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공간 지행네트워크의 첫번째 책이 나왔다. <나는 순응주의자가 아닙니다>(난장, 2009). 지행네트워크는 "2007년 7월 30일, ‘행동하는 지식인’을 꿈꾸는 세 명의 ‘포스트 386세대’가 만든 대안적 연구공간"이다. 책에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긴 서문이 수록돼 있는데, 현 시국과도 관련하여 대안지식공동체의 의의를 짚어주고 있어서 일독해봄 직하다. 지행네트워크의 홈피에서 옮겨왔으며, 알라딘에서는 '미리보기'로 읽어볼 수 있다.  

추천사: 비주류 지식인의 몽상과 우정

전국적으로 시국선언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지식인들에 의한 시국선언은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고비마다 있어왔지만 이번에는 그 규모가 아마도 제일 크고, 참여자들의 정치적 성향도 비교적 다양한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대학교수, 교사, 언론인, 종교인, 작가, 예술인을 포괄하는 이들 지식인의 시국선언은 전직 대통령의 자결이라는 충격적인 사태에서 촉발된 측면이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명박 정권 밑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갈수록 후퇴하고 있다는 공통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상황을 바라보는 국가권력과 보수언론의 태도이다. 그들은 지금 시국선언 참여자들의 소속 학교, 기관, 집단 전체의 규모로 볼 때 이들 지식인의 목소리가 극히 부분적인 의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런 반응은 지금 국가권력이 얼마나 ‘민심’을 읽지 못하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단적인 증거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며, 또 실제로 거기에는 상당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하기는 집권자나 보수세력은 국가권력의 전횡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폄하하기 위해서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다수’를 언급하는 오래된, 상투적인 습성이 있다. 그런 자세로 일관하다가 결국 처참하게 몰락하는 게 또한 권력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권력이 기대는 그런 편의적인 논리에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고도로 조직화된 산업국가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대다수 지식인들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해 있다. 그런 한에서 그들은 근본적으로 기성체제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시국선언에 참여하고 있는 지식인들도 대부분 여기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시국선언 참여자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민주적 절차가 존중되는 좀더 부드러운 통치방식으로의 변화이지, 지금과 같은 상황을 초래한 근원적인 조건과 요인에 주의하면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급진적 체제변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부를 향하여 민주적인 절차를 지키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게 덜 중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민주주의가 살아나고, 좀더 인간적인 통치체제가 실질적으로 가능하려면 권력자의 단순한 선의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현실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게 일차적인 과제이고, 그것이 좀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선결조건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형식적인 민주주의나마 이명박 정권의 출범과 함께 어이없이 무너지기 시작한 게 과연 이명박만의 탓인가 하는 점이다. 소위 민주정권에서 보수정권으로 권력이 교체되자마자 그렇게 쉽게 무너질 민주주의라면 그 민주주의의 뿌리가 실은 매우 허약한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소위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이 나라에서 실질적 민주주의가 강화되기는커녕 실제로 훼손되어온 측면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두 정부 역시 경제성장 논리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성장을 위해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 일관되게 추진해온 데 주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본래 신자유주의란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시장의 자유와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공공의 이익과 사회적 연대, 그리고 생존의 자연적 한계를 무시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의 메커니즘을 정책적으로 옹호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경제사상이다. 그런 노선을 채택하고 일관되게 추진하는 이상, 아무리 민주적 정부를 표방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여하한 사후적인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정책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책을 강구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결국 땜질처방에 불과할 뿐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 공동체의 전면적 해체, 환경파괴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그대로 정치적 발언권에 있어서의 불평등의 심화로 이어지게 마련이고, 그 필연적인 결과는 사실상 허울뿐인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 시스템이란 절대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체제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신자유주의 정책이 거침없이 활개를 칠수록 국가는 전면적으로 경찰국가 체제로 전락하기 쉽다. 이것은 간단히 생각해 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신자유주의는 흔히 국가에 의한 개입이나 공적 규제조치를 철저히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국가 공권력의 지원 없이는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부유층에 대한 감세, 민영화, 규제완화, 자유무역 등 신자유주의의 핵심정책을 현실화하자면 오랜 세월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서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피를 흘리며 쟁취해온 다양한 기본적 권리를 포함하여, 문명사회가 지구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합의해 놓은 최소한의 환경규제까지도 짓밟거나 내팽개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권력은 시장권력의 이러한 요구에 응하여 법률을 만들거나 개정하고, 그리하여 법치의 이름으로 집회와 표현의 자유라는 가장 기초적인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 특공대의 투입도 주저하지 않는 만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국가가 쉽사리 경찰국가 체제로 전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국가개입을 반대한다는 것은 따져보면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따져보면, 신자유주의가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게다가 작년 가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체제의 붕괴와 그로 인한 범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의 유효성은 사실상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멀쩡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그 누구도 신자유주의의 강화를 통해서 이 파국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최근에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그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거나 옹호해왔던 이데올로그들 중에 기왕의 자기 신념이 더 이상 현실적합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반성의 자세를 표명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명박 정권과 그 지지자들은 이런 세계적인 추세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아직도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세계적인 차원에서 명백히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 논리를 포기하지 못하는 그들의 이 시대착오적인 우행(愚行)이 성공할 리는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 노선을 완강하게 고집하는 한, 국가권력은 저항세력을 통제하고 탄압하기 위해서 갈수록 강도 높은 강압통치에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심대한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시대착오적인 행태는 단명하기 마련이다. 지금 온 세계에는 약육강식을 부추기는 배타적인 경쟁 논리로는 조만간 문명사회 전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긴박한 인식이 광범하게 퍼져 나가고 있다. 유독 한국 사회만 이런 세계적인 흐름을 언제까지나 외면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실, 작년의 대규모 촛불집회-시위에 이어서 지금도 온갖 탄압을 무릅쓰고 다양한 형태로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는 민중의 저항운동은 그때그때마다의 현안에 대한 문제제기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좀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강한 욕구의 분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이 사회가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만 내세우면 모든 게 허용될 만큼 정신적 빈곤에 갇힌 열등사회가 더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희망적인 징후를 구체적인 현실로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시회현상의 의미를 좀더 깊이 있게, 정확히 읽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거리와 광장에서 혹은 작업장이나 농성장에서 억제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온갖 분노와 슬픔, 불안과 불만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이 사회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규율해왔던 주도적인 가치와 제도와 관습이 총체적으로 크나큰 위기에 도달했음을 증언해주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점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이 그렇다면 지금은 단순히 형식적인 차원의 민주주의의 회복 운운할 단계는 이미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들이 국내외적으로 직면하고 위기는 통상적인 의미의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넘어선 총체적 문명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국가 간의 그리고 국가 내부의 양극화, 도농격차, 인구・실업문제, 남북격차, 전쟁위협, 에너지・자원 고갈, 지구온난화라는 가공할 사태를 비롯한 범세계적 생태위기, 그리고 공동체의 붕괴와 사회적 연대의 해체 등, 이 모든 위기는 실제로 서로 긴밀히 얽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각기 따로 분리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이 모든 위기는 결국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자본주의 문명의 종언이 임박함에 따른 위기로 해석될 수 있다.

돌이켜볼 때, 오늘날 사람들이 대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거의 모든 근대적 제도와 관습은 대부분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의 불가결한 일부로 형성・발달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규모 산업 생산과 유통망, 화폐제도와 금융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 병원, 교통, 통신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서비스 역시 자본주의 시스템을 뒷받침하고 유지하는 데 빠트릴 수 없는 요소들이다. 나아가서 정당정치, 대의제 민주주의 등 근대적 국가의 통치체제의 근본 골격을 구성하는 정치제도 역시 산업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성장해온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산물인 한, 이것은 시작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종말을 맞을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총체적인 문명의 위기는 그러한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징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요컨대 작년의 대규모 촛불시위는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와 실패를 명백히 드러낸 현상이었다. 그토록 많은 시민들이 저녁마다 촛불을 들고 거리와 광장으로 모여들어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절규했던 것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든 무엇이든, 국회가 민중의 의사를 정당하게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행 헌법과 정치제도 밑에서, 거리와 광장에서 아무리 강렬하게 표출된다 할지라도 그 민중의 목소리에 대한 경청을 권력자가 거부하는 한, 민중은 깊이 좌절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국가권력이 폭력수단으로 전방위적인 탄압을 개시하면 시민들은 퇴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와 우울 속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문제는 권력자의 인간적인 자질이나 정치적인 신념이 아니라, 권력자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지금과 같은 정치 시스템 그 자체인 것이다. 이 경우 권력자는 대통령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의회라는 집단 권력자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현행의 정치제도로는 이 근본적인 문제의 해소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현재와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란 기득권층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과두(寡頭) 통치 시스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자유시장 논리에 의거한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틀로서 확립되어온 제도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근대문명이 그 역사적 유효성을 상실하고 쇠퇴기에 접어든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 역시 그 수명을 다했다고 보는 게 옳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광범한 민중의 욕구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탈바꿈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탈바꿈은 밑으로부터의 민중의 능동적인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변혁이어야지, 정치 엘리트들 사이의 권력배분에 집중된 부분적 개헌 따위로 될 일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엄청난 역사적 대변환기에 서 있다는 근본적인 성찰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사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주류 지식인은 자본주의 국가 체제에 기반을 둔 근대문명의 지속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고 제공하는 일을 수행하는 데 종사해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기관이 대학이든 연구소든, 혹은 언론기관이든 가릴 것 없이 결국은 ‘싱크탱크’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왔다고 할 수 있다. ‘싱크탱크’란, 간단히 말하면, ‘탱크’를 만드는 사람들이 주는 돈으로 움직이는 연구와 교육 및 선전기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탱크’로 상징되는 국가와 자본의 결합체를 위해 봉사하는 체제 순응적인 존재인 셈이다.

체제 순응적인 지식인들이 오늘날 우리의 삶의 지층에서 요동치고 있는 근본적인 변화에의 욕구에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기성의 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부분적인 수선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어놓을지도 모를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지적・사상적 모험에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질 가능성이 그들에게는 거의 없다.

역사의 변환기에 항상 그랬듯이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열망과 욕구는 체제의 변두리에서 싹트고 성장한다. 체제 비판적 지식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근본적인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는 자본주의 근대문명이라는 기본적인 틀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지 않는 한, 우리가 직면한 총체적인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전망은 열리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아직도 경제성장 논리에 알게 모르게 붙들려 있다. 그런 한에서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스스로 어떻게 규정하든 본질적으로는 주류파 지식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에게서 지금과 같은 폐색상황을 뿌리로부터 뛰어넘을 수 있는 지적・사상적 결단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전망을 열어줄 지적・사상적 에너지는 역시 비주류 지식인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지금 이 사회의 다수 민중과 마찬가지로 늘 생활의 불안정에 시달리고 현실의 압력 밑에서 계속해서 좌절을 경험하면서도, 새로운 삶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꿈과 열망으로 결합된 가난한 젊은 지식인들의 진지한 사색과 탐구의 기록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세계의 변혁을 위한 거창한 설계도를 제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의 근저적(根底的) 변혁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그러한 변혁이 있기 위해서는 아마도 먼저 세계 전역에 걸친 사회적・생태적 대파국이 닥쳐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런 어두운 전망 앞에서 낙담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세계를 당장에 뿌리로부터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우리 각자의 삶을 새롭게 하고, 또 가까이에 있는 이웃들의 작지만 의미 있는 삶의 변화를 위해서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취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의 성취에는 반드시 우정과 연대의 그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 책을 공동작업으로 엮어내는 지행네트워크의 젊은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비타협적인 삶이 오로지 자신들 사이의 우정의 그물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그러한 우정의 논리가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몽상하는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기본적 구성원리가 될 수 있다는 가정 밑에서 여러 실천적 가능성을 성실히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아마도 가장 소중한 미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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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7-27 11:35   좋아요 0 | URL
행동하는 지식인(양심), 지적 공간에 머물러 있으면,
초원과 정맥의 바람을 느끼기 어렸습니다.
비주류 지식인에게 거는 기대가 큼입니다.

로쟈 2009-07-28 21:42   좋아요 0 | URL
저보다 더 기대가 크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