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까지 혀를 차게 되는 일의 연속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은 일들이 요즘 한국사회에선 떼로 일어난다('블랙 스완'이 떼지어 날아다니는 듯하다). 고난도의 관심분산 전략이 아닌가란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일제고사에 반대했다고 교사들이 파면당한 일도 현 정권의 자랑할 만한 치적일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사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교사들의 부당징계 철회투쟁을 지지하며 관련칼럼과 수기를 모아놓는다. 다른 일로 좀 일찍 일어났다가 또 속 터지는 기사들만 읽었다...  

한겨레(08. 12. 19) [기고] 시험을 치르지 않을 헌법적 권리 / 박경신

최근 전국수준 학업성취평가(일제고사)에 학생들이 응시하지 않도록 허용했다는 이유로 담당 교사들이 해임·파면돼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이 논란의 당사자들은 기본적으로 교육권의 주체가 학생임을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징계당한 교사들은 ‘일제고사 거부 교사’들이 아니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것은 학생이며 교사들은 이 학생들이 억지로 시험을 보도록 강제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할 권리가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할 권리가 있다면 이를 침해하지 않은 교사는 상을 줘야지 징계를 할 수는 없다.

학생의 교육권이 헌법적으로 독특한 점은 교육자의 방침에 따라 교육 수용자(학생)의 권리가 일정하게 제약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공부하기 싫더라도 일정한 ‘강요’를 통해 조금씩 재미를 들이도록 하여 나중에는 큰 보람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올바른 교육방법이다. 하지만 강요의 도구는 교육적이어야 한다. 곧 공부를 잘 못하거나 열심히 안 하는 학생은 평점을 낮게 주거나 다음 단계의 교육과정으로 진급시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징계 또는 과태료 등의 강제수단을 동원할 수는 없다.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거나 다른 학생의 교육을 방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시험도 마찬가지다. 시험은 보통 학생이 한 단계의 교과과정을 충실히 이수하여 다음 단계의 교과과정으로 이행할 준비가 되었는지, 또는 그 학생이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학력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절차다. 학생 본인이 진급이나 학력평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해 부모의 동의를 얻어 그 시험을 일부러 보지 않는다고 해서 교육당국이 그 부모나 학생을 징계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시험을 영점 처리하면 될 일이다. 시험을 보고 틀린 개수대로 학생들을 때리던 과거의 교육은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우리는 몸서리치며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학생이 부모의 동의를 얻어 ‘일제고사’를 보지 않겠다는 것은 학생의 헌법적인 권리였으며, 교사들은 학생의 헌법적 권리를 존중해줄 의무가 있었고, 그러한 의무를 이행한 교사들을 징계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특히 이번 ‘일제고사’는 다른 시험과 달리 순전히 교육당국이 각 학생 및 학교의 성취도를 전국적으로 판단해 보고 교육시스템의 효율성을 자체평가하기 위해 진행했던 것이다. 순전히 교육당국의 정보수집 활동으로 학생의 교육권 보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시험은 학생들이 더욱더 거부할 권리가 있다. 미국의 몇몇 주들은 주 단위 졸업시험을 보지만 어떤 학생도 이 시험을 볼 의무는 없으며, 어떤 교사도 학생들이 빠짐없이 이 시험을 보도록 하지 않았다고 하여 징계당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이와 같은 자신의 권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교육당국과 학교가 위계와 강압으로 시험응시를 강요하고 있었고, 일부 교사들이 그 학생들이나 그 부모들에게 학생들의 권리를 고지해 준 것 이라면 교사들은 공익적인 내부 고발자라고도 할 수 있다.

학생은 자신의 전국 석차를 알지 않을 권리가 있다. 치기 싫은 시험을 침으로써 다른 학생들이 자신들의 전국 석차를 알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의무도 없다. 이번 일제고사는 교육시스템의 점검 및 학교간 성적 비교 등 순전히 교육당국의 행정적 필요로 수행된 것이다. 학생은 이에 동원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징계를 당한 교사들은 학생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므로 이들 교사들에 대한 징계는 위헌이다.(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경향신문(08. 12. 19) [금요논단]홉스의 국가論, 한국의 국가폭력

근대 초기 영국의 철학자였던 홉스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 늑대와 같아서 그대로 내버려두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인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킬 수 없다. 이런 자연적 전쟁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통해 인간의 폭력적 공격성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로는 국가라는 것이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가신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타자의 폭력으로부터 나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울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것이 홉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국가이론은 서양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한국에서는 잘못된 이론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다른 사람의 폭력이 아니라 국가의 폭력이야말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요인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행패를 부리지 않으면 개인의 삶이 훨씬 더 평화롭고 조화로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국가기구는 시민을 적으로 삼아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민들 사이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가기구와 시민공동체 사이에 전쟁상태를 스스로 조성해 왔던 것이다.

자유·권리 지키는 울타리
이 세상에 국가와 시민공동체 사이에 불화가 없는 나라는 없다. 왜냐하면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 역시 특정한 개인들인 까닭에 다른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충돌하는 이해관계가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조정되는 한에서 국가는 정치적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나라 안에서 자기와 이해관계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대등한 시민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폭력으로 억압하려 하거나 적대적으로 말살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경우 만약 국가기구가 표면적으로라도 다수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소수자들을 희생양 삼는 파시즘적 전체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국가기구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 국민을 적으로 몰아간다면 그 때는 국가기구와 대다수 시민공동체 사이에 전쟁상태가 초래될 수밖에 없다.

파시즘이 서양 나라들의 병리현상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기구와 시민공동체 사이의 전쟁상태가 수백 년 이래 나라의 불치병이었다. 왜냐하면 국민 모두의 공공적 이익이 아니라 자기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이 이 나라 지배계급의 집요한 습속이기 때문이다. 공공적 이익을 지키는 데는 지극히 무능하면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들이 이 나라의 상류층인데, 이들은 자기들의 그런 무능과 탐욕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을 틀어막기 위해 다시 국가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국민의 마음에 원한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이를 테면 자동차를 몰고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운전면허를 취소하여 가난한 장애인 부부의 생계를 막거나, 일제고사에 반대했다 하여 여러 명의 교사들을 한꺼번에 해고하는 것이 모두 그런 권력 남용이라 할 수 있다. 사소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 이런 일은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폭력이다. 그런데 이런 만행을 법의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것이 한국의 권력집단인 것이다.

‘촛불’을 짓밟은 권력 남용
멀리는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가까이는 87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에서 20~30년 만에 한 번씩 엄청난 봉기가 나라를 뒤흔들고 때때로 국가기구를 전복시켜온 까닭도 바로 이런 야만적인 국가폭력 때문이다. 권력집단이 동료시민을 적대시하고 법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크고 작은 폭력을 행사할 때 그들은 이를 통해 시민 봉기의 에너지를 스스로 축적하게 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씨알들의 분노는 지진처럼 대지를 뒤흔들고 썩은 권력의 성채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지난 봄, 여름 이 나라를 밝혔던 촛불은 명백히 그런 지진의 전조였다. 머지않아 그 전조는 현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니 가난한 우리는 서로의 체온으로 이 추위를 견디자.(김상봉 | 전남대 교수·철학)

오마이뉴스(08. 12. 18) 졸업앨범에서 사진도 빼겠답니다

일제고사에 반대해 학생들의 대체수업을 허락한 교사 7인에게 파면 및 해임 처분 결정이 17일 최종 통보됐다. <오마이뉴스>는 징계를 받은 7인의 교사 가운데 한 명인 유현초등학교 설은주 교사가 보내온 글을 싣는다.

12월 16일 수요일 저녁, 농성장에 도착한 난 몸이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과 만남, 나라는 사람을 말로서 드러내야 하는 인터뷰, 앉으면 이어지는 회의, 추운 농성장,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생경하기만 하고 피곤했다. 그리고. 내일 학교에 가면 해임통지서를 받을 것이란 말이 선생님들 사이에 술렁이고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중징계 방침 이후부터 지난 주 수요일, 해임결정까지, 오늘의 이 장면을 난 꽤 구체적으로 상상해내려 했었던 것 같다. 근데 아무래도 어렵다. 실감이 나질 않는다. 선배언니의 차를 타고 조금 일찍 농성장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찾아온 교감 선생님이 내민 해임 통지서
집에 가면 뭘 해야 하나? 글을 써야지. 학교 선생님들께 드리는 편지. 학교 선생님들의 반응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얼굴 뵐 용기가 나질 않아 편지로 대신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 아이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아니 떠올려야만 했다. 오늘 이 저녁이 내가 우리 아이들과 함께하는 마지막을 준비할 유일한 시간인 거다. 집에 가면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아 어쩌지. 아이들 하나하나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이날 모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불가능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허깨비 같은 몸을 이끌고 선배와 함께 들어와 내일 해야 하는 일, 그래서 지금 준비해야 하는 일을 나누어 생각해봤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문을 열었다. 내 앞엔 교감선생님과 부장 선생님이 서 계셨다. 한 손엔 누런 봉투. 현관에 서서 봉투를 내미신다.

해임통지서.

이건 그동안 상상해낸 장면과 너무 다르다. 10월부터 늘 이런 식이다. 조금 더 견뎌내기 위해, 덜 상처받기 위해 난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해 뒀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 앞에 전개되는 건 늘 그 이상이었다. 많은 말을 쏟아냈던 것 같다. 나와 이 사람을 둘러싼 이 기묘한 공기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선.

"교감선생님, 저 그다지 다른 사람 아닙니다. 우린 그냥 아이들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 다른 것뿐이에요.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교감선생님 마음 할퀴려고 그러는 거 아니란 거 제발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학교를 떠나지만 전 정말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우리 조합원 선생님들, 그렇게 너무 상처주지 마세요. 모두 다 너무너무 열심히 하고 아이들 사랑하는 후배들이잖아요. 우린 그저 조금 다른 것뿐인데요. 제발 제발 알아주세요."

교감 선생님은 내일 학교에서 아이들 보는 건 어렵겠다고 하신다. 새 담임을 만나는 날인데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았으면 한단다. 새 담임을 맞을 시간은 있는데, 열 달을 고스란히 함께했던 우리 아이들과 내가 헤어지는 시간은 왜 주지 않는 거죠? 도대체 왜?

교감선생님은 이러니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교감선생님에겐 지금 이 순간도 내가 내 이야기만 하는 걸로 보이나 보다. 이것 또한 지침이라면, 난 또 부탁해야만 했다. 제발 마지막 정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짐싸는 것으로 하고 인사하고 나올 테니 모른 척하시라 했다. 이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17일, 교사가 아닌 신분으로 난 아이들을 만났다. 교문부터 막아서시는 교감선생님을 옆에 두고, 평소에 늘 출근하던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실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이들, 협동해서 다같이 꾸몄던 판화, 일하는 손 그림, 아기자기해서 모든 이가 부러워하던 내 책상, 모든 게 그대로인데 이제 이곳은 내가 설 곳이 아니라 한다. 밤새 머릿속에 뒤엉켜있었던 많은 말들 속에서, 겨우 몇 마디를 하는데도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은 복도에서 채근을 하신다. 아이들과 난 그냥 이렇게 헤어져버렸다.

아이들 보며 겉으로 웃었고, 속으로 울었다
다시 돌아온 농성장. 아이들의 문자메시지는 이어진다. '화이팅, 글로 갈게요, 어떠케 가요?, 선생님 곁엔 저희들이 있어여, 힘내요.' '오늘 급식 케익 나오는데, 저희 밥 먹어요 밥 드셨어요? 카레 나왔어요 카레 제일 싫어하는데, 이제 곧 수학경시봐요 응원해줘요.'

아이들이 곁에 있는 듯 나의 손가락은 핸드폰 위로 바쁘게 움직이고, 그렇게 아이들은 계속 내 옆에서 속삭이고 살아 움직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시교육청 앞까지 찾아온 아이들은 17일,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로 들려주고. 아이들은 촛불 문화제에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또 선생님이 유도해서 집회 나왔다고 사람들이 말할까봐, 그게 걱정이 되어 발언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보며 겉으로 웃었고, 속으로 울었다.

나에게 학교는 유리로 둘러싸인 성이다. 소통하고자 하지만,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내 목소리는 투명한 벽에 부딪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지금 난 그 유리벽 밖에 있다. 세상은 나와 아이들을 떼어놓았다. 아이들 졸업앨범에서 내 사진을 빼겠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다시 한 번 오열을 터뜨렸다.

그냥. 그냥 오늘(17일) 하루는 좀 많이 힘들다. 하지만 늘 그랬듯, 난 다시 기운을 차릴 거고 일어날 거다. 이 거리에 나와 함께 서있는 사람들과 내 앞에 가로막힌 벽을 부수고, 난 다시 우리 아이들을 만날 것이다.

08.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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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9 15:15   좋아요 0 | URL
공교육의 경쟁력을 제고하겠다고 약속한 이들.하지만 성추행 교사,학생을 구타하는 교사들은 솜방망이 처벌로 끝내면서 이런 일에는 서슬퍼렇게 나서가지고 무슨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건지...학교를 군사정권 때의 반공궐기 대회장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있나보죠.

로쟈 2008-12-19 23:31   좋아요 0 | URL
어차피 막가파식이니까요. 동료교사들이 얼마나 연대할지 개인적으론 궁금합니다...

Julio 2008-12-20 10:46   좋아요 0 | URL
제가 촛불에서 찾은 단어 '연대'란 단어 댓글 달아봅니다.
로쟈님이 말하시는 연대가 어떻게 될지....

식의주와 연계되면, 우리나라에선 어떤 식의 연대가 이루어질지...
저역시 금해지는군요!

갠적으로는 23일 하루라도 가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로쟈 2008-12-20 22:52   좋아요 0 | URL
암튼 여러 가지 방식의 모색이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