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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 대한 강의 ㅣ 동문선 현대신서 8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 동문선 / 1999년 1월
평점 :
이 책은 1982년 부르디외의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강의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는 그 강의(사회학)를 레이몽 아롱으로부터 물려받는다. 이 강의는 역서의 머리에 명시돼 있듯이 정확히는 1982년 4월 23일 금요일에 행해진 것인데, 우리말로 45쪽 정도 되는 분량(영역으로는 21쪽)이니까 2시간 정도 읽어내려 갔을 듯하다. '강의에 대한 강의'란 제목이 뜻하는 건 자신의 사회학 강의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부르디외의 취지에 걸맞는 강의를 우리는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번역본은 실제 부르디외의 강의와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글이 난삽한 건 잘 알려져 있지만, 독해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번역서는 독서불가능성이라는 점에서 부르디외를 한참 뛰어넘는다. 부르디외 전공자의 번역이란 말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시작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학에 대해 말하는 부분: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과학의 주제에 적용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10쪽) 이 문장을 어느 누가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이 학문[사회학]을 실행하는 주체[사회학자]에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합니다.'는 뜻으로 읽겠는가?(역자는 여러 곳에서 '주체'를 '주제'로 옮기고 있다.) 많은 걸 기대할 수는 없지만, 공자의 '이름의 정당화'(48쪽)도 '정명(사상)'으로 옮겨야 한다.
제대로 읽히는 대목이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긍정문/부정문을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가 왜 일어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45쪽)는 문맥상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것은 '결코 자명하지 않은 어떤 행위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쯤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부르디외가 말하는 행위는 사회적 행위이고, 그것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자명한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게임]속에 행위자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사실상 뒤르켐이 말한 바, '사회는 신이다'까지 인용할 필요 없이, 저는 '신은 전혀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사회에서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유일하게 인정하는 힘, 인위성 우연성 부조리를 제거하는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50쪽) 이 또한 역자가 사회학자가 맞는지 의심케하는 오역이다. 첫문장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사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직 사회만이 여러분을[여러분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주며 사실성, 우연성, 부조리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로 옮겨야 한다.
부르디외에게 있어서 개인과 사회 같은 명사들의 이분법은 가짜이다. 그에겐 사회적 실재는 사회적 관계(구조)뿐이다(이것은 마친 전능한 신과도 같아서 무의미한 실존들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즉 오직 사회 속의 개인, 개인 속의 사회만이 있을 뿐이고, 이것을 표시하는 독창적인 개념들이 장이나 아비투스 같은 것들이다. 사회학적 지식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그 역시 지식과 학문의 장 속에서의 상징적 투쟁[게임]의 산물이다. 부르디외가 사회학에 대한 편견들을 불식시키면서 이 '사회학의 사회학' 강의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사회학의 성격과 지위이다.
이쯤에서 역자의 변명을 들어보자. '역자는 현학적인 표현 속에서도 엄격하게 사용되는 말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 한 직역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역자는 조금 더 노력해서 가급적이면 이 번역본을 출간하지 말았어야 했다. 또, '번역 수준에 대해 역자 자신은 아직도 불만족스럽다. 이 번역판을 읽는 데에 독자의 각별한 인내심과 양해를 구한다.'(65쪽) 정말 각별한 '인내심'과 '양해'가 필요하다! 게다가 시간과 돈까지 필요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