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업그레이드된 물고기'란 페이퍼를 올려놓고 보니 생각나는 시가 있다. 역시나 95년 여름에 쓴 것인데, 제목이 '물고기는 죽는다'이니 <내 안의 물고기>란 책 제목과 맞물려 얼추 연상됨 직하지 않은가. 그래서 옮겨놓는다.
물고기는 죽는다
한 줌의 비가 흩뿌리고 물고기는 눈을 뜬다
몇 채의 집이 먼지처럼 떨어진다 물고기는
헤엄을 쳐야 한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 공간
물고기는 물결들을 뒤로 뒤로 밀어내며
하나의 이념처럼 눈알이 붉다 새벽이 멀다
물고기는 다만 헤엄을 쳐야 한다
몇 채의 집이 먼지처럼 무너져 앉고 물고기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쪽에 입을 맞춘다
한 줌의 비가 흩뿌리고 물고기는 눈을 뜬다
물고기는 눈을 뜨고 죽는다
09. 06. 13.
P.S. 20대 후반에 쓴 시작메모를 보니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다: "(...) 나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르고 그림도 그릴 줄 모른다. 달리기도 잘 못하고 수학도 잘 못한다. 고작 책읽는 걸 나는 주로 해왔을 뿐이다. 대학이란 곳이 책읽는 것과 관계가 있어서 나는 그럭저럭 이곳에서 버텨왔다. 그러나 가끔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직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새벽이 멀기 때문이다. 계속 헤엄을 치고는 있지만, 나는 내가 늙어갈 거라는 걸 알고, 언젠가 힘이 빠질 거라는 걸 안다. 자손을 많이 퍼뜨릴 만한 위인도 못 되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럴 듯한 유언들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좋아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 지상에서 인간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책이 되는 일이다." 책이 못 된다면 저자라도 될 일이다.(나는 저자가 되고 싶었다. '저자의 죽음'이란 얘기가 떠돌 때는 나도 따라서 죽고 싶었다.)"
흠, 그러다 결국 '저자'가 되긴 했다. 이젠 무얼 더 해야 할까.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의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시오랑의 말. "우리는 모두 어릿광대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있으니까." 이걸 조금 비틀어볼 수 있을 듯하다. 물고기 버전으로. "우리는 모두 물고기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헤엄을 쳐야 하니까." 눈을 뜨고 죽을 때까지. 요즘 같아선 눈을 부릅뜨고 죽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