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의 출세작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의 출간 소식을 '마이리스트'로 갈무리한 바 있는데, 책의 요지를 짚어주는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몇 가지 줄거리만 챙겨두어도 인문 이론서를 읽는 데 도움이 된다.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은 책의 부제이다...

한겨레(08. 12. 20) 주디스 버틀러 “여성은 없다”

<젠더 트러블>은 페미니즘 담론 안팎에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킨 저작이다. 1990년 출간한 이 책으로 지은이 주디스 버틀러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페미니즘 세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페미니즘 논쟁의 중심에 섰다. 논란이 거셌던 것은 남성 대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아래 여성 해방의 정치를 주도하던 페미니즘 운동의 주류를 이 책이 정면으로 치받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단일한 주체를 해체하고자 했다. 또 여성이 설령 계급·인종 같은 분할선에 따라 복수로 존재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여성이라는 범주 아래 하나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여성 정체성 담론도 해체돼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버틀러가 보기에 여성이라는 젠더는 결코 동일한 범주로 묶일 수 없는 이질성의 집합이었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 ‘젠더 트러블’은 ‘젠더’ 내부에 이미 항상 ‘트러블’이 있다는 선언적 진단이며, 젠더에 트러블을 일으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알려진 대로 버틀러는 ‘퀴어(동성애자) 이론’의 창시자라는 호칭도 얻었는데, 이 책의 재판(1999년) 서문에서 이례적으로 자신의 사적인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라면서 젠더 규범의 어떤 폭력성을 인식하게 된” 그는 16살 때 “격렬한 커밍아웃”을 했다. 사람들이 그를 여성이라고 지칭하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요구했는데, 그런 요구 때문에 고통받다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마침내 밝혔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이렇게 동성애자로서 자신이 겪었던 삶을 이론화하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조차 이질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의 처지가 그를 급진적·근본적 사고로 이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버틀러가 시도하는 것은 여성 정체성 문제를 래디컬하게 파헤침으로써 정체성 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이론적 수혈을 받은 곳은 프랑스 철학계인데, 이 책에서도 사르트르·푸코·보부아르·크리스테바·이리가레의 이론에 대한 인용과 성찰을 만날 수 있다. 그 자신의 말로 표현하면 ‘프랑스 철학의 미국적 구성물’이 이 책인 셈이다. 이때 버틀러는 푸코를 통해 만난 니체의 계보학을 분석과 비판의 방법론으로 삼아 프랑스 페미니즘 담론을 해체적으로 읽어냄으로써 그 자신의 이론을 재구성한다.

버틀러의 가장 충격적인 주장은 섹스(생물학적 성)가 문화적·제도적 힘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명제다. 이 명제를 입증해 가는 과정에서 그가 먼저 인용하는 것이 보부아르의 유명한 주장,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보부아르의 명제에는 여성이 생물학적 성(섹스)과는 별개로 젠더(사회·문화적 성)를 차후에 구성한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 젠더와 섹스가 분리되는 것인데, 이 분리를 논리적 극한까지 밀어붙여 보면, “섹스/젠더 구분은 섹스로 결정된 몸과 문화로 구성된 젠더간의 극단적 단절을 시사한다.” 젠더가 섹스와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이론화되면, “젠더 자체는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이 된다. 그럴 경우,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의 특징을 지녔더라도 젠더상으로는 여성인 존재가 나올 수가 있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그 결과 남자와 남성적인 것은 남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여자의 몸을 의미할 수 있고, 여자와 여성적인 것은 여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남자의 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젠더가 이렇게 생물학적 성과는 무관하게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면, 여성 정체성의 본질적 근거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버틀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생물학적 성(섹스) 자체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을 편다. 생물학적 성이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자연’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성/남성의 이분법으로 포괄할 수 없는 여러 부류의 이질적 존재들이 있으며, 이들이 문화적 강제 속에서 하나의 생물학적 성으로 고정될 뿐이라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섹스가 자연에 관계되듯 젠더가 문화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젠더(사회·문화적 성)의 원인 또는 기원은 섹스(생물학적 성)이며 섹스의 결과가 젠더라는 통념이 여기서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역으로 섹스는 젠더라는 문화적 강제 속에서 구성되는 것, 다시 말해 젠더의 결과이자 효과라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보부아르의 명제가 비유가 아닌 직설의 지위를 얻게 된다.

버틀러의 주장은 여성성의 본질적 바탕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범주의 보편성에 입각해 여성성·모성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체성 정치’는 토대를 잃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 정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버틀러는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라고 간명하게 이야기한다. 여성이라는 보편적 정체성을 해체하더라도, 해방을 위한 일시적·잠정적 연대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다.(고명섭 기자)

08. 12. 19.

P.S. <젠더 트러블>의 출간으로 잠시 유예해 두었던 독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의 5장은 '정치적 열정적 (탈)애착들, 혹은 프로이트 독자로서의 주디스 버틀러'를 다루고 있다. 얼마전 방한했던 자크 랑시에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읽어볼 수 있다. 주말에 먼지를 좀 털어야겠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Ritournelle 2008-12-20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학적 삼인방에서 버틀러는 영미 전통에 해당하는 영역에 속하지요?

로쟈 2008-12-20 10:44   좋아요 0 | URL
영-불-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프랑스 철학의 미국적 구성물'이라고 자평하는 걸 보면 영미 전통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는데요. 버틀러는 헤겔 철학에도 정통합니다...

헛헛헛헛 2009-01-15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글 감사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

버틀러의 논의들 중 특히 '생물학적 성(섹스) 자체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에 여전히 동의하기가 힘든데... 이에 대해 어떤 근거들을 들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참고로, [젠더 트러블]과 관계된 논쟁들은 어디서 찾아볼 수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