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칼로그 - 십계,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
김용규 지음 / 바다출판사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관 옆 철학카페>의 저자이기도 한 김용규의 신작 <데칼로그>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소재로 한 '무거운' 신학/철학 이야기이다. 사실 저자가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연작 <데칼로그> 또한 십계가 새겨진 모세의 돌판만큼이나 결코 가볍지 않은 영화들이다.

일주일에 한편씩/한장씩 읽기로 한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대목은 다섯 번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이다(물론 다 유쾌하지 않은 요즘의 정세탓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음울해보이는 청년 야첵이 바르샤바 거리를 배회하다가 한 택시운전사를 아무런 원한도 없이 잔인하게 살해하고 자신도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줄거리. 흔히 불법적인 살인(=죄)을 응징하기 위한 합법적인 살인(=벌)은 과연 정당한가를 묻는 영화로 이해된다.

저자는 이 영화를 통해서 '살인하지 말지니라'를 계명을 모든 인간에 대해 '그 영혼을 죽이지 말라' 즉 '존재론적 살인을 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확장 해석한다. 그리고 그 존재론적 살인을 '소외-시킴'으로 재정의한다. 그렇게 되면, '이 영화는 철저하게 소외되어 발광하고 타인을 파괴함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까지 파멸시키는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203쪽)이다.

물론 여기서 더 중요한 지적은 '야첵에 의한 살인'이 있기 전에, 이 '야첵에 대한 살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사회가 야첵을 '소외-시킴'(=존재론적 살인)으로써 자신의 존재의미를 상실한 야첵이 그러한 무의미한 살인을 저지르도록 방조했다는 것.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단순히 살인범 야첵을 다시 살인함으로써는 얻어질 수 없다. '소외-시킴' 때문에 악이 나온다면, '사랑-함'을 통해서 그 소외된 이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제5계명은 '소외시키지 말지니라'는 뜻이며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할지니라'는 뜻으로 확대된다(209쪽).

저자는 야첵의 살인을 해명하기 전에 소외된 인간의 한 전형으로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분석한다. 이 둘은 모두 세계로부터는 물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187쪽)이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과 함께 내가 먼저 떠올리게 되는 <죄와 벌>(열린책들, 2002신판)의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는 어떨까? 전당포 노파에 대한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야첵이나 뫼르소의 경우처럼 아무 생각없이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벌레같은 존재를 해치우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살인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계획적이다.

물론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러한 계획의 실행에 여러 우발적인 요인들이 개입되는 과정도 예리하게 묘파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것은 그것이 논리(변증법)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그의 진정한 속죄와 갱생의 배경으로 숨막힐 듯한 도시 페테르부르크가 아닌 광활한 시베리아를 설정한다. 작품의 에필로그에 와서야 우리의 주인공은 비로소 사람들로부터의 자신의 소외를 발견하고, 소냐의 사랑을 발견하며, 복음서를 손에 든다. 작가는 그러한 과정을 '변증법 대신에 삶'(809쪽)이 도래했다는 말로 표현한다. 즉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에서의 문제틀은 존재론적 살인에서의 '소외-사랑'이 아니라, 정치적 살인에서의 '변증법-삶'이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정신병자인지 정치적 확신범인지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았지만, 각각의 경우에 따라 해법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그가 전자라면그를 소외시키지 말라, 그에게 사랑을 주라. 그리고 만약 그가 후자, 즉 테러리스트라면, 그에게 삶을 주라, 제발 그의 조국을 못살게 굴지 말라. 더불어 대테러전쟁을 통해 수만의 인명을 살육할, 자신이 비범한 나라인 줄 착각하는, 남들 못지 않게 비정상적인 나라 미국의 사전범죄(pre-crime)에 대해서는, 두 가지 처방이 있을 것이다. 미국을 따돌리지 말지니라, 우리 모두 미국을 사랑할지니라. 그리고, 부시 행정부는 제발 선-악의 변증법에서 헤어날지니라. 그것이 너희가 갱생할 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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