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과 자료를 조금 들여다보고 있는데, 일단 느낀 점 두 가지는 이번에 나온 라울 힐베르크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9)가 정말 대단한 책이라는 것과 노만 핀켈슈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한겨레신문사, 2004)이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는 것(벌써 절판되다니!). 이번에 알게 된 것인데, 홀로코스트학에도 파벌이 있고 두 권 다 시온주의자들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책들 가운데는 두 사람의 책이 가장 계발적이고 또한 자극적이지 않나 싶다(힐베르크의 책은 규모나 통찰면에서 모두 경탄스럽다. 참고로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 산업> 등의 다른 책에서는 '힐버그'라고 표기돼 있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홀로코스트 산업>을 좀 읽다가 홀로코스트 학자 중의 한 사람인 톰 세게브를 검색해보았는데, 아래 기사가 뜬다. 마침 최갑수 교수의 논문도 복사해서 읽고 있던 터여서 요긴하게 읽었다(최교수는 핀켈슈타인의 주장도 또다른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또 읽은 김에 스크랩도 해놓는다.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노빅과 세게브의 책도 마저 소개되면 좋을 듯싶다. 하기야 홀로코스트 관련서는 부지기수이며 문제작도 드물진 않다. 참고로, 역사학에 한정하자면, 홀로코스트와 기억의 문제를 다룬 책으로 지성사가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홀로코스트 재현하기: 역사, 이론, 트라우마>(1994)도 소개됨 직하다. 책의 일부는 <치유의 역사학으로: 라카프라의 정신분석학적 역사학>(푸른역사, 2008)에 번역돼 있기도 하다.    

한겨레(07. 11. 08) '홀로코스트의 기억’ 누가 비틀고 있나

“모든 집단기억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소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일반적으로 쓰일 때는 대량학살을 가리키지만 고유명사일 경우는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을 일컫는다. 집시나 르완다의 투치족도 집단학살의 피해자이지만 홀로코스트 기억 만큼 현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누리지 못한다. 홀로코스트는 1970년대 이후 역사학에서 기억담론의 득세를 촉매하는 구실도 했다. 레오폴트 랑케와 같은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는 기억을 가변적이라는 이유로 불신했으나 홀로코스트가 공적 담론으로 부상한 이후 집단기억의 호출이 역사학의 큰 줄기가 된 것이다.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는 김진균기념사업회 연구총서 2권으로 나온 <전쟁국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정책>(문화과학사, 홍성태 엮음)에 실은 글 ‘홀로코스트와 기억의 정치적 이용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에서 홀로코스트 담론의 한계와 문제점을 짚었다. 그는 홀로코스트 담론을 비판한 세 명의 유대인 학자의 글을 검토했다. 피터 노빅(미국) 톰 세게브(이스라엘) 노먼 핀켈슈타인(미국)이 그들이다.  

“세 사람은 자기성찰 능력을 가진 괜찮은 ‘유대인 학자’들이지만 그들도 유럽중심주의에 갇혀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2000년 홀로코스트 기억이 유대인들의 돈벌이에 이용되고 있음을 해부하고 폭로한 <홀로코스트 산업>을 펴낸 핀켈슈타인의 비판이 가장 급진적이다. 그는 홀로코스트는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 ‘유대인에 대한 비이성적인 이교도의 끊임없는 증오의 절정’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는 ‘윤리적으로 진실성 없는’ ‘지적 테러리즘’이며 유대인들에게 전면적인 면죄부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최 교수는 밝혔다. 핀켈슈타인은 홀로코스트 기억은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적 구출물”이라면서 기억의 담론 자체도 겨냥했다. “비유대인 가운데 홀로코스트 기억 비판을 펴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유대계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급진 비판론자조차도 “시오니즘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최 교수는 “핀켈슈타인이 그의 책 결론 부분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 사회는 미국 주류 엘리트들의 판단 여하에 따라 희생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나타냈다”면서 “이런 위기의식이야말로 홀로코스트 기억의 부당한 정치적 이용을 정당화하는 시온주의 방책”이라고 밝혔다. 이런 인식은 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자 사이의 진정한 화해와 공존을 이끌어내는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이유는 뭘까? 최 교수는 홀로코스트를 그 일부로 하는 더 큰 담론의 구조 때문이라고 했다. 즉 “홀로코스트 기억과 담론이 유럽중심주의라는 더 큰 담론적 질서의 지지를 받아 그것을 작은 규모로 재생산하면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유럽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을 투사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담론구조의 일부이자 보조장치라는 해석이다.   

최 교수는 그 반증으로 홀로코스트 담론에서 발견되는 세가지 분할과 배척을 지적했다. △문명과 야만 내지 비문명의 분할 △문명에 대한 문명의 대량 학살과 야만(비문명)에 대한 문명의 대량학살 사이의 분할과 후자의 배척 △유대인(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할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이말로 문명인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유일무이한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야만에 대한 문명의 학살은 당연히 비교 대상에서 제외된다. 최 교수는 “홀로코스트 담론에는 이스라엘과 유대인 권력이 들어가 다른 기억을 압도하고 있다”면서 “이-팔 분쟁이라는 현실과 담론이 변증법적으로 오고 가야 (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강성만 기자) 

09. 01. 28. 

 

P.S. 1961년에 초판이 나오고, 2003년에 3판이 나온 힐베르크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는 현재까지 9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한국어판은 열번째 외국어 판본이라고 한다. 저자는 새로운 번역판이 나올 때마다 자료들을 수정하거나 보충했고, 한국어판도 예외가 아니어서 334군데의 본문과 각주가 저자의 주문에 따라 수정되거나 추가되었다. 거기에 55개 문단은 전체가 교체되거나 추가되었고. 힐베르크가 2007년 8월에 세상을 떠난 탓에 역자에 따르면, "한국어판은, 행인지 불행인지 최종판이다." 오늘 힐베르크의 회고록 <기억의 정치>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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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1-2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사회서적들은 나오면 언제 절판될지를 알 수 없어서, 아 이건 꼭 소장하고 싶다, 그러면 지금 읽지 않아도 사야... 위에 말씀하신 <홀로코스트 산업>도 불과 이제 4년밖에(?) 안됐는데... -_-

로쟈 2009-01-28 22:15   좋아요 0 | URL
어떨 땐 그게 출판사들의 노림수 같기도 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1-3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번역판이 나올 때마다 내용의 일부를 수정 추가했다니 저자의 성실함이 돋보이는군요.모름지기 학자는 그래야지요.

로쟈 2009-01-30 17:35   좋아요 0 | URL
기록보관소 작업을 그보다 더 많이 한 연구자가 없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