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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 대하여 ㅣ 동문선 현대신서 9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현택수 옮김 / 동문선 / 199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르디외의 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그런 만큼 가장 많이 팔린 이 책은 내가 읽은 바로는 가장 쉬운 책이기도 하다. 심지어 책을 읽기도 전에 대충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고, 그게 읽은 후의 소감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잘 읽히는 책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같은 역자의 <강의에 대한 강의>를 읽고 느낀 것이지만, 부르디외는 아직 적합한 번역자를 만나지 못했다. 불쌍한 부르디외!...
오역의 몇 가지 사례만 지적한다. 서문에서 저자가 매스미디어들의 부추김 때문에 일전을 불사할 뻔했던 터키와 그리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 “그리스 병사의 섬 상륙, 함대의 이동, 그리고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었습니다.”(12쪽) 여기서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영역본이 “war was only just avoided.'(전쟁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인 걸로 봐서 역자는 불어의 justesse(혹은 justice)가 들어가는 숙어(‘가까스로’)를 잘못 옮긴 것이다. 문제는 왜 그런 오역/실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역자는 그렇다 쳐도(역자의 실력이 그렇다면) 교정자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단순한 오역을 놓친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은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을는지? “저는 말하자면 과거의 온정주의 교육적 텔레비전을 바라는 향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향수가 대중의 취향과 대규모 방송 수단의 민주적인 이용을 위한, 대중의 자발적 혁명과 선동 정치적 복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48족)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유는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역자는 아무런 고통없이 번역했을까?).
두번째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과거의 가족주의적-교육적 텔레비전이야말로 제가 보기엔 (로자 룩셈부르크식의) 대중적 자발주의나 대중적 취향에 대한 선동적인 투항 못지않게 대중매체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용에 대립됩니다.” 즉 부르디외는 매중매체에 대한 순응이나 전면적인 부정이 아닌, 민주적인/비판적인 활용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의 번역문을 그런 뜻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식의 오역들이 책에는 드물지 않다. 부르디외의 번역이 쉬운 작업은 아니겠지만, 부르디외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번역이 이 정도 수준에 머문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로서는 하여간에 오역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수밖에 없겠다. 좋은 책을 읽을 권리는 그냥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불성실한 번역서들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