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일이 있어서 외출하던 길에 집어든 신문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기사는 북리뷰가 아니라 '세계의창' 칼럼이었다. 12년 전 동아시아 금융위기에 따른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이 현재의 미 금융위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제시한 것인데, 설득력이 있다. 집에 돌아와 칼럼을 몇 편 더 읽고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3. 14) [세계의창] 주택거품 붕괴는 동아시아의 복수

1997년 여름, 동아시아 나라들에 ‘금융 쓰나미’가 덮쳤다. 타이와 인도네시아, 그다음엔 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투자자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고 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통화가치는 곤두박질쳤고 잘나가던 대기업들이 파산을 면하려 발버둥쳤다. 이 나라들을 성공적인 경제개발 모델로 추어올리던 국제통화기금(IMF)과 이코노미스트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투명성 결여, 회계기준 부실, 정실 자본주의 등 다양한 비난을 퍼부었다.  

국제통화기금은 가혹한 조건을 내건 구제금융 계획을 들이밀었다. 힘든 내핍생활, 그리고 외국 투자자들이 헐값으로 기업 주식을 사들일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국제통화기금은 또 이들 국가에 외채 상환을 요구했다.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들이 빚을 갚을 유일한 방법은 ‘미친 듯이’ 수출하는 것뿐이었다. 이들의 수출길은 자국의 통화가치, 특히 달러에 대한 통화가치의 폭락을 통해 열렸다. 그 결과 미국 소비자들에게 아주 싼 값이 되어버린 이들 나라의 상품이 미국 시장에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국제통화기금은 자율적인 기구가 아니다. 미국이 이 기구를 주도한다. 동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의 정책을 설계하는 데 가장 책임 있던 세 사람은 앨런 그린스펀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그리고 루빈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로런스 서머스였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세계를 구하는 위원회’(이하 구세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 정도로 이 세 사람은 동아시아 및 다른 지역의 구제금융안을 디자인하는 데 너무나 두드러진 인물들이었다.  

국제통화기금의 동아시아 구제금융은 나머지 세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신흥개발국들이 국제통화기금의 ‘아시아 구원’으로부터 뽑아낸 메시지는, 절대로 이 기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한 가지 방법은 외환보유고를 크게 늘리는 것이었고, 그 유일한 방도는 무역수지를 흑자로 운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미친 듯이’ 수출하는 나라가 동아시아 나라들뿐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모든 개발도상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7년 이후엔 엄청난 자금이 신흥국들에서 미국 등 경제부국으로 흘러들었다. 이런 자본유입은 미국 주택시장의 거품을 키웠다. 상품 수입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노동시장이 취약해졌다. 연준은 계속 금리를 낮췄고, 2003년 여름에는 금리가 1.0%까지 떨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저금리가 거품을 유지시켰다. 거품은 수년간 지속된 과잉과 노골적인 기만을 은폐하는 데 일조했다. 집값이 연간 10% 이상 오르고 부동산과 은행 부문에서 기업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 세계에서는 많은 죄악이 감춰질 수 있다. 그러나 거품은 터지기 마련이다. 주택 거품의 붕괴는 주택 부문에서만 8조달러를 날려버리고 초대형 금융기관들을 파산시킬 것이다. 

역사에서, 두 번의 기회는 오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구세위’가 다른 길을 갔더라면 지금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물음을 던져볼 가치는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수출에 그처럼 목매달지 않도록 국제통화기금이 동아시아 나라들의 채무의 상당액을 탕감해 주도록 했다고 가정해 보라. 나아가, 구제금융의 부담이 가벼웠더라면 신흥개발국들이 외환 비축에 달려드는 사태도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세위가 이처럼 다른 경로를 택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루빈의 씨티그룹 주식 지분(루빈은 씨티그룹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의 가치가 오늘날보다는 훨씬 컸을 것 같다.(딘 베이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 공동소장)     

한겨레(08. 12. 27) [세계의창] 금융사기와 부패한 정치  

세상의 많은 이들이 미국에선 정치와 기업이 깨끗하고 개방돼 있다고 믿는다. 지난 10년 사이 미국 금융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독성 쓰레기’(부실 채권)의 홍수는 이러한 호의적인 견해를 무너뜨리고 있다. 가장 최근의 추문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버나드 메이도프는 지난 30년 동안 성공적으로 헤지펀드를 운영하면서 부자가 된, 겉으로는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펀드는 매년 높은 수익률을 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돈을 맡기려 줄을 섰다.

그러나 메이도프가 투자를 해서 높은 수익을 보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오래된 수법인 ‘폰지’(이전 투자자에게 새로운 투자자의 돈으로 수익을 돌려주는 금융 다단계 방식)를 활용했다. 메이도프는 지난해 모집한 투자자들에게 올해 모집한 투자자들의 돈을 지급했다. 메이도프에게 돈을 투자하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이 계속 줄을 잇는 한 사기행각은 계속될 수 있다. 이는 지난 30년 동안 메이도프 펀드가 500억달러 넘게 성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메이도프는 지난해 예상외로 시장이 급락하면서 문제에 빠져들었다. 투자자들은 갑자기 다른 곳에서 발생한 손실을 메우기 위한 현금이 필요했다. 부유한 자산가나 은행과 다른 투자 펀드, 심지어 자선단체들도 자기 자산이 크게 줄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메이도프에게 투자했던 돈은 지금 사라졌다.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메이도프가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대규모 사기를 벌이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메이도프 같은 사기꾼이 수십년이나 들통나지 않고 단순한 수법으로 엄청난 사기행각을 계속해 왔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미국 금융시스템의 거대한 부패를 드러내는 것이다. 더욱이 메이도프의 불법 행위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금융사기 예방 책임이 있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그런 불만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미 나스닥 증권거래소 설립자 가운데 한 명인 메이도프는 금융산업계의 모든 저명인사들과 교분이 있었고, 많은 자선단체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메이도프와 같은 인물들은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미국 금융시스템이 처한 문제다.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행동들이 월스트리트 삶의 한 방식이다. 이상한 것은 이런 악당들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고, 잡힌다고 하더라도 처벌은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미국 금융산업이 비범한 정치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속되고 있다. 금융산업은 민주·공화 양당에 손이 큰 기부자다. 정권 교체는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다른 인물에게 최고 경제 관료직을 넘겨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로버트 루빈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지냈고, 헨리 폴슨은 현 부시 행정부의 재무장관이다. 둘 다 미국의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금융산업은, 규제·감독권을 지닌 의회 위원회의 핵심 위원들의 선거에서 늘 최고의 기부자 노릇을 해온 터라, 의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결국 어떤 의원도 금융산업의 고삐를 바짝 죄는 일을 진지한 관심을 갖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모든 것들은 미국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매우 나쁜 소식이다. 미국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월스트리트에 대한 투자는 지금의 규제 환경에선 매우 나쁜 도박이라는 매우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워싱턴이 그런 사기행위를 일소하지 않으면, 외국 투자가들은 월스트리트에 돈을 맡기기보다 카지노에 가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딘 베이커/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 공동소장) 

  

한겨레09. 03. 14) 인생 끝난 메이도프

“진심으로 죄송하고 부끄럽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다단계 금융사기(폰지 사기)를 벌인 버나드 메이도프(70·사진)가 12일 뉴욕 맨해튼 법원에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곧장 감방으로 향했다고 <에이피>(AP) 등 외신들이 전했다.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까지 지냈을만큼 유력 금융인이었던 메이도프는, 최대 46%의 수익률을 약속하며 신규 투자자들로부터 끌어모은 돈의 일부를 기존 투자자들에게 수익금으로 주는 사기 행각을 20년 동안 벌여온 혐의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4800여명, 피해금액은 650억달러(약 97조원)에 이른다. 그가 인정한 혐의는 증권사기, 돈 세탁, 위증 등 11가지다. 오는 6월16일로 예정된 선고공판에서 유죄가 확정될 경우, 메이도프는 최대 150년의 징역형을 받게 될 전망이다.

메이도프의 유죄 인정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꼬리를 물고 피해자들의 분노는 끓어오른다. 메이도프는 “혼자만의 범행”이라고 주장한 뒤 입을 굳게 다물었다. 피해자들은 그가 어떻게 폰지 사기를 저질렀는지, 누가 연루됐는지 등 더 많은 답변을 듣고 싶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13일 전했다. 그에게 돈을 맡겼던 샤론 리사워는 “내 저축 전부를 잃었고,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 그가 자산이 어디로 갔는지 밝히고 모든 투자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이라며 눈물을 삼켰다. 미국 검찰은 메이도프로부터 약 1700억달러의 재산을 추징할 방침이다.(조일준 기자) 

09.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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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낭만거미의 생각
    from bluespy's me2DAY 2009-03-17 12:32 
    이것이 바로 미국 금융시스템이 처한 문제이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문제라고 넓혀 볼 수 있을까?
 
 
bs0048 2009-03-14 23:19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재미있게 본 칼럼인데, 소개해주셨네요^^

로쟈 2009-03-14 23:31   좋아요 0 | URL
이심전심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