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좀 뒤늦게 올려놓는다. 개강 첫 주라 정신없이 바빴고, 일도 많았다. 물론 그 일들이 다 끝난 건 아니지만, 금요일 밤이라는 핑계로 잠시 한숨 돌린다(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자!). 사실 지난달 마지막 날인 28일에 페이퍼를 올려두려고 했으나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웹진이 늑장을 부렸다. 그러니 이렇게 페이퍼가 늦어진 것이 내 탓만은 아니다(돌이켜보니 19일에 올린 달도 있었다!). 이 정도로 변명을 대신하고, '3월의 읽을 만한 책'을 좀 뒤적거려 본다. 흠, 바다 냄새, 화약 냄새가 미리부터 진동하는군...
1. 문학
문학분야의 책으로 소설가 신경숙씨가 고른 건 소설가 한창훈의 <나는 여기가 좋다>(문학동네, 2009). 표지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지만 제목에서 '여기'는 '섬'이고 '바다'이다. 바다와 섬 사람들에 대한 소설. "소설가 한창훈은 바다와, 바다를 생존의 터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의 대변인처럼 소설을 쓴다. 오랫동안 그래왔다. 무슨 얘기를 써도 한창훈의 글에서는 바다 냄새가 펄펄 난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의 제목 ‘나는 여기가 좋다’ 란 곧 ‘나는 바다가 좋다’ 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소설가 한창훈, 하면 저절로 그 이름 뒤로 바다가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바닷가 사람들이 어떤 모양새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려면 사실적인 어떤 기록을 뒤져보는 것보다 한창훈의 소설을 읽는 일이 더 실감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해서 봄보다는 여름이 더 잘 맞을 듯싶은 소설이기도 하다.
찾아보니 <홍합>(한겨레출판, 1998)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이후에 쓴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문학동네, 2001),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창비, 2003), <청춘가를 불러요>(한겨레출판, 2005) 등도 모두 그의 섬 이야기이고 바다 이야기이다. 이 정도면 일로매진의 대표적인 작가가 아닐까 싶다. 얼핏, <갯마을>의 작가 오영수와 <성삼포>의 시인 이생진이 떠오른다. 제주도의 사진작가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북스, 2007)은 이 참에 알게 된 책이고(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58495 참조). 흠, 김영갑 갤러리가 제주도 최고 관광지의 하나라고 한다. 제주의 봄이 문득 궁금해지는군...
2. 역사
역사학자 이덕일씨가 고른 역사분야의 책은 박재광의 <화염병기>(글항아리, 2009)이다. 서저에서 봤을 때 바로 떠올린 건 영화 <신기전>인데(예고편만 봤다), 실제로 조선의 병기를 다룬 책이어서 신기전 얘기도 나온다고. "고려 말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화기에 대해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이처럼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례들로 풍부하다"는 것이 추천의 이유다.
무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보통 전쟁사의 애독자이기도 할 텐데, 저명한 전쟁사가 존 키건의 <1차세계대전사>(청어람미디어, 2009)가 마저 출간됐다. 먼저 나온 <2차세계대전사>(청어람미디어, 2007)의 짝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세계전쟁사>(까치글방, 1996)과 세트를 맞추어도 좋겠다(키건의 책은 몇 권 더 출간돼 있다). 방대한 분량의 세계대전사를 집필한 저자도 놀랍지만, 개인적으론 역자인 조행복씨에게도 경탄을 금치 못하겠다. 작년 봄부터 펴낸 역서가 굵직한 책으로만 여섯 권이다. 더러 지체되어 나온 책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초인적인 작업량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 분야의 책은 나도 최근에 서평을 쓴 바 있는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다. 추천사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속담은 어떤 지각이론을 담고 있다. 그것은 시각이 청각보다 우월하다는 이론이다. 조금 더 비튼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백 가지 말, 백 가지 설명이 하나의 이미지만 못하다. 백 가지 이야기도 어떤 시각적 이미지로 수렴되지 못하면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다."란 구절로 시작하는데, '3월의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하는 기사는 이걸 받아서 <유동하는 공포>의 핵심을 "백 가지 말, 백 가지 설명이 하나의 이미지만 못하다는 사례를 들어 이미지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요약했다. 이미지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책? 역시나 직접 읽지 않고 들은 풍월로만 전달하다 빚어지는 오류라고 해야겠다.
이미지 얘기가 서두에 나온 건 바우만의 근대성의 이미지를 '불(빛)'에서 '물'로 바꾸어놓았다는 얘기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성을 물의 이미지에 담아 설명했다. 이것은 우리가 통상 근대성에 대해 가져왔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계몽, 이성의 빛 등과 같이 근대성을 표현하는 말들은 오히려 밝은 불의 이미지를 중심에 두고 있지 않은가."라는 식으로 말이다. 최근에 바우만의 책을 여러 권 입수했는데, 아직 소개되지 않은 '유동성' 시리즈 몇 권도 마저 출간되면 좋겠다.
그리고, '물의 이미지로 본 근대'라고 해서 생각난 것인데, 러시아의 근대야말로 '유동하는 공포'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내가 염두에 둔 건 푸슈킨의 서사시 <청동기마상>으로, 표트르대제가 핀란드만 옆에다 세운 인공도시 페테르부크르의 대홍수를 다룬 작품이다. 가난한 하급관리 예브게니가 홍수로 약혼녀를 잃고 헤매다가 나중에는 청동기마상(표트르 대제의 동상)에 쫓긴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알렉산드르 베누아는 그 장면을 이렇게 그렸다.
"가련한 미치광이가 어디로 가든 청동기마상이 무겁게 말발굽 소리 울리며 밤새도록 그의 뒤를 따라왔다." 공포스럽지 않은가?! 이 또한 '유동하는 공포'라 이름붙이고 싶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공진성의 <폭력>(책세상, 2009)이다. "이 책은 폭력이란 무엇이며, 폭력과 비폭력은 어떻게 구별하고 누가 이 같은 기준을 정하는지, 나아가 폭력과 법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으며 민주주의에서 폭력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며, 미래 사회에서 폭력은 어떠한 양상을 띨 것인지 등 폭력에 대해 우리가 궁금해 하고 있으며 알아야 할 의문들에 쉽게 답을 해주면서 이 문제에 대해 성찰을 하도록 만들어주고 있다."라고 소개한다.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라서 나는 지난 1월말에 책을 읽었는데, 저자가 주장하는 몇 가지 논점은 다음과 같다. (1)폭력은 파괴를 수반할 수 있는 강렬한 힘이다. (2)그렇기 때문에, 폭력은 두려운 것이지만, 경험과 적응 여부에 따라서 그 강렬함의 정도와 두려움의 정도는 달라질 수 있다. (3)그렇기 때문에 폭력의 폭력성을 결정하는 것은 폭력의 사용자가 아니라 폭력의 대상이다. (4)폭력은 인간과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논점이 어떤 성찰로 유도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저자는 '민주주의 사회와 폭력' 장에서는 '상징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면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대해 16쪽이나 할애하는데, '80년 광주'에 대해선 8줄을 할애하고 있는 것과 너무 대조된다(저자가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의 테너라고 소개된 약력을 보고서야 어찌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동의는 할 수 없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폭력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며,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하고 더 큰 폭력에 익숙해져야 하지만, 그렇게 폭력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지면 더 이상 타인이 겪는 폭력을 폭력으로 느낄 수 없게 된다. 이 폭력의 딜레마에서 우리는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140-1쪽) 흠, 다시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내게는 사카이 다카시가 쓴 <폭력의 철학>(산눈, 2007)이 더 이해하기 쉽고 유익하다. 결들여 지적하자면, 책은 노무현 정부 시절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의 이름을 '정창호'라고 오기했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임상규의 <녹색희망, 농업의 미래>(매일경제신문사, 2009)이다. 저자는 참여정부의 마지막 농림부 장관이었다고 한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우리 농업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 분석으로부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이르는 광범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오랜 공직자 생활로부터 우러난 날카로운 정책 감각이 책 전반에 걸쳐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관심사가 다른 탓에 책을 손에 들 것 같지는 않지만, '녹색'이라는 말이 새로운 '전쟁터'가 되고 있다는 점만은 지적해두기로 하자. 사단은 <녹색평론>이 쌓아온 그간의 입지를 한순간에 어그러뜨리는 '녹색성장'이란 말이다. 우석훈에 따르면(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36940.html), '회색사업'이라 불러 마땅하지만 녹색으로 분칠하고 다니는 탓에 이 유행어는 경계해야 할 키워드의 하나가 되었다. 생태주의와 반생태주의가 모두 '녹색'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니 말의 경제가 '뒤죽박죽'이다. 개념 정리 차원에서 '생태경제학자' 우석훈의 말을 참조해두기로 하자.
자, 상황은 그렇고, 이명박 정부에서 얘기하는 녹색성장이 과연 녹색인가 회색인가, 이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역사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녹색이라는 단어는 본디 생태주의나 환경주의라는 의미보다는 ‘핵폭탄 반대’라는 의미가 더 깊다. 1960~70년대, 냉전이 깊던 시절 핵실험은 사막과 바다에서 주로 이뤄졌는데, 이 핵실험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그 장소에서 ‘증인’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이 녹색이라는 상징을 썼다. 숱한 박해를 당하고, 죽기도 많이 죽었지만, 냉전 시절 가장 강렬한 평화주의자들이 핵실험장에서 같이 죽겠다고 덤볐다는 것이 녹색이라는 색깔이 가졌던 상징이다. ‘그린피스’의 그린을 요즘은 환경 또는 생태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지만, 원래의 의미는 ‘반핵’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는 철저하게 원자력 위에 서 있기로 선택한 것이라서, ‘녹색’은 아니다. 정부의 저탄소 기본계획은 원전을 강화하는 것 위에 서 있기에, 어떻게 치장하더라도 열심히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 정부는 기본적으로는 반녹색이다. 녹색 본래의 의미라면, 원자력 발전소의 이른바 ‘셧다운’에 관한 계획을 발표하면서 “우리는 녹색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러나 이 정부는 앞으로도 원전을 많이 지을 것이고, 원전 없이는 한국은 돌아가지 않으므로, 이미 수명이 다한 원전도 자기 마음대로 기술평가를 하고 수명을 늘리겠다고 하는 것이 기조다.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반녹색이다.
어쨌든 이건 기본에 관한 얘기라고 하고, 실제로 뭘 하겠다는지 한번 살펴보자. 한반도 대운하를 슬쩍 ‘4대강 정비사업’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이게 정부가 사용할 돈의 대부분인 상황인 게 현정국이다. 이 4대강 정비사업은 누가 뭐라고 말해도 시멘트 사업이고, 강바닥을 긁어내고 시멘트 둑을 더 높게 쌓겠다는 게 사업의 실체다. 그래서 역시 회색사업이라고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기괴한 토건자본의 ‘그린워시’, 즉 녹색 이미지를 뒤집어쓰는 녹색 마케팅이 바로 녹색성장인 셈이다. 그래서 사기다. 이 사기가 언제까지 통할까? 그건 모르겠다. 그러나 사기는 사기다. 골프광 토호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등에 업고, 땅값 올리기 사기사업을 벌이면서 ‘녹색 이미지’를 뒤집어쓴 이 거짓말 사업, 그 결과로 국토 생태는 결딴날 것이다. 녹색성장 사업이 벌어지는 전국 단 한 곳이라도 지역 생태가 버티는 곳이 있을까? 처절한 생태 파괴의 현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 정부의 사업이 녹색인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반생태적이기는 한 것 같다.
'글로벌 식품의약기업의 두 얼굴'을 고발하는 스탠 콕스의 <녹색 성장의 유혹>(난장이, 2009)도 '녹색 마케팅' 비판서로 읽을 수 있다. "<녹색성장의 유혹>은 녹색 당의에 은폐된 우리들의 일상과 이 시대의 모순을 드러내 보여주는 책이다. 오늘날 전세계를 배회하고 있는 유령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친환경, 생태친화 등으로 불리는 이른바 ‘녹색’이란 은유적 색깔일 것이다. 바야흐로 녹색의 시대인 것이다."란 소개가 인상적이다. 책의 원제는 '병든 지구(Sick Planet)'인데, 전 지구적 '녹색성장'의 필연적인 귀결이 그러할 것이다(아니 이건 '미래'가 아니라 '현재'이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마크 타이너의 <정직한 법조인 링컨>(소화, 2008).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인 만큼 한국인도 가장 숭배하는 미국 대통령이어서 링컨에 관한 책은 다수가 출간돼 있다. "링컨의 변호사 시절을 중점적으로 다룬 이 책은 짓밟힌 민중의 권익 향상을 위해 힘쓰다가 흉탄에 의해 사거한 ‘국민적 영웅’ 링컨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동기에서 집필된 것이다. 옮긴이 역시 감상주의로 일관된 ‘링컨 신화’의 거품을 걷어내는 데 진력해 온 흔치 않은 링컨 전문가이다."라고 소개되는 책. 같은 역자가 옮긴 <가면을 벗긴 링컨>(소화, 2008)과 '세트'이다. 한국일보(08. 11. 08)의 서평은 두 권을 이렇게 소개했다.
<정직한 법조인 링컨>은 법조인으로서의 링컨이 대통령 재임 기간의 5배인 25년 동안 변호사로 있으면서 수임했던 5,600여건의 사건을 통해 그를 조명하는 책이다. 이를테면 그의 공식적 측면을 둘러보는 것이다. 과부에게는 수임료를 받지 않았다든지, 불리한 상황에서도 무고한 사람들의 변호를 열정적으로 완수해 무죄 방면을 이끌어낸 일 등이 서술된다. 하지만 이 역시 통상적인 링컨의 전기작가들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다. 책은 링컨이 인용한 영국 법률논문들의 제목까지 일일이 전거하는 등 실증적으로 많은 힘을 기울였다. 노예와 관련된 사건의 소송은 물론 각종 민사소송에서 보여준 링컨의 기민함이 생생하다. 특히 노예 관련 소송에서 그가 "도덕적 판단을 유보, 노예 소유주를 대리"(279쪽)한 일 등은 그가 변호사로서 실증법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또 다른 한 권은 '달의 뒷면'을 들춰낸다. 진실은 과연 불편한 것인가. <가면을 벗긴 링컨>이 보여주는 링컨에 대한 이야기는 불편하다. 이 책은 '부정직한 링컨의 진짜 얼굴'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노예해방으로 알려진 링컨이 실은 평생 동안 골수 백인 지상주의자였다니. 남북전쟁 당시에는 북부의 정적 수만여명을 투옥하는 것도 모자라, 남부 도시의 포격은 물론 민간인에 대한 살상에까지 일일이 관여했다니. 그것들조차도 약과다. 좌든 우든, 링컨 숭배주의자들이 똑같이 보이고 있는 링컨을 향한 충성심에 비하면 예고편이다. 그들은 정부나 재단으로부터의 재정적 보조를 따내는 데는 귀재였다. 기금과 장학금은 물론, 수만달러가 걸린 '링컨 상'까지 그들의 몫이었다. 9ㆍ11 사태를 두고 "그 어느 때보다 우리가 강력한 중앙정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계기"라고 그들은 입을 모았다. 저자는 "링컨 숭배주의는 미국인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주입, 오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며, 좌파라고 해서 이런 국가주의적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링컨의 두 얼굴이 징후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 '미국의 두 얼굴'이고 '두 역사'다. 몇달 전 '장정일의 책 속 이슈'가 생각난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23306.html). 미국사의 이해를 위한 기본 초식으로 이 참에 알아두도록 하자.
남부의 경제적 기반이 대농장이었다면,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했다. 남북의 이질적인 경제구조는 자연 환경에 따른 것이지만, 제임스 M. 바더맨의 <두 개의 미국사>(심산, 2004)를 보면 애초부터 두 지역을 차지한 이민자의 성격이 달랐다. 영국은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차남 이하는 유산이 없었다. 남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토지상속에서 배제된 지주 계층으로, 그들은 남부에 대농장을 짓고 노예를 부리며 고향의 귀족 생활을 재현했다. 반면 북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종교적 자유를 찾아온 청교도로, 근면과 자기 절제라는 노동 윤리에 충실했다.
남부 귀족들은 노예 노동으로 얻은 농산물을 영국에 팔았고, 영국산 제품으로 사치를 했다. 연방정부는 북부의 상공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는데 그것이 남북의 대립을 심화시키면서, 미합중국 헌법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 미국 헌법은 연방정부의 통제와 각 주(州)들의 주권 범위를 모호하게 규정해 놓았다. 그래서 일부 남부 주들은 “어떤 주도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연방의 결정을 무효화할 권리”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연방으로부터 이탈할 권리까지 각 주에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건국 이후 지속된 연방주의자와 분리주의자의 한판 대결이 흑인 노예 문제로 불거진 게 남북전쟁이다. 오로지 분리주의자들에 대항해 연방을 건사하려는 목적에서였지 ‘노예해방’ 전쟁은 링컨의 안중에 없었다. 저 유명한 노예해방선언이 발표된 시점이 전쟁 직전이 아니라, 전쟁이 한창인 1863년 1월1일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링컨은 그 선언을 통해 두 가지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 남부의 흑인들이 대거 북부로 넘어 온 것과, 도덕적 우위를 확보함으로써 유럽 국가들의 남부에 대한 지원을 차단한 것.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추천한 과학분야의 책은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뿌리와이파리, 2009). '뿌리와이파리'는 언젠가 언급한 대로 주목할 만한 교양과학서 출판사이고, <미토콘드리아>는 재작년에 낸 <삼엽충>과 함께 소장해둠직한, 탐나는 책이다(나는 아직 구입하지 못했지만). 추천의 변은 이렇다. "한 동안 과학자들은 세포핵을 생명체의 중심으로 간주한 채 미토콘드리아를 주변적 존재로 홀대했다. 그러나 미토콘드리아가 다세포 생명체를 창출하는 진화의 실세임이 밝혀지면서, 생명계의 역동성을 미토콘드리아의 작동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미토콘드리안 패러다임’이 풍미하고 있다. 총 5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에서 저자는 생명체의 탄생, 성장, 분화 노화, 및 죽음과 같은 현상들을 ‘생체 에너지 발전소’에 비견되는 미토콘드리아의 역능을 중심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생소한 개념과 이론들을 소통 가능한 방식으로 알기 쉽게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는 점에서 저자와 역자 모두에게 찬사를 보낸다." 저자의 다른 책으론 절판됐긴 하나 560쪽의 방대한 책 <산소>(파스칼북스, 2004)가 있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재즈책'이다. 정우식의 <언제나 재즈처럼>(고려원북스, 2008). 라디오를 잘 듣지 않아서 저자의 이름이 생소하지만 '올 댓 재즈'란 프로그램의 PD라고 한다. 소개는 이렇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든 아니면 별로 관심이 없는 일반 생활인이든 간에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하나 나왔다. 엄밀히 말하면 음반 한 장을 권하고 싶다는 말이 더 맞을 듯싶다. 우리나라에서 재즈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유일하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는 CBS FM의 <올 댓 재즈>라는 프로가 있고 이 프로그램 뒤에는 프로를 제작하고 있는 정우식 PD가 있다. 프로를 진행하고 있는 재즈 색소포니스트 이정식은 정우식을 영원한 ‘jazz kid'라 일컫는다. 이 책은 100여 년 이어져 내려온 재즈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33인을 추려, 아주 쉽고 간명하게, 그 인물들의 역사성, 음악적 특징, 대표작, 대표적 음반 등을 소개하고 있다." 참고로 책의 목차는 이렇다. 몇몇 아티스트의 전기는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로 출간돼 있다.
Jazz의 위대한 순간 Ⅰ New Orleans Jazz & Swing(1895-1940)
위대한 재즈의 발명가 루이 암스트롱 Louis Armstrong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 빌리 홀리데이 Billie Holiday
The King of Swing 베니 굿맨 Benny Goodman
재즈 보컬의 퍼스트레이디 엘라 피츠제럴드 Ella Jane Fitzgerald
재즈의 연금술사 듀크 엘링턴 Duke Ellington
스윙 백작의 리듬 혁명 카운트 베이시 Count Basie
Jazz의 위대한 순간 Ⅱ Modern Jazz(1940-1959)
비밥(Bebop)의 쌍둥이 찰리 파커/디지 길레스피 Charlie Parker/Dizzy Gillespie
스타일도 하나의 연주다 델로니어스 몽크 Thelonious Monk
늘 새롭지 않다면 그건 더 이상 재즈가 아니다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
재즈계의 원조 꽃미남 쳇 베이커 Chet Baker
재즈와 클래식의 크로스오버 모던 재즈 쿼텟 Modern Jazz Quartet
풍부한 감성으로 재즈를 노래하다 사라 본 Sarah Vaughan
하드밥(Hard Bop) 사관학교의 수장 아트 블래키 Art Blakey
여전히 살아 숨쉬는 색소폰의 전설 소니 롤린스 Sonny Rollins
일평생 ‘스윙’만을 고집한 재즈 피아노 장인 오스카 피터슨 Oscar Peterson
구수한 알토 색소폰의 명인 캐논볼 애덜리 Cannonball Adderley
실험성과 대중성의 인상적인 만남 데이브 브루벡 Dave Brubeck
신과 대화하는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 John Coltrane
Jazz의 위대한 순간 Ⅲ Soul/Fusion/Contemporary Jazz(1960-1993)
인상파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 Bill Evans
보스 기타(Boss Guitar)의 출현 웨스 몽고메리 Wes Montgomery
새로운 물결, 보사노바의 두 거장 스탄 게츠/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Stan Getz/Antonio Carlos Jobim
재즈계의 카멜레온 허비 행콕 Herbie Hancock
퓨전재즈의 소장파 웨더 리포트 Weather Report
피아노 즉흥연주의 신기원 키스 자렛 Keith Jarrett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베이시스트 자코 파스토리우스 Jaco Pastorius
라틴 향 물씬한 퓨전재즈 칙 코리아 Chick Corea
재즈 기타리스트에서 최고의 보컬리스트로 조지 벤슨 George Benson
건반 위의 마술사 밥 제임스 Bob James
색소폰으로 노래하는 연주인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Grover Washington Jr.
모두에게 다가온 재즈의 설렘, Feels so good 척 맨지오니 Chuck Mangione
재즈 보컬 4인방의 즐거운 재즈 맨해튼 트랜스퍼 Manhattan Transfer
황금비율로 만난 컨템퍼러리 재즈 명콤비 데이브 그루신/리 릿나워 Dave Grusin/Lee Ritenour
우리 시대 진정한 재즈 스타 팻 메스니 Pat Metheny
9. 교양
이한우 기자 꼽은 교양서는 고종석의 <어루만지다>(마음산책, 2009).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 책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2514691). <도시의 기억>(개마고원, 2008)과 마찬가지로, 한국일보의 연재를 묶은 것이다. 추천자에 따르면, "입술, 감추다, 메아리, 미끈하다, 혀놀림, 가냘프다, 발가락, 손톱, 잇바디, 꽃값, 모름지기, 바람벽, 그네, 무지개, 미리내, 누이, 엇갈리다, 궂기다, 어둑새벽, 켤레, 간지럼, 밴대질, 눈물, 딸내미, 속삭임, 스스럼, 술, 한숨, 보름, 그믐, 거품, 춤, 그대, 구슬, 어루만지다, 서랍, 버금, 비탈, 엿보다, 주름. 모두 40개의 우리말을 단서로 고종석이 준비한 향연은 때로는 외설적이다가도 어느새 순정적이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그의 해박함을 즐기는 것 또한 고종석만이 줄 수 있는 뜻밖의 즐거움이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낀 것만으로 ‘언어학자’ 고종석에게 참 고맙다." 언어학자가 아닌 '객원논설위원'으로서 고종석이 쓴 시평들을 묶은 <경계긋기의 어려움>(개마고원, 2009)도 이번에 출간됐다. 실생활의 경험에서 말하자면, 고종석은 전철에서 읽기에 가장 좋은 저자의 한 사람이다. 3월엔 고종석 '3종 세트'와 함께해보시길...
10. 기형도
아동분야에 추천된 알렉상드르 자르뎅의 <알록달록 공화국>(파랑새, 2009)도 흥미를 끌지만(예전엔 '알렉상드르 자르댕'으로 소개됐었다), 이달에도 내 맘대로의 카테고리를 만든다. 오늘(3월 7일) 20주기를 맞은 '기형도'가 이 달의 특별한 카테고리이고, 사실 늦게라도 이 페이퍼를 쓴 이유의 절반은 이미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 그의 이름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어제 귀가길에 나는 심야극장 대신에 대헝서점에 들러서 이번에 나온 추모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의 삶과 문학>(문학과지성사, 2009)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좌석버스의 침침한 불빛 아래서 몇 편의 글을 읽었다. 89년 봄의 몇몇 일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살아있었다면 그도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다!
물론 기형도에 대한 개인적인 안면이나 기억은 갖고 있지 않다. 중앙일보의 기사들과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입>(문학과지성사, 1989)이 나오기 전에 발표된 시편들을 기억할 따름이었다. 그의 죽음도 시집이 나온 뒤에야 알았거나 그냥 '단신'으로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시집을 읽은 뒤, 기형도란 이름은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 됐다. 10년쯤 전에 기형도 시에 대해 나대로 글도 쓰고 강의도 한 적이 있다. 그가 첫시집의 제목으로 생각해두었다는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읽고 덧붙일 말이 더 있을지 생각해볼 작정이다. 그래서 '3월의 읽을 만한 책'에 포함시켜둔다.
09. 03. 06-07.
P.S. 이달에 읽을 고전은 밀턴의 <실낙원>이다. 작년 6월에 한번 꼽아본 적이 있지만, 고전은 '읽기'의 대상이 아니라 '다시 읽기'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두 번 꼽는 일이 흠은 아니겠다(사실은 이번에야 읽는 것이지만). 밀턴 전공자인 박상익 교수의 <밀턴 평전>(푸른역사, 2008)과 편역서 <아레오파기티카>(소나무, 1999)도 같이 읽을 책이다. 낙원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의 신세가 '신화'로만 읽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