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 인간과 종교, 제사, 축제, 전쟁에 대한 소묘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해설서에 의하면 바타유 입문서로서 가장 좋은 책은 <에로티즘>이다. 그리고 이 <종교론>(<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의 원제)은 가장 읽기 어려운 책 중의 하나이다. 국내 번역되어 있는 바타유의 책 가운데 가장 얇은 분량이지만, 가장 읽기 힘든 것이다!

그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 '난해한' 번역이다. 물론 바타유의 원문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겠지만, 우리말 문장도 잘 안 돼 있는 몇몇 대목에서는 역자의 무신경함을 탓하게 된다.

가령 '존재들이 불분명하게 묻인 세상만이 쓸데없는 세상, 목적없는 세상, 하릴없는 세상, 의미없는 세상이다. 오직 자체로 가치가 있을 뿐이며,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며, 다른 어떤 것도, 제 3의 것도, 그리고 그 뒤의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세상은 오직 그 세상이다.'(38쪽)라는 대목 등은 몇 번을 읽어야 대충 감을 잡을 수가 있다. 바타유가 말하는 바는, (좀 역설적이지만)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세상이란 쓸데없는 세상, 목적없는 세상, 하릴없는 세상, 의미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에 의해서 그 가치가 규정되는 도구적 유용성의 세계와 대척되는 세계를 말한다.

바타유가 말하는 인간적 상황이란, 도구적 유용성에 포획된 상황이다. 그것을 그는 사물의 세계라 말하고, 현실적 질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질서는 그 자체로는 수단적이며 무의미하다. 인간은 그것을 벗어나서 내재적 신성(=연속성의 세계)에 합류하고자 하며, 그 합류의 방식들을 바타유는 종교적인 것으로 지칭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사(희생)와 축제이다. 제사와 축제는 '미래를 염려하는 생산의 반대명제이며, 오직 순간에만 관심을 갖는 소모이다.'(63쪽) 마르셀 모스에게 빚지고 있는 이 '소모'는 소비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생산에 복무하지 않는 무자비한 탕진을 뜻한다.

바타유가 보기에 (고대인들과 비교하여) 근대인들의 불행은 그 소모가 더이상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이 책의 2부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전쟁(군사적 질서)라든가 산업의 증대(자본의 축적)이라는 것은 '관리되는 소모' 즉 가짜 소모라는 지적이다. 그리하여 '결국 현실의 원칙이 내밀성의 원칙을 눌러 이긴 것'(119쪽)이 근대 사회이다. 이러한 그의 진단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바타유는 이 책을 '인생을 가장 멀리까지 밀고 가볼 필요성이 있는 체험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바치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생각나게 한다). 그럴 필요성을 아직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는지? 아니면 우리는 점차 이 사물적 세계, 현실적 질서에 순응하며 쥐죽은 듯이 살고 있는지 책장을 덮으며 궁금해진다. 오 겡끼 데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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