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신간 몇 권을 소개하고 나면 주말엔 세 권 안팎의 관심도서가 남는다. 이번주도 비슷하다. 영화학자 크리스티앙 메츠의 <상상적 기표>(문학과지성사, 2009)가 불시에 출간된 것이 다소 놀랍긴 하지만 특별히 '대작'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읽을 만한 책'은 꽤 된다. 그 중 하나는 조지 레이코프의 <자유전쟁>(프레시안북, 2009). 최근 부쩍 자주 소개되면서 이제 '레이코프'란 이름도 낯설지는 않다.   

아마도 이 인지언어학자는 생존 언어학자 가운데 인지도를 따지자면 촘스키 다음쯤 되겠다. 국내에는 <인지의미론>(한국문화사, 1994), <삶으로서의 은유>(서광사, 1995; 박이정, 2006) 등의 학술적인 책으로 처음 소개됐지만, 그가 언론리뷰에서 주목받게 된 건 '프레임'이란 말을 유행어로 만든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삼인, 2006) 이후일 것이다. 이번에 나온 <자유전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듯한데(한국 또한 '자유전쟁'의 격전장이니만큼 이번 책은 시사하는 바가 특히 많을 듯싶다). 자신의 학문과 정치적 입장을 잘 접합시킨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까 한다.

한국일보(09. 06. 13)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들…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많은 일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부르카를 입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고, 극빈국 어린이에게 빵과 책을 제공하고, 제3세계 반정부 인사의 석방을 위해 콘서트를 연다. 동시에, 이런 일들도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수익률 제고를 위해 대량해고를 실시하고, 증여세율을 낮춰 빈부격차를 확대시키고, 모래와 가난뿐인 나라에 순항 미사일을 날린다.

<자유전쟁>은 자유라는 오래된 개념어의 이처럼 넓은 외연을 무대로, 진보와 보수가 격돌하는 미국 사회의 오늘을 그려낸 책이다. UC버클리대 언어학과 교수인 저자는 '인지언어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세계적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의 제자다. 

그러나 언어의 형식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스승과 달리, 그는 언어의 본질을 해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지 구조라는 입장을 취한다. 저자는 특히 정치적 사고를 읽어내는 도구로 인지언어학의 틀을 사용한다. '프레임 분석'이라 이름 붙인 이 틀을 다룬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은 2006년 국내에 번역돼 학계와 정치권에서 화제를 모았다.   

<자유전쟁>은 자유를 인지하고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의 역학관계와 도덕적ㆍ정치적 세계관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전통적인 자유 이념을 진보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정치적 참여권 확대, 노동환경 개선, 공공보건 강화 등 "지난 두 세기 동안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변화의 방향"이 자유라는 개념의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빠른 속도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수많은 보수 정당들이 자유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자유무역협정이나 자유시장 같은 용어에 '자유'가 등장한 데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진보, 보수 진영이 자유라는 개념을 쟁탈하기 위해 격돌하는 이유를 "자유는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자유 개념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도 있지만, 그밖의 큰 부분은 여백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진보주의자들은 우파가 자유를 말하는 것을 순전히 위선으로 여기고 있지만, 극우파들은 바로 이 자유 개념을 재정의하려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를 잃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만, 자유의 개념을 잃는 것은 훨씬 더 끔찍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사고를 결정하는 것은 논리 법칙이 아니라, 프레임이나 은유'라는 인지언어학의 틀을 자유 쟁탈전을 이해하는 돌파구로 제시한다. 진보와 보수가 추구하는 서로 다른 자유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내놓는 프레임은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과 '자애로운 부모' 모형이다.

자애로운 부모 모형에서는 각 개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고, 도덕적 인간이 되려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보살펴야 한다. 이런 가치체계가 자유와 연결될 때, 자유는 권리와 기회의 확대를 의미하고 타인의 자유와 상호의존적이다. 반면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에서 자유란 도덕적 권위자가 나눠주는 것이며, 도덕성과 명령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모형에서는 단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만 있으며, 도덕성은 도덕적 권위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다. 낙태나 동성결혼은 이 도덕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보수주의자들에게 이런 행위는 곧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된다.

저자는 부(富)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는 "보수주의적 경제 원리는 서민 납세자의 돈이 부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끊임없이 승인하는데, 이때 자유 또한 다수의 서민에게서 소수의 부자에게 넘어간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런 시스템이 가능하도록 자유를 보수주의의 개념 속에 가두는 프레임들을 지적한다. 그것은 '누가 가난하라고 했나' '가난은 제 탓이니, 남을 탓해선 안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2009년 한국사회의 일상에서도 매일 부딪히게 되는 프레임들이다.(유상호기자) 

09. 06. 13.  

P.S. 진보적 언어학자로서 레이코프의 주된 관심이 '정치적 마인드'에 있다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최신간 <정치적 마인드>(2009)는 레이코프의 '기본서'가 될 듯하다(이 역시 국내에 소개되면 좋겠다). '정치적 마인드'와 함께 인지언어학자들의 관심대상이 되고 있는 건 '도덕적 마인드'인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레이코프의 동료인 마크 존슨의 <도덕적 상상력>(서광사, 2008)이 이미 출간돼 있다. 다소 학술적인 책이긴 하지만, 인지과학이 윤리학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럼 이제 '심미적 마인드'만 남는 것인가...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샘 2009-06-13 09:53   좋아요 0 | URL
그래요. 전쟁 후 한국의 프레임과 은유는
뭐, 박정희와 개발, 교회와 우파... 뭐, 그런 데 갇혀있죠.
아직도 그네양이나 개발, 교회와 우파가 빨갱이를 때려잡는 걸 보면...
논리는 그런 데 먹혀들지 않으니까요.

로쟈 2009-06-13 11:21   좋아요 0 | URL
네, 그러니 '프레임 전쟁'이지요. 이게 수십 년 걸려서 만들어진 것이니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구요...

2009-06-13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3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게슴츠레 2009-06-13 19:08   좋아요 0 | URL
얼마 전 한 만화(http://homa.egloos.com/4152404)를 보면서 '노무현'이야말로 하나의 프레임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로쟈 2009-06-14 11:19   좋아요 0 | URL
프레임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9-06-13 21:53   좋아요 0 | URL
이슈 선점,개념전쟁...이데올로기 주입의 기법을 꿰뚫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보적 이론가들이 정교하면서도 대중들의 일상언어로 홍보할 줄 아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삼성이나 조중동이 만든 조작적 개념어를 마치 일상어 쓰듯 바로 앵무새처럼 쓰는 대중들이 많으니까요.

로쟈 2009-06-14 11:21   좋아요 0 | URL
'자유'란 번역어가 오해를 부추기는 면도 있다고 전에 읽었어요. 개념사가 프레임에서 해방되기 위한 무기가 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