닌의 전략적 통찰이었다.   

지젝의 전략은 자신의 헤겔-라캉주의적 입장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그 등식을 “정신은 뼈다”와 같은 헤겔식 무한판단의 일종으로 제시한다. 헤겔의 무한판단에 따르면 가장 높은 차원의 것(정신)과 가장 낮은 차원의 것(뼈)은 사변적으로 동일한데, 이러한 동일성은 법과 그 외설적 이면(보충)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젝이 어떤 주장을 전개하는가를 한 가지 사례를 통해 예시하면 이렇다.   

지난 2004년에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 포로들을 고문하고 굴욕을 주는 사진이 공개되어 큰 파문이 일자 조지 부시는 그런 행동이 민주주의와 자유, 인간의 존엄성 같이 미국이 대표하고자 하는 가치와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건이 폭로되기 이전부터 미국 당국과 미군 수뇌부는 이라크 군사감옥에서의 학대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묵인했다. 사건이 미디어를 통해서 불거지자 비로소 ‘문제’를 시인했을 뿐이다. 이 사건은 미군 사령부의 해명대로 단지 병사들이 전쟁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지젝이 보기엔 그렇지 않다.  

사담 후세인 정권하에서도 자국의 죄수들에 대한 고문은 자행됐었다. 하지만 그때의 초점이 직접적으로 가해진 잔인한 고통이었던 반면에 미군 병사들이 의도한 건 포로들에게 심리적 굴욕을 주는 일이었다. 때문에 벌거벗은 포로들의 굴욕적인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카메라로 녹화한 것은 이 고문 과정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즉, 그들의 고문은 일종의 예술적 ‘퍼포먼스’였다. 지젝은 이 ‘퍼포먼스’가 미국 대중문화의 외설적 이면, 곧 폐쇄적인 공동체에 입단할 때 겪어야 하는 ‘신고식’을 연상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부시 자신도 예일대학 시절 ‘해골과 뼈’라는 배타적인 비밀단체의 회원이었다는 걸 덧붙이면서. 결국 이러한 미국적 신고식이 이라크 포로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따라서 아부 그라이브의 고문은 병사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저지른 위법 행위가 아니며, 직접적으로 명령받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문율의 ‘코드 레드’에 의해서 적법한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이다.  

요컨대 아부 그라이브는 단순히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한 미국의 거만한 태도가 표출된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굴욕적인 고문을 통해서 이라크 포로들은 미국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신고식을 치른 것인바, 그 고문이야말로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개인의 존엄 같은 가치의 외설의(*외설적) 이면이다. 단, 그 신고식은 지극히 냉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일원이 되고 싶니? 좋아, 우리 생활방식의 중핵을 한번 맛 봐.” 

미국적 가치의 외설적 이면은 관타나모에 수용된 포로들의 운명에 대한 논쟁에서도 확인된다. 한 TV토론 참석자는 이들이 ‘폭탄이 놓친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다. 원래는 합법적인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수행된 미군의 폭격 목표였으나 운이 좋아 생존하게 된 이들이므로 전쟁 포로가 돼 굴욕을 당할지라도 운명을 탓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포로들은 문자 그대로 ‘살아 있는 죽은 자’이다. 법적으론 이미 죽은 자이면서 생물학적으로만 아직 살아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법에 의해 보호받지 않는다. 인권과 생명에 대한 이러한 태도와 대비되는 사례는 2005년에 미국의 국가적 관심사가 되었던 테리 시아보이다. 15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살아온 시아보의 남편은 그녀의 평화로운 죽음을 위해 의료장치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녀의 부모는 이에 반대했다. 사건은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공방으로 이어졌고 미국내 찬반여론을 들끓게 했다.   

이러한 두 사례에서 지젝은 다시 한 번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의 사변적 동일성을 주장하는 헤겔의 무한판단을 떠올린다. 즉 한편에는 ‘폭탄이 놓친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식물인간이 있다. 둘 다 ‘벌거벗은 생명’이지만 한쪽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모두 박탈당하고 다른 한쪽은 전체 국가기구에 의해 보호받는다. 이것이 인권의 현주소이자, 무엇이 미국의 생활방식을 지탱해주는가를 말해주는 ‘미국적 가치’의 중핵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랍 문명과 미국 문명 사이의 충돌은 야만과 인간 존중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잔인한 고문과 매체적 스펙터클로서의 고문 사이의 충돌이다. 곧, 모든 문명의 충돌은 그 이면적 야만성의 충돌이기도 하다.  

<시차적 관점>은 이러한 충돌의 교착상태를 돌파하기 위한 지젝의 전방위적이면서 도전적인 통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무엇이 필요한가? 물론 혁명이고 혁명적 폭력이다. 이때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폭력은 사회적 배치의 기본좌표를 변경하는 것이다. 그의 ‘시차적 관점’은 그러한 좌표변경의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그를 읽으며 동시대 철학적 사변의 최대치를 읽는다.  

09. 08. 17.  

P.S. 헤겔의 '정신은 뼈다'에 대한 지젝의 설명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5)의 347-350쪽을 더 참조할 수 있다. "각 항이 서로 양립불가능하고 공통된 척도가 없는 명제"라는 점에서 헤겔은 이를 '사변적인 명제'라고 부른다. 지젝의 부연에 따르면, 이것은 "두 개의 절대적으로 양립불가능한 항들의 등식, 주체와 고정된 대상의 완전한 관성 사이의 순수하고 부정적인 운동"(this equation of two absolutely incompatible terms, pure negative movemment of the subject and the total inertia of a rigid object)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직접 들고 있는 사례는 이런 것이다. 

"결국 정신이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추동시키는 깊이와 그 자신이 실제로 말하는 것에 대한 의식의 무지고귀한 것과 비천한 것이 한데 어울러져 있는 것처럼 함께 존재한다. 자연은 이를 생명체 안에서 순진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완성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생식기관과 방뇨기관의 결합을 통해서다. 무한으로서의 무한판단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삶의 완성이라 할 것이며 표상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무한판단은 방뇨처럼 작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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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신은 뼈다!'
    from Droit de cité (씨테에 대한 권리) 2009-08-18 08:11 
    '정신은 뼈다'(Spirit is a bone)라는 헤겔의 말에 대한 ({시차적 관점} 등에 제시된) 지젝의 해석은 아무 근거 없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헤겔에게서 가장 높은 차원의 것과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의 일종의 단락(shortcircuit)으로서 '무한판단'(infinite judgment)으로 제시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정신과 뼈라는) 일종의 대립물의 일치를 보여준다는 것인데, 이러한 해석은 헤겔의 텍스트(정신현상학)에서 
 
 
외투 2009-08-18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닫힌 공간끼리 충돌(한쪽은 박탈당하고 다른 한쪽은 보호받는다)은 추돌이 아니다. 모두가 독립된 공간에 밀폐되어 있다. 그 공들(독립된 공간)을 하나의 큰 공간에 넣고 이리보고 저리보며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