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늦은 귀가길에 읽기 시작한 책은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이다. 피로 때문에 읽다가 전철에서 잠이 들긴 했는데, 얇은 책이지만 일본에서 화제가 됐다고도 하니 호기심을 끈다. 인터뷰기사가 뜨기에 먼저 챙겨놓는다.
경향신문(09. 03. 28) “철저히 고민, 살아갈 힘 찾아내라”
여유를 찾기 힘든 시대다. 사람들은 무엇에 홀린 듯 풍요와 발전을 좇으며 끝없이 앞으로 돌진하기만 한다.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 불황은 사람들을 더욱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잠시 멈춰 고민하는 것은 사치다. 가볍고 ‘쿨’하게 살기도 힘든 세상이니 말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고민하라고 부추기는 사람이 있다.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철저하게 고민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고민하는 것이 사는 것이고 고민하는 힘이 살아가는 힘”이라면서.
재일정치학자 강상중 도쿄대 교수(59). 1998년 재일한국인 최초로 도쿄대 정교수가 된 인물로 일본 근대화 과정과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으로 일본 사회에서 주목받고 있는 지식인이다. 그가 지난해 5월 일본에서 펴낸 <고민하는 힘>(원제 惱む力)은 <내셔널리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등 기존 저서와는 달리 ‘인생론’을 피력한 책이다. 지금까지 100만부 넘게 팔리면서 일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가 ‘고민하는 힘’을 화두로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에서 ‘압축된 근대’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일본 또한 앞으로만 전진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전례없는 불황 등으로 아무리 일해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고민하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는 것은 이제 힘든 일이 되었어요. 이 때문에 저는 오히려 ‘고민하는’ 일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찾아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의 국내 출간을 맞아 e메일을 통해 인터뷰한 강 교수는 “지금 사회는 고민하는 것을 너무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서 “고민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확신할 때까지 계속 고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책에서 현재의 일본 사회를 ‘희미한 납색’에 비유했다.
“진보주의나 발전주의가 한계에 도달했고 기득권의 현상유지적인 권익에 가로막혀 개혁이나 변화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 결과 폐쇄감이 우리 주위를 떠돌고 많은 사람들이 순간의 흥분이나 변덕에 사로잡히기 쉬운 상태가 되고 말았어요.”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은 맹렬한 속도로 근대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일본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한층더 격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면이 있습니다. 높은 자살률이나 비정규직의 증가, 실업률의 증가 등을 예로 들 수 있어요.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지탱해온 가치나 삶의 방식에 대해 그 뿌리에서부터 반성을 해야 하는 내적 반성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00년 전 근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될 무렵 활동한 막스 베버(왼쪽)와 나쓰메 소세키는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고민하는 힘’을 통해 시대를 꿰뚫어보려 했다. 베버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소세키는 문학을 통해 ‘근대’라는 시대가 낳은 문제와 마주했고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물었다.
소설이나 자기계발서가 아닌 그의 책이 보기 드문 호응을 얻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했다. “경제 파탄이나 자살자의 급증 등 문명사적 전환기에 놓여 있는 현대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책을 통해 제시했다”는 것이다. 책은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를 실마리 삼아 고민하는 힘에 담겨 있는 삶의 의미에 대한 의지를 성찰했다. 소세키와 베버는 ‘우울한 청춘의 시대’에 강 교수에게 말을 걸어준 인물들이기도 했다. 강 교수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급격한 외부적 변화가 개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 개인은 점차 소외·고립되어간다는 점에서 현재와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묻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자기와 타자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철저하게 물었어요. 이런 지적인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그들이 고민하고 사색했던 문제를 현대의 문제로 받아들여 삶의 힌트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책에는 소세키 소설 속 인물들의 사례와 함께 강 교수 자신의 경험이 많이 등장한다. 그는 사춘기때 자아와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다 한국을 방문한 후 자신의 존재를 새로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진로에 대한 고민 끝에 대학원에 남아 긴 ‘모라토리엄’(유예) 시기를 갖기도 했다. 그는 특히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정체성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면서도 “하지만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 소수자와 다수자, 민족과 국민, 한국과 일본 등 많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됐고 끊임없이 의식이 각성됐다”고 덧붙였다.
강 교수는 또 40대 후반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려워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증세가 사라진 뒤 기분이 묘하게 상쾌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은 없어’라는 심경. 그때 깨달은 것이 죽음이든 뭐든 적어도 깊게 고민하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면 두렵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고민의 터널을 빠져나오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고 나면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분방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두려움이 없다면 뭐든지 꿈꿀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안정된 노년 계획만을 추구하지 말고 고민을 거듭한 후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최강의 노년’을 살라고 조언한다. 강 교수가 밝히는 ‘하고 싶은 일’은 유쾌하기까지 하다. 우선은 배우. 기왕이면 자신의 이미지와 정반대인 위선적인 악당 역이 좋단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도 한다.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일본과 한반도를 종단하고 싶단다.
그런 생각 끝에 그가 밝히는 것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뻔뻔해진다’는 것. ‘깊게 고민해서 꿰뚫어라’라고도 한다. 그가 젊은 세대들에게 주문하는 것도 더 크게 고민을 계속해서 결국 뚫고 나가 뻔뻔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런 새로운 파괴력이 없으면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미래도 밝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다.
강 교수는 젊은 세대들에게 “자기의 발로 일어설 것”을 강조했다. “자기의 안팎에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이제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앙이나 이데올로기, 영적인 것 등은 ‘지성의 제물’ 없이는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국가나 기업, 거대 조직이나 제도 등에 대한 물신숭배를 그만두고 자기의 발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가 보기에 한국과 일본을 불문하고 젊은 세대의 미래는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다. 오히려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는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나 가치가 진지한 형태로 빛나는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안이하고 졸속한 해답에 안주하지 말고 철저하게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힘을 축적해가기를 바랍니다.”(김진우기자)
09. 03. 27.
P.S. 사실 '고민하는 힘' 정도는 요즘 한국사회와 잘 맞지 않는데('발광하는 힘'에 맞서려면 최소한 '고뇌하는 힘'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용도를 찾자면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에 대한 입문서는 될 수 있겠다. 그게 어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