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모로 특이한 책이 출간됐다. <무감각은 범죄다>(이루, 2009). 일단 번역서가 아니라는 점. 저자인 이희원씨는 독일에서 유물론 미학을 공부하다가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이란 책("<자본론> 이후 최고의 책"이란 평도 있다고 한다)을 접하고 흠뻑 빠져서 박사학위논문을 썼다고 한다. ''저항의 미학'으로서의 성 미학'이란 부제를 보고 나는 페터 바이스 연구서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저항의 미학>에 대한 소개는 차후에 이루어질 모양이고, 이번에 나온 책은 저자의 '성 미학'이다. 그런데, 이게 또 흔하게 연상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의 미학'이 아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섹스의 미학'이다. '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행위'를 주제로 한 책이기 때문이다. 짐작에 가장 유사한 범주의 책이라면 빌헬름 라이히의 <성혁명>이나 <오르가즘의 기능> 등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여하튼 '성 미학'과 '저항의 미학'을 틀거리로 한 독특한 책이다. 그런 독특한 이론적 작업으로 이종영씨의 '이행총서'와도 견주게 하는데, 왠지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새물결, 2001)과 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책을 읽기 전 인상이 일단은 그렇고, 관련리뷰를 미리 읽어본다.   

한국일보(09. 01. 10) 인간의 성행위에 깃든 저항의 미학 

이 책을 소화하려면 '대상적 활동'이라는 마르크스 철학의 개념부터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모든 사물은 그 자체로 독립돼 설명되지 않고, 다른 것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파악된다고 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기 바깥의 세계를 조작해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기도 변화하는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은 이해된다. 이 책은 그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성행위를 분석한 결과다.

저자는 이 책을 쓴 이유를 "넘쳐나는 성 담론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성적 존재로서의 나'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서문에 밝혔다. 저자에 따르면 성행위는 한 개인의 이기적 만족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성행위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뿐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노동 및 예술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대상적"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대상적 행위로서 성행위를 규명하기 위해 '오르가즘 체험'을 분석한다. 인간의 성적 능력이 제대로 펼쳐졌을 때를 가정하고, 그때의 성감 기제가 움직이는 원리를 밝힘으로써 성행위의 철학적ㆍ미학적 의미를 추출해낸다.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 이론과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 이론이 동원되고, 발전적으로 해체ㆍ수용된다. 그리고 오르가즘 체험이 지닌 인성론적 함의를 구성해 간다.

대상적 활동으로서 성행위를 다루는 저자의 관점은 결국 '성행위는 능력의 문제다'라는 명제로 수렴된다. 오르가즘은 전방위적 자기실현을 위한 자기 인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르가즘 불능은 생리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를 표현하고 그럼으로써 자기를 취하는' 저항능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성 담론은 저항의 미학으로 연결된다.

내밀한 영역에 감춰져 있던 감각 기제들을 현대 미학의 복잡한 이론을 거푸집 삼아 사출해 낸 결론은, 마르크스의 테제이기도 한 '인간적 감각의 회복'을 향해 간다. 저자는 자신의 고통에 견주어 남의 그것을 감지해 낼 수 있는 것이, 대상적 활동으로서 성행위를 경험해 본 이들의 공통점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성관계를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의 고통을 정면으로 뚫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감각의 기능 장애로서 무감각'을, 저자가 '범죄'라고 규정한 까닭이다.(유상호기자) 

09. 01. 10. 

 

P.S. 몇 권의 이미지를 나열했지만, 바타이유와 라이히의 책들이 <무감각은 범죄다>를 읽기 위한 '베이스'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에서 전개할 성에 대한 모든 논의들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전제는 인간의 성적 행위는 그 핵심에서 대표적인 '대상적 활동'의 예라는 것이다. (...) 인간의 성적 능력의 변화, 발전, 쇠퇴 등은 오르가즘 이론을 통해 매우 효과적으로 설명된다. 이를 위해 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 행위라는 지평 위에서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 이론과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 이론이 적극적으로 수용된다."(20쪽)  

한편, 저자가 관심을 부추기는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영역본 기준으로 3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소설'이다. 아무래도 쉽게 소개될 성싶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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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01-11 02:19 
    성행위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뿐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노동 및 예술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대상적
 
 
비로그인 2009-01-10 11:15   좋아요 0 | URL
페터 바이스<저항의 미학>은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전체가 1천 쪽이 넘는데 영역본은 1/3만 나와 있습니다.Austerlitz(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책)의 저자 W.G. Sebald에서 Magnum Opus 라고 해서 구미는 당기지만 한두 장 읽어 보니 "밀림 속"에 들어가는 기분이더군요. 영역을 역자가 애 좀 먹었을 것 같아요. 읽는 것은 나중에 시간이 한꺼번에 많이 날 때 고려해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로쟈 2009-01-10 11:32   좋아요 0 | URL
네, 1권만 뜨더군요. 안 그래도 대작은 많은데...--;

비로그인 2009-01-10 11:17   좋아요 0 | URL
Sebald가 에서 -> Sebald가 에서.

비로그인 2009-01-10 11:19   좋아요 0 | URL
미안합니다. 'Sebald가'와 '에서' 사이에 책의 링크가 있는데 저장을 하고 나니 계속 안 보이는군요. 입니다.

로쟈 2009-01-10 11:22   좋아요 0 | URL
계속 안 보이는데요.^^ 알라딘 댓글에 용량 제한이 있는가봐요.

비로그인 2009-01-10 11:20   좋아요 0 | URL
알 수 없는 일이군요. On the Natural History of Destruction이 계속 안먹히니... 이번에도 보이지 않으면 그냥 두겠습니다.

로쟈 2009-01-10 11:33   좋아요 0 | URL
제목과 표지만으로도 흥미를 끄는 책이네요.^^

비로그인 2009-01-10 11:32   좋아요 0 | URL
댓글에 저자 이름이나 책 이름에 link 를 할 수 있는 html tag 를 씌워주었는데 그래서 변칙적인 현상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공연히 지면을 지저분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비로그인 2009-01-10 11:46   좋아요 0 | URL
제발드의 작품은 아직 한국에 소개가 안 되어 있는 것 같군요. 대표작 <아우슈터리츠>조차도 번역이 안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좀 의외입니다. 그는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것입니다. 그의 대표작은 저자가 아직 생존해 있었을 때 저자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영국의 Anthea Bell 할머니가 영역되었는데 원작 못지 않은 번역이라는 평입니다. 제발드 자신도 영어는 영국 작가 못지 않지만 작품 활동은 계속 독어로 했지요. 제가 독문학을 번역할 실력이 되면 출판사에 이 책을 들고가 내자고 할 것입니다.

로쟈 2009-01-10 13:29   좋아요 0 | URL
<이민자들>(창비, 2008)이란 책이 얼마 전에 나왔는데요. 다른 책들도 소개될 여지가 있겠네요...

비로그인 2009-01-10 19:1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한 권이 얼마 전에 소개되었군요. 이제야 제발드가 국내에 소개되는군요! 그의 아름다운 글이 잘 소개되기만을 바랍니다. 독일인이고 독일어로 글을 썼지만 20대 초반부터 줄곧 영국에서 살았고 영미권에서 제발드라고 계속 들어서인지 제발트라고 하니 다른 사람처럼 들리는군요.^^

로쟈 2009-01-10 19:59   좋아요 0 | URL
덕분에 저도 한 사람 더 챙기게 됐습니다.^^

비로그인 2009-01-10 20:39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레이다에 걸리지 않고 저공비행한 작가가 다 있었군요.^^ 그것도 저공비행하는 로쟈님의 레이다에 말입니다.^^

로쟈 2009-01-10 20:48   좋아요 0 | URL
'세계의 책'이란 카테고리도 두고 있지만 러시아책 모니터링을 그만둔 지도 오래됐습니다. 쏟아지는 국내서만 카바하기도 어렵습니다.^^;

비로그인 2009-01-10 21:09   좋아요 0 | URL
제발드 인터뷰 링크를 소개합니다. 2001년 12월6일자 인터뷰입니다. (그는 며칠 뒤 12월14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그의 글이 어떤지 약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제가 흠모하는 베테랑 번역가인 안시아 벨 할머니가 <아우슈털리츠>의 번역에 대해 한 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제발드의 독일어는 의도적으로 19세기의 독일어를 구사하여 많은 부분에서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작품이 그러합니다. <이민자들>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그의 정교한 문체가 한글 번역본에서 - 많이는 못하더라도 -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면 합니다. 이 인터뷰는 <이민자들>로 얘기가 시작됩니다. 처음에 잠시 광고가 나오고 인터뷰가 방송됩니다. (이 인터뷰어인 Silverblatt는 KCRW 에서 많은 유명작가들을 인터뷰했습니다.) http://www.kcrw.com/media-player/mediaPlayer2.html?type=audio&id=bw011206w_g_sebald

노이에자이트 2009-01-11 00:27   좋아요 0 | URL
제가 작년에 로쟈 님과 초창기에 댓글 교환했을 때 페터 바이스<부모와의 이별>가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생각나네요.저는 이 작가를 사회주의자이면서 혁명에 대한 작품이 많은 것으로만 알았는데 이런 책은 여기서 알게 되었습니다.자본론 이후의 명저라...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