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나라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도의 작가 겸 저널리스트 판카즈 미시라의 기행 르포 <거꾸로 가는 사람들>(난장이, 2009)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론 리뷰를 쓰면서 꽤 애를 먹었는데, 일단 인도와 그 주변국의 실상에 대해서 그간에 잘 알지 못했고 둘째로 인도의 현실과 저자 자신에 대한 이중적 성찰이어서 어느 한 면만을 리뷰 대상으로 하기가 어려웠다(사족을 따로 적은 이유이다). 국역본의 제목 '거꾸로 가는 나라들'과 '번역된 세계를 여행하는 한 경계인의 표류기'란 부제에 대해서는 출판사의 책소개에 자세히 나와 있기에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주에 개봉하는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서두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역시나 영화를 보지 못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무려나 책은 아마티아 센의 <살아있는 인도>(청림출판, 2008)와 함께 인도의 현재에 대한 가장 요긴한 읽을 거리가 아닌가 한다. 다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저자의 여정을 같은 보폭으로 따라가면서 읽는 게 좋을 듯싶다...
한겨레21(09. 03. 23) 뭄바이 테러가 품은 비극
영국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세포이(용병)들이 가혹한 착취와 종교적 분란을 조장하는 통치정책에 맞서 1857년에 일으킨 반란이 '세포이항쟁'이다. 많은 영국 여성이 세포이들에게 성폭행당하고 영국군 장교의 아내가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졌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영국군은 더욱 잔혹한 보복살육을 자행했다. 붙잡힌 세포이들을 대포에 묶어 인간탄환으로 처형하는 식이었다.

인도 북부의 소도시 알라하바드에서도 반란은 일어났지만 소수여서 재빨리 진압되었다. 하지만 영국군 진압지휘관은 불과 며칠 사이에 6,000여 명의 인도인을 교수형과 총살, 고문을 통해 추가로 살해했다. 이어서 몇 달 뒤에는 ‘더러운 인도 깜둥이들’로부터 빼앗은 마을에 영국인들만을 위한 거주지 ‘시빌라인스(Civil Lines)’를 건설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대학의 탑과 돔 지붕, 고딕 양식의 공공도서관들이 들어섰고 ‘앵글로 인디언’ 사회가 만들어졌다. 객지의 영국인들은 클럽과 폴로 경기장, 넓은 베란다와 잔디밭을 갖춘 커다란 방갈로에서 50-60명의 하인들까지 거느리며 호사스런 레저생활을 즐겼다.

영국이 통치했던 인도 전역의 소도시에는 어디나 시빌라인스가 형성돼 있었다. 그리고 그런 특권적 생활방식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식민지 시대의 관료제와 함께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차이라면 방갈로가 지금은 주지사의 집무실이 되었다는 점. 소작농과 노동자가 대부분인 8억의 일반 대중과 전문직 종사자와 관료, 교사, 사업가 같은 2억의 중산층으로 구성된 인도에서 1970년대 중반부터 증가해온 전문 정치인은 새로운 사회 상위계층을 이루었다. 대부분은 특별한 훈련을 받았거나 능력을 소지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범법자도 상당수였다.
이들의 관심은 대부분 나랏돈을 챙기고 전리품을 나눠 갖는 일이다. 식민통치 이후 무엇을 위해 권력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들보다 높은 곳에서 세상의 부를 맛보고, 뉴욕으로 공짜 외유를 떠나고 무료로 기차를 타고 기사가 딸린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것, 민원을 위해 문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정도가 이들이 추구하는 권력의 내용이다. 그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거 때마다 수행원과 AK-47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유세에 나가서, 두 마을을 잇는 다리를 놓고 물이 필요한 마을에는 펌프식 우물을 파주겠다는 공약을 내건다.


자동소총이 등장하는 것만 빼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광경인데, 이것이 <거꾸로 가는 나라들>(난장이 펴냄)에서 인도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판카즈 미시라가 기행 르포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인도식 정치 현실이고 민주주의다. 이 성찰적 기행문에서 저자는 더운 가슴으로 인도와 그 주변국들의 현실을 냉철하게 들여다본다. 그가 ‘인도식 파시즘’이라고 이름붙인 RSS(민족봉사단)의 활동과 위세도 자신의 조국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불러일으킨다.
RSS는 카스트와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힌두교인이 단결하여 힌두국가(힌두스탄)을 설립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단체이다. 물론 이 경우 이슬람과 기독교는 힌두문화를 수용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배제의 대상이 된다. 사실 1948년 간디를 암살한 청년도 RSS의 행동대원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조직이 인도에서 여전히 막강한 정치세력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양상을 ‘근대화된 힌두주의’라고 부른다. RSS는 인도 정부의 최고위 관리들을 배출했을 뿐더러 회원들이 거대정당, 교육시설, 노동조합, 문학협회 및 종교단체까지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RSS가 전파하려는 메시지가 인류의 평등과 근대화이며 하층카스트와 부족민의 문화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힌두인을 제외한 ‘외래 인종’에 대한 태도는 1930년대 유럽 파시스트와 닮은꼴이다. “고유의 생활태도를 버리고 힌두 인종에 통합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힌두국가에 완전히 종속되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어떤 특권도 누리지 않으며 특별대우, 심지어 시민권조차 없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RSS의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인도의 1억3,000만 이슬람교도들과의 반목을 불가피하게 만들며, 2001년 9.11 사태 이후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와의 전쟁에 나선 서구의 동맹자를 자처하면서 사정은 더 악화되었다. 지난해 말 9.11 이후의 최대 테러사건이 인도 뭄바이에서 일어난 일이 결코 우연일 수 없겠다.
서구식 근대화의 결과와 흔적을 더듬어가는 여정에서 저자가 인도와 파키스탄,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네팔을 거쳐 이르는 곳은 티베트다. 1950년 중국의 침탈에 의해 강제적인 근대화에 직면한 티베트는 근대화가 양산해내는 모든 문제의 축소판이다. 저자의 요약에 따르면, “중국이라는 번쩍이는 신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건 탈공산주의 중국인들처럼 철저하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전히 소중한 것들, 즉 종교와 문화의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저자가 만난 티베트 망명정부의 지도자 삼동 린포체는 증오와 폭력으로 불의에 대응하는 건 쉽지만 적에게 스스로의 잘못을 납득시키기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며 비폭력은 나약한 자의 선택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과 절제를 요하는 어려운 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얻었는데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문화를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라고 덧붙였다. 이 마지막 여정지에서의 교훈은 저자의 잠정적 결론으로도 읽힌다.


사족 한마디. 자신이 사는 세계를 재발견하기 위한 긴 여행으로 저자 판카즈 미시라를 이끈 것은 도서관에서 읽은 플로베르의 소설 <감정교육>과 그에 대한 에드먼드 윌슨의 평론이었다. 윌슨은 <감정교육>에 대해 “인생에서 뭔가를 볼 시간이 있었던 사람만이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저자는 더 나이가 들어서야 플로베르의 소설이 보여주는, 좌절된 희망과 이상이 빚어내는 사소한 비극들의 세계가 우리 주변에도 넘쳐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야. 나는 그런 사람들을 잘 알아.” <거꾸로 가는 나라들>은 그 앎이 동기가 된 실천의 기록이다.
09. 0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