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번역을 말한다' 꼭지를 옮겨놓는다. 얼마전에 출간된 제임스 팔레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창비, 2008)에 대해서 역자인 김범 연구사가 번역 자체보다는 책의 의의에 대해서 평하고 있다(책은 올해의 번역서 후보로 꼽을 만하다). 예전의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2423535)에 보탠다. 

교수신문(08. 12. 11) 동아시아 지평에서 ‘柳馨遠(유형원)’ 조명 … 지나치게 차가운 ‘객체’의 시각

자연과 사회의 현상들을 나타내는 수많은 대칭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거의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며 兩價的(양가적)이다. 모든 연구에서 객관적 시각과 접근은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덕목이지만, 그것은 그 표현이 의미하듯이 주체가 아닌 객체의 관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런 관점은 감정적 편향이나 선입관에 휘말리지 않고 엄밀한 실증성과 합리성을 추구해 획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칠 경우 건조하고 차가운 탐색에 그쳐 그 대상을 넓고 풍부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질 수도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한국사 학자의 한 분인 故 제임스 B. 팔레 교수의 주저인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후기 1,2』는 조선후기사, 특히 실학을 중심으로 한 사상사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학문적 성과다. 지금부터 12년 전 출간됐을 때 이 책은 국내외 연구자들의 커다란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저자의 학문적 위상과 그런 저자가 20여 년 넘게 연구하고 집필한 필생의 역작이라는 사실, 웬만한 사전과 맞먹는 1천 3백 쪽에 가까운 압도적인 분량, 그리고 인간의 주요한 생활의 범주에서 문화를 제외한 정치·경제·사회의 거의 모든 양상을 포괄한 그 폭넓은 내용은 그런 현상의 주요한 요인이 됐다.

모두 6부 26장의 방대한 구성에서 저자는 신분·토지·군사·정치·경제 등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제도를 포괄하면서 그 연원과 당시의 상태, 문제점 등을 유형원의 사상과 면밀히 비교했다. 저자는 그런 제도들의 문제점에 처방한 유형원의 경세론을 상세히 검토하면서, 그것을 고립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실체로 파악하지 않고 당시 또는 전후의 여러 개혁안과 대비함으로써 그 독창성과 현실성과 한계를, 그러니까 그것의 정확한 역사적 위치를 比定(비정)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저자는 토지제도, 농업 생산, 상업과 무역의 규모, 화폐의 유통 상황 등 다양한 주제를 중국사와 일본사는 물론 서양사와 폭넓게 비교함으로써 그런 사안들에서 당시 조선이 도달했던 역사적 발전 단계를 파악했다.

즉 저자는 유형원의 사상과 조선후기의 상황을 다양하고 객관적인 비교 척도를 사용해 분석함으로써 그동안 다소 주관적인 관점에서 그 사상의 독창성이나 당시의 다양한 발전상을 주목하고 높이 평가한 국내의 연구와는 상당히 다른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는 유형원이 추구한 궁극적인 개혁의 목표가 경직된 근본주의적 태도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고대 중국의 제도를 복원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와 그를 계승한 일련의 학자와 그들의 사상적 성격을 근대지향적인 ‘실학’으로 파악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논리에 치중해 재구성한 역사상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저자의 결론은 그동안 구축된 국내 학계의 통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이런 핵심적 결론 외에도 특히 노비제 사회, 경영형 부농, 양반 및 훈구와 사림의 성격 등 다양한 주제와 관련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커다란 논란을 불러왔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측면은 이런 저자의 견해가 그 개인만의 시각이 아니라 해외 한국학계의 주류적인 경향을 종합해
대변한 것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과 강점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비교의 관점이다. 그 결과 이 연구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우선 각 주제에 대한 유형원의 경세론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그 전모를 밝혔으며, 그것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특히 토지·교육·노비제도에서 일정한 내부적 모순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군사제도·신분제도(종모법)·호포 부과 등과 관련해서 유형원과 송시열·김육·유계·이건명·이이명·박문수 등 당시 조정 신하들의 견해를 대비하면서 전혀 교류는 없었지만 상당한 공통점이 있었으며, 어떤 사안에서는 오히려 조정 신하들의 해결 방안이 더 효과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저자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유교적 경세론을 해석하는 태도를 극복”하려는 목표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이른바 실학자들이 지혜를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한 것이었다. 이런 그의 연구는 그동안 유형원의 사상을 개별적 주제에 치중해 살펴봄으로써 독립적인 특징을 밝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전모를 조망하는 데는 일정한 문제점을 가졌던 국내의 연구를 수정,보완했다는데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또한 완전히 상반된 부류로 생각되던 유형원과 조정 신하들의 논의를 비교함으로써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고, 나아가 해결책의 현실성과 효용성을 가늠한 부분도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 방대한 연구는 중요한 한계도 갖고 있는데, 그것 또한 지나치게 엄격한 비교의 기준과 관점을 적용한데서 발원했다고 판단된다.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의 주석’이라는 언명이나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으로의 회귀를 근본 목표로 삼았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尙古性(상고성)은 인간과 역사의 보편적인 특징의 하나다. 그러므로 유형원의 사상이 고대 중국의 제도를 복원하려는 기본적인 목표 아래 구축됐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정해야 하지만, 그것을 어떤 본원적인 한계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런 측면에 치중하기보다는 그런 원형을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절충하고 개선한 부분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더욱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아울러 비슷한 맥락에서 저자는 한 개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말대로 “유형원의 사상은 조선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그 시대와 관련된 제약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개인과 현실의 이런 膠着(교착)과 거기서 발생하는 제약들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하나의 전제다. 그러나 저자는 진보나 발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설정한 뒤 그것을 통과하지 못할 경우 그 사상은 철저하지 못하거나 논리적으로 상충된다고 비판했는데(특히 양반과 노비의 신분과 관련된 교육·토지·군사제도), 그렇게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는 철저한 개혁안은 오히려 그 급진성만큼이나 비현실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 또한 매우 복잡한 현실과 제도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고 고민한 끝에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좀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보통 서너 줄에서 길게는 열 줄에 이르는 지독한 만연체와 몇 번씩 중첩되는 관형구로 이루어진 문체와 무관하지 않은 결과겠지만, 이 방대한 저서에서 어떤 부분(특히 제6부)은 좀 더 압축적으로 서술했다면 더욱 입체적이고 탄력적인 연구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끝으로, 이 저서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된 부분은 11세기 이후 고려와 조선은 노비가 전체 인구의 30퍼센트를 넘은 노비제 사회였다고 규정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조선 사회의 성격에 관련된 이런 논의는 이 책의 본격적이며 핵심적인 주제라기보다는 신분 문제에 대한 유형원의 사상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다소 선언적인 규정으로 판단된다. 또한 그 단어가 주는 이질감을 접어두면, 양반과 노비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므로 그것은 양반의 지배력이 그만큼 강고한 사회였다는 논리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됐다.

이 책을 옮기면서 객관적 기준과 수사적 표현이라는 문제를 많이 생각했다. 길고 먼 시간과 공간의 격절을 뛰어넘어 이렇게 치밀하고 방대한 연구를 진행한 저자의 학문적 열정과 성과는 분명히 경의를 보낼 만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전체적으로, 때로는 지나치게 건조하고 차가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크다고 볼 수 없는 대상을 ‘크다’고 표현하는 것은 왜곡이며 과장이다.

그러나 그것을 ‘크지 않다’거나 ‘작다’거나 ‘왜소하다’고 지칭하는 것은 왜곡이나 과장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자신이 연구하는 대상을 반드시 사랑하거나 긍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건조하고 차가운 ‘객체’의 시각과 수사 또한 그 실체를 파악하는데 적절치는 않을 것이다.(김범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08.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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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국사학'계는 역사학을 애국심 고취의 시녀로 떨어뜨리는 짓 그만하고 이런 학자들의 저서를 정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사실 실학은 지나치게 그 근대성이 과장되었기 때문에 이런 냉정한 평가를 통해 식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그리고 우리나라 내재적 발전론자들은 실제로 제임스 팔레의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그의 학설만 대충 추려서 비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로쟈 2008-12-14 21:49   좋아요 0 | URL
겸사겸사 국사학계가 이들 해외 한국학에 견주어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업적은 무엇인지 궁금하더라고요. 혹시 아시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5 00:17   좋아요 0 | URL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삼인 에 나온 미국과 한국의 한국학 전공자들의 논문을 읽어 보세요.거기에 논문 쓴 카터 에커트와 마이클 로빈슨이 팔레 제자에요.

로쟈 2008-12-15 00:22   좋아요 0 | URL
네, 그렇군요. 한데 궁금한 건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한국학자들의 업적이 무엇인지 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5 00:36   좋아요 0 | URL
내재적 발전론자 중 팔레나 에커트가 대결하려고 했던 경제사학자는 조기준입니다.일본의 내재적 발전론자인 가지무라 히데키도 조기준 학설을 연구했지요.한국학의 하버드 학파인 에드워드 와그너와 함께 연구한 송준호는 비교적 해외에도 알려져 있습니다.<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에 논문을 쓴 마이클 신은 코넬 대학에 있다가 올해 국내대학에 왔다고 하던데요.

로쟈 2008-12-15 00:43   좋아요 0 | URL
조기준 선생(1917-2001)에 대한 소개가 이렇군요. "1942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상학부를 졸업했으며, 1955년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년 독일 베를린대학교 객원교수, 1956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1957년 한국경제사학회 회장, 1959·1975년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학장, 1970~82년 국사편찬위원, 1982~91년 한양대학교 대우교수, 1985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등을 지내면서 한국 경제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14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레의 제자 중 20대들에게도 알려진 한홍구 씨는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반론할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8-12-14 21:50   좋아요 0 | URL
한교수도 팔레 문하인가요? 잭슨스쿨에 유학했던 모양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12-15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레가 워싱턴 대학 교수라서 거기에 유학 갔어요.<한홍구의 현대사 다시 읽기>라는 책에 보면 추모의 글에 팔레의 학자로서의 면모가 잘 나와 있어요.

로쟈 2008-12-15 00:23   좋아요 0 | URL
워싱턴대학의 잭슨스쿨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12-15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거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