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필자는 최근 칼럼집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후마니타스, 2009)를 펴내기도 한 이대근 기자로 현재 직함은 정치.국제 에디터(부국장)라 한다. 칼럼의 키워드가 '모독'이다 보니 '멸시'를 키워드로 한 소설가 최인석씨의 어제 칼럼이 생각났다(그가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실도 이번에 상기하게 됐다). 모두 용산 참사에 대한 정부의 뻔뻔한 대응을 질타하고 있다. 국민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정권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두고볼 일이다.

  

경향신문(09. 02. 05) [이대근 칼럼]용산 테러리스트

이명박은 민주화 시대에 어느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느냐고 했다. 민주화 시대 모든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려 했고, 이명박 정권도 그랬다. 다만, 이명박 정권이 더 노골적이고 그 방법이 좀더 거친 것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맞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사는 일 중심으로, 일 잘하는 사람 써야 한다고 했다. 그는 왜 그렇게 못했는지 그 이유를 들으려 사람들이 TV 앞에 앉은 것일 텐데 말하지 않았다. 분단 60년 중 1년의 경색은 있을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마치 자신이 59년간 남북 화해 잘하다 딱 1년만 안된 것처럼 주장하는데 정확히 하자. 그의 취임 이후 1년 내내 경색되었다. 오래지 않아 남북협상할 거라고? 아마 오래 걸릴 것이다. 그는 현안들에 대해 제대로 변명하지도, 자기 논리에 따라 효과적으로 설득하지도 못했다.

불교계로부터 그렇게 혼나고도 ‘하나님의 소명’ 운운하고, 오바마처럼 화합하면 어떻겠느냐는 주문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미국수준이면 좋겠다며 비웃었다. 옛날엔 자동차 타고 가다가 신문에 장관이 잘못했다고 나오면 전화해서 ‘어이 내보내’ 그런 식이었는데, 그러면 안된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그런 요구를 한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아마 그는 자기에 대한 고언을 종종 이렇게 오해하는 것 같다. 너무 많은 조언과 지적 때문에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평하는 사람들-특히 그의 주변 사람들, 여당 사람들이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그만 입 닫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죽은자에 사과는커녕 모독만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군주가 현명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은 군주가 정말 현명해서가 아니라, 훌륭한 조언자들 덕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견해이다. 군주의 지혜가 좋은 조언을 낳는 것이지, 좋은 조언이 군주의 지혜를 낳을 수는 없다.’ 이명박의 말대로 조언은 그만해도 될 것 같다.

SBS TV <대통령과의 원탁 대화>는 안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보여주어서는 안될 것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특히 용산 참사 이야기 때 그랬다. 그는 자기 감정에 충실했다. 빈 말로나마 미안하다고 슬프다고도 하지 않았다. 철거민, 그들은 누군가. 30년 넘게 장사한 거리에서 쫓겨나 다 잃고, 결국 그 자리에서 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칠순의 노인이었다. 외환위기로 일식집 문을 닫은 뒤 다시 살아보자고 복어집을 낸 지 3년 만에 그 꿈은 거품처럼 꺼지고, 살아갈 기운을 잃은 쉰여섯의 가장이었다. 이 거리를 떠나야 했기에 물과 전기 없는 천막집을 짓고 노점상, 막노동을 하며 철거된 인생을 살다 뜨거운 불속에 사라져야 했던 쉰 살의 가난한 아저씨였다.  

땀 흘려 일군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되고, 살아갈 희망을 잃었다. 이렇게 다 빼앗긴 이들이 자비를 베풀기를 기대했는가. 권력과 재벌과 건물주의 욕망을 위해 온순한 양처럼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았는가. 미국 연수 때 가족과 국립공원에 놀러갔다가 곰 출현 경고판을 본 적이 있다. 충분한 거리가 아니면 달아나지 말고 손을 벌려 크게 보이도록 하라. 그래도 안 물러나면 소리를 내고…. 그 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방법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한다.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그들이 망루로 올라갈 때는 이유가 있었다.

누구는 그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라고 했다. 부동산 부자인 청와대 부대변인이라는 이는 그들의 죽음이 과격시위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통령은 법질서를 잡으려면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죽음은 법질서의 제단에 바쳐지기 위해 이렇게 재해석되었다. 죽은 자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명백한 이 사건을, 너무 슬픈 이 이야기를 그들조차 외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국가와 시민간 사회계약은 깨져
그러나 큰 죄를 진 재벌총수를 죄다 용서함으로써 법이 정의와는 무관한 기득권 보호 장치임을 전 국민에게 학습시켰을 때 법질서는 이미 무너졌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철거민들은 벌써 법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고, 한 명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테러리스트였다는 선전으로는 무너진 법이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법의 정신이 이 정권에 의해 너무 많이 훼손되었다. 어쩔 텐가. 이제는 국가의 이름으로,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다. 국가와 시민의 사회계약은 거의 깨졌다.(경향신문 정치·국제 에디터) 

 

경향신문(09. 01. 04) 여섯의 죽음, 사과도 않는건 멸시다

나는 요즘 서울 고덕동의 작은 시영 아파트 하나를 빌려 작업실로 쓴다. 아파트라고 하지만 실은 20여년 전 도심의 판자촌을 철거할 때 그곳의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 위해 마구잡이로 지어진 아파트일 뿐이다. 방이 둘, 거실이 하나, 몸뚱이를 틀기가 거북할 지경으로 비좁은 화장실 겸 욕실이 하나, 이런 식으로 15평의 공간이 어색하고 기묘하게 나뉘고 또 나뉘었다. 

20여년 전에는 휑뎅그렁한 도시 외곽의 야산이었던 이곳에도 이제는 여기저기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동네에도 재건축 바람이 불어 15평 아파트 한 칸이 4억원이 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곳에 처음 둥지를 틀었던 주민들 상당수는 이미 자리를 떠난 것 같다. 집주인은 주로 외지인들, 그러니까 투자 목적으로 아파트를 사둔 이들이고, 주민들은 대개 세들어 산다. 15평짜리 아파트에 다섯 식구도 살고 여섯 식구도 산다.

그래도 아이들은 노스페이스를 입고 다니고, 나이키를 신고 다닌다. 저녁이면 학원 버스들이 아파트 단지 내 도로를 누비며 아이들을 실어 나른다. 졸라대는 아이들을 당해낼 수 없었을 부모들의 심사도 보이고, 아이들이 좀더 좋은 학교에 들어가 좀더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욕심도 보인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날에 나는 여기 사는 이웃들의 하루가 얼마나 일찍 시작되는지 알 수 있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먼저 일어나 출근에 나섰다. 도대체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란 어떤 곳일까? 나중에야 나는 그들이 대개의 경우 청소를 한다는 것을, 또는 식당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이트칼라들이 출근하기 전에 청소를 끝내기 위해서는, 일찍 출근하는 손님들의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서는 그들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들보다 부지런한 이들을 알지 못한다. 가난한 자는 게으르고 게으르니까 가난하다는 생각은 부르주아들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곳의 이웃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토록 부지런한데도 이들의 입성은, 이들의 식료는 때로는 간소하거나 초라하고, 때로는 참혹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스페이스나 나이키는 아이들의 욕망,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은 부모들의 욕망의 표현일 따름이다.

그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다름아닌 장사꾼들, 가난한 이들의 마늘 하나마저 빼앗아 거만의 부를 축적하고 그로도 부족하여 금융 장난까지 저질러 지금 온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더욱 깊은 가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바로 그자들이다. 코 치켜들고 턱 치켜들고 수백만원짜리 양복에, 수억원짜리 차에 몸을 싣고 다니는 자들, 바로 나의 가난한 이웃들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어찌하여 그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멸시할 수 있는 것인가? 매일 저 가난한 이들의 마늘을 빼앗아 제 차에 기름을 넣는 주제에 어찌하여? 저 가난한 이들의 옷을 빼앗아 제 옷의 세탁비를 지불하고, 저 가난한 이웃들의 밥을 빼앗아 제 금준미주(金樽美酒)에 냄새를 더하는 주제에 어찌하여? 도대체 누가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 하물며 도대체 누가 이들을 죽일 권리를 주었는가?

며칠 전 용산 재개발지구에서 경찰들의 특공대 진압 과정에 죽어간 이들은 나의 이웃들이다. 최소한 자본가의, 경찰의, 서울시의, 정부의 과실치사가 분명한 이 사건에 대해 책임있는 당국자가 아직까지도 온전히 사과조차 않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나라의 모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멸시의 표현이다. 나는 이번 사건 자체보다도 이 멸시가 더 무섭다. 이 멸시는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비슷한 일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당국자와 자본가들의 선언이다.

우리 이웃들이 죽은 구체적이고 과학적 이유가 무엇이건, 형사법적 책임소재가 어디에 있건, 다섯 명의 사람이, 아니, 경찰까지 포함하면 여섯이 죽었다. 그 죽음 앞에 이 사회는, 이 나라는, 우리는 어찌 이리도 뻔뻔한가? 가장 두렵고 소름끼치는 것은 바로 이 뻔뻔함이다. 욕망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뻔뻔해질 각오가 되어 있는가?(최인석_소설가) 

09.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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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이렇게 써라 - 이대근, &lt;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gt;
    from Fly, Hendrix, Fly 2009-03-16 18:37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 - 이대근 지음/후마니타스 글쟁이들은 고민한다. 자신만이 읽을 글이 아니라면 언제나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가 읽게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는 어느 순간에서 끊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다. 물론 학술논문을 쓸 때에야 상세한 설명과 정확한 뒷받침 문장을 구비해야 할 때가 있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긴박하게 한 방의 임팩트를 가지고 글을 써야할 경우가 있다. 저널리스트의 글쓰기가 그렇다...
 
 
수유 2009-02-05 21:56   좋아요 0 | URL
'국민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정권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두고볼 일이다'- 맞어, 정말 두고볼일이야요!!

로쟈 2009-02-06 00:40   좋아요 0 | URL
이런 거 때문에라도 오래 살아야 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5 23:21   좋아요 0 | URL
모독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충성스런 지지를 보여주는 충신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로쟈 2009-02-06 00:41   좋아요 0 | URL
네, 같이 지옥에 떨어질 사람들입니다...

Mephistopheles 2009-02-06 01:25   좋아요 0 | URL
이리 할껄 뭔 국민에게 사과, 소통을 운운했는지....이건 뭐 지능지수가 닭XXX 수준도 안돼고..대체 이해가 안갑니다.

로쟈 2009-02-06 23:38   좋아요 0 | URL
뭐 요즘은 욕해봐야 입만 아픈 지경이죠...

노바리 2009-02-06 02:27   좋아요 0 | URL
가끔 들러 로쟈님의 글을 읽고가는 사람입니다. 오랜만에 왔다가 덕분에 이대근 논설위원의 책이 나왔단 사실을 알게 돼서 기쁜 마음으로 주문하러 달려가요. 무시무시하게 날카로운 필치 때문에 좋아하는 기자입니다.

로쟈 2009-02-06 23:39   좋아요 0 | URL
가끔은 도움이 돼 드리는군요.^^

토탈리콜 2009-02-07 17:52   좋아요 0 | URL
로쟈님, 처음 댓글을 답니다. 좋은글 많이 보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그런데, 제가 정말 소름끼치는 것은, 지금 이시점에서 다시 대통령선거를 하면 MB를 이길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 지난번 선거투표율 보다 더 떨어지기나 할까요? 제생각에는 아닐것 같아요. 정말 슬프고 소름끼쳐요...

2009-02-07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