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장대 같은 소나기가 내리는 탓에 학교 강사실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마침 건축 전문 월간지 <공간(SPACE)>(6월호)이 배송되었기에 막간에 잡지에 실은 서평이나 옮겨놓는다. 예술경제학서로 분류되는 한스 애빙의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21세기북스, 2009)에 대한 것이다. 글은 잡지에 게재된 버전으로 수정했다.
SPACE(09년 6월호)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란 소설 제목도 있지만, ‘예술가’를 가장 빈번하게 수식하는 형용사는 ‘가난’이 아닐까 싶다.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이야말로 예술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구성한다. 비록 ‘부유한’ 예술가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 발표되는 예술가들의 경제형편에 대한 설문결과는 그러한 고정관념과 배치되지 않는다. 대다수 예술가들의 평균소득이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며, 창작만으로는 한 푼도 벌지 못하는 ‘소득 제로’ 예술가도 적지 않다. 반면 생존 작가의 그림이 100억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기도 하고 구스타프 클림트나 반 고흐의 그림은 1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낙찰되기도 한다.
상위 5%의 스타급 예술가들이 전체 소득의 95%를 가져간다니 예술사회 또한 전형적인 ‘승자독식사회’지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뭔가 특이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가들의 소득수준이 낮은 이유는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왜 예술분야에서는 각종 지원이나 기부 등의 후원영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일까? 네덜란드의 예술가이자 경제학자인 한스 애빙은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21세기북스 펴냄)에서 바로 그런 질문들을 던진다.
책의 부제는 ‘예술경제의 패러독스’로 간단히 말하자면 예술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 멋들어진 오페라하우스와 화려한 오프닝, 엄청나게 부유한 예술가와 부유한 후원자들의 세상이 하나의 얼굴이라면, 자기 돈을 써가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다른 부업과 여러 가지 지원금을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또 다른 얼굴이다. 한편에서는 예술의 신성함을 주장하며 상업성을 외면하고 혐오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외면/혐오를 상업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대관절 예술이 무엇이기에?
사회학적 관점에서 저자가 내리고 있는 예술의 정의는 이렇다. “예술이란 사람들이 예술이라 부르는 것이다.” 즉, 무엇이 예술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정의에서 ‘사람들’이 가리키는 건 대중이라기보다는 ‘예술계’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이다. 즉,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자면 “예술이란 일부 사람들이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인 셈이다. 이 정의가 의미하는 바는 예술이 특정한 사회적 계층이 갖고 있는 예술적 취향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으며 예술을 정의하는 힘은 사회적으로 불평등하게 분포돼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회적 계층에 따라 각기 다른 예술적 취향을 갖고 있다. 우월한 예술과 열등한 예술, 상위예술과 하위예술의 구분은 그러한 취향의 차이가 낳는다. 그럼에도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다면 그건 한 그룹의 예술적 취향은 무시되는 반면에 다른 그룹의 예술적 취향은 존중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저자는 ‘문화적 비대칭성’이라고 부른다. 알다시피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는 일부 계층이 독점하며, 예술은 그들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수단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처럼 되고자 ‘신분상승’을 꿈꾼다. 즉 ‘사회적 사다리’에 올라타고자 하는 것인데, 상징적인 차원에서 그 ‘사다리’에 해당하는 것이 상위계층의 예술적 태도와 취향이다. 곧 상위계층은 하위예술을 무시하지만, 하위계층은 상위계층을 동경한다. 예술에 대한 신화와 일반적 숭배는 그렇게 탄생한다.
예술은 실용품이라기보다는 사치품이다. 어떤 실용적인 용도를 목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경험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비실용적이고 사치스러운 예술이 진정한 예술로 정의되고 인정받는다. 왜냐하면 예술의 그러한 존재방식 자체가 귀족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비실용성은 실용성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매력이 된다. 자신의 지위와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시장은 문화적 우월성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장이 되며, 특정한 예술가에 대한 주목과 과잉경쟁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결과적으로 예술시장은 극소수의 예술가가 천문학적 수입을 올리는 승자독식시장이 되며, 마치 복권에서처럼 ‘당첨자’를 제외한 대다수 예술가들은 빈곤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그렇다고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후원을 얻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강한 예술창작의 동인이 되는 것은 금전적인 보상을 대신한 ‘심리적 소득’, 혹은 ‘비금전적 내적 보상’이다. 바로 자신이 재능이 있고 뛰어난 인간이라는 자만심과 자기기만이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예술가들의 가난과 예술세계의 구조적인 빈곤이 지속되는 이유이다. 상위예술과 하위예술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게 되면 예술경제의 특수성이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도 사회적 계층이 존재하는 한 예술경제의 특수성도 지속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09. 06.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