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교수의 칼럼 두 편을 읽었다. '한국 지성의 죽음'과 '노숙자 인문학강좌'를 소재로 하는데, 둘다 오늘 읽은 것이어서 한데 묶어보았다. 나름대로 말이 되는 듯싶어 제목은 '지성의 죽음과 노숙자 인문학'이라고 붙였다. 그때 '지성'은 '한국 지성', 더 좁히면 '한국 대학의 지성'을 뜻한다. 그 지성의 죽음을 비분강개하는 필자의 어조가 조금은 장황하게 여겨지지만 "전공학과의 입문 수준을 비빔밥처럼 섞은 현재 교양교육의 전면적 부정 위에 자유인을 양성하기 위한 전인적, 학제적 교양교육으로 전면 개혁"해야 할 필요성에는 공감하기에 옮겨놓는다(한국 대학의 반지성적 풍토에 대한 일갈도 후련하다).  

교수신문(08. 12. 01) 한국 지성의 죽음,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지성의 죽음’이란 이 글의 제목은 주말 잠결에 부고처럼 나에게 찾아왔다. 무심코 받았다가 눈을 부비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기껏 ‘나의 죽음’뿐이다. 물론 내가 한국 지성의 대표는커녕 지성 축에 끼인다고도 절대로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 지성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이 글은 그런 이유로 내가 지성이라는 가정 하에 쓰는 지극히 서글픈 개인적 유서 같은 것에 불과하다. 나 자신을 지성이라고 말하기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음은 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는데, 지성을 ‘권력과 자본을 위시한 모든 권위와 압력으로부터 독립한 자유로운 아웃사이더 아마추어 자유인-교양인-全人의 심성과 실천’이라고 보면 더욱 그렇다. 지성을 이와 다르게 정의하는 예도 많지만 이 글에서는 그렇게 정의하도록 하겠다. 이는 그 지성의 개념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매우 특별한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개인적인 독백이기 때문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지성의 개념에 따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지성이 있는가. 그런 지성이 있었다가 죽었는가. 아니면 애초부터 없었고 지금까지도 없는가. 적어도 나는 그런 지성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지만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자 한다. 가장 원시적인 혈연, 지연, 학연과 폐쇄적인 전공의 장벽으로부터 벗어나기도 너무나 힘든 오늘의 대학과 학계와 사회에 사는 전문가란 뜻의 직업인인 교수 신세지만 말이다. 그래서 흔히들 오늘의 우리 지성에 대한 특별한 위협이 권력과 자본, 대학을 비롯한 학문기관과 저널리즘의 가공할 상업주의라고 하는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사뭇 부끄럽다. 나 자신 그런 상업주의 속에 살고 있고 그런 상업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싸움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이후 상업주의는 더욱 거세어져 전체주의를 방불케 하고 있어도 나는 여전히 그렇다. 그런 상업주의 대학이 싫으면 아예 그곳을 떠나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비겁한 탓인지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상업주의에 반하는 지성을 말하려는 지금 나의 그런 직업적 제약이 치명적 약점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서글프고 부끄럽지만 조금이라도 노력할 수밖에 없다.

사실 대학을 비롯한 소위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곳들은 처음부터 상업주의의 지배를 받았고 그 자체가 상업주의에 의해 운영돼 왔다. 학생 머리수를 돈으로 센다는 사립대학은 물론이고 국공립대학도 지성의 산실이 아니라 취업학원이 된 지 오래다. 이러한 상업주의는 국가 주도의 관료주의 교육정책과 야합해 국가적 정통성마저 부여받는 천박한 관제전문가를 양산하고 있다. 그런 대학에 권력과 자본 등의 모든 압력으로부터 독립한 자유로운 아웃사이더 아마추어 지성은 존재하기 어렵다. 우리의 대학현실은 너무나도 反지성적이다. 독재적인 족벌 이사회나 시간강사의 노예적 처지나 교육의 계급화를 초래하는 과도한 등록금 문제를 포함한 대학경영의 수많은 원시적 문제점들이 최소한의 합리적인 상업주의라는 측면에서도 해결되지 못해 지성의 최저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업주의의 제도적 측면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은 정신적 상업주의인 전문주의다. 이는 지성의 참된 敵이 우리나라에서 지성이라고 흔히 말하는 전문가의 절대교리인 전문주의 자체이므로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우리 지성의 척도라고 하는 현 교육제도 하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좁은 전공 지식 영역에 갇혀 전공 분야라는 직접적 관심사 밖에 있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게 되며, 전인적인 교양을 철저히 희생시켜 특정한 권위나 규범적인 생각에만 영합하도록 만든다. 전인적 교양 없이 오로지 권력에 봉사하도록 교육된 전문가는, 철저히 비판적이고 왕성한 독립정신으로 분석과 판단을 내려야 하는 지성이 아니라 도리어 그 적이므로 그런 전문주의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전문가가 또 다른 유사 전문가를 양성하는 현 대학제도는 지성의 전당이나 산실이 아니라 지성의 적이자 지성의 무덤이다.

이러한 상업적 전문주의는 수많은 반지성적 행태들, 즉 이기적 출세만을 위한 이익과 권력에 대한 계급적 집착, 연고주의에 뿌리박은 집단적 이기주의, 사회적 책임의 포기와 철저한 무관심, 정치적 위험을 의식한 고의의 침묵과 민중 무시, 개인보안과 비판 부재, 애국주의적인 호언장담 횡행, 철저한 자기 규제와 현실도피,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사상의 불모, 사대적이고 추상적인 유행 외국 학문에 대한 피상적 의존, 개성의 부재와 획일화, 회고적이고 스스로 연극화하는 변절 등등 지성의 죽음을 초래하는 현상들을 끝없이 낳고 있다. 무비판, 무책임, 무현실, 무사상, 무개성, 무지조, 무품위 등등의 각종 無의 행렬이나, 반사회, 반민중, 반민족, 반인류, 반인간, 반생태, 반인권, 반현실 등등의 각종 反의 행렬이 지금 우리 지성의 죽은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지성이란 본질적으로 반권력적이고 비판적인 것이다. 지성은 근본적으로 결코 안이한 공식 견해나 기성의 상투적 표현, 권력이나 전통의 무조건적 추인을 거부하는 비판정신이다. 이는 언제나 정부 정책을 비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해 끝없이 경계하고 거부하는 태도 자체를 뜻한다. 특히 지성은 그 일상생활의 측면에서도 그 어떤 권력이나 권위와의 유착을 거부하고 그것을 위한 어떤 연고주의와도 단절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이른바 지성이란 오로지 지연, 혈연, 학연 등을 통해 지성계의 보스나 권위자의 승인을 얻으려하고, 철저히 폐쇄된 전공의 장벽에 숨어서 자기 보안을 일삼으며, 균형과 객관성과 온건성이 지성의 척도라고 보는 허위의 보수적 평판 척도를 유일한 가치인양 수호하고 있다.

이러한 반비판적인 풍토에서는 어떤 창조적 지성도 나올 수 없다. 그들의 희망은 자기 전공분야에서 국내외 저명학술지에 전문가들만이 보는 논문을 많이 실어 명성을 쌓고 돈까지 벌며, 대학의 총장을 위시한 각종 보직을 갖거나, 회사 임원이나 정부 각료의 일원이 돼 주류 지배계급에 속하는 것뿐이다. 그런 명성과 직위가 지성의 척도이자대명사로 통하는 우리 지성계라는 천박한 반지성의 공간에서 참된 지성은 소외돼 있다. 물론 그 소외는 그렇게 출세하기를 꿈꾸다가 실패한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벼락출세한 자들이 한국 최고의 지성이니 하고 뽐내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함도 패자의 콤플렉스 탓일지 모른다.

명색이 지성이라는 자들이 부끄러움조차 아예 모르니 최소한의 품위가 있을 리도 없다. 남녀노소 모두 당연한 먹이인 양 서서 집어먹는 시식코너처럼 주위의 사소한 이익까지도 허겁지겁 집어삼키고 권력을 쫓아 철새처럼 방랑한다. 나라를 망쳤다고 폐기처분된 옛 지성 중에는 그래도 그렇게 품위 없이 살지는 않았고 자결한 선비도 있었다 하나, 선비가 사라지고 대신 등장한 전문가는 품위를 아예 상실한 상업적 욕망의 덩어리일 뿐이다. 물론 옛 선비 대부분도 권력과 부를 향한 과거시험의 노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외국 책들을 신주 삼아 외제 지식을 과시하는 점도 고금의 전문가가 너무 닮았다. 우리의 전문가는 그런 광신자이기는 해도 자신의 사상은 없는 점에서 죽기커녕 아직 태어난 적도 없다. 丹齋 말처럼 유사 이래 온갖 동서양 사상의 신을 모셔왔지만 자기 사상은 없다.

이런 무사상을 부끄러워하기커녕 자신의 전공 외국 지식 신들이 절대적이라고 떠벌리고, 그런 미명으로 실제의 목표인 권력과 부를 쫓는 꼴도 유사 이래 변함이 없다. 그 모든 종교 신이나 지식 신이나 우리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는 점도 같다. 이런 식민지적 절대주의 광신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학문이 패션처럼 외국 유행의 사대주의에 젖어 추상화되고 피상화되며 노예화되는 한 그런 광신은 끝나지 않으리라. 이러한 반지성의 풍토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자본을 위시한 모든 귄위와 압력에 대한 여러 가지 심층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전인적 교양의 지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만 강조하기로 하자.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대학을 지성의 공동체로 만들어보고자 지난 30년간 몸담은 법학부를 떠나 교양학부로 옮겼다. 내가 경험한 법학부란 반지성적인 전문주의 교육체제의 전형이었는데, 그것이 다시 더욱 계급화된 전문주의 교육체제인 로스쿨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밥학’이라고도 하는 출세 지향의 법학, 어용학문이니 암기수험기술이니 하는 법학을 30년이나 하면서 나는 전인적인 교양의 회생이 대학은 물론 지성의 회생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절감했다. 물론 그것은 전공학과의 입문 수준을 비빔밥처럼 섞은 현재 교양교육의 전면적 부정 위에 자유인을 양성하기 위한 전인적, 학제적 교양교육으로 전면 개혁하는 것을 뜻한다. 전문주의 장벽은 너무나도 높아 어떤 교양교육 개혁의 시도도 결코 쉽지 않지만 대학을 권력과 자본을 위시한 모든 귄위와 압력으로부터 독립한 자유로운 아웃사이더 아마추어 자유인-교양인-전인의 공동체로 만들지 않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상업주의와 출세주의와 기회주의 따위에 젖어 거미처럼 사방에 발을 뻗치면서도 정작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현실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문가만이 있기에 아예 지성을 거부하고 지성에서 해방되자고 역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권력과 이익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파악과 개혁에 대한 열정으로 분열된 전문 전공의 장벽을 가로질러 보편적 사상을 추구하는 유기적 교양 전인의 심성이자 실천인 지성은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 극도로 편향된 권력에 아첨해 타락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전공의 장벽을 뛰어넘어 학제적인 비전문의 전인적인 교양의 지성은 살아야 한다. 나는 지성이 인류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식의 헛소리를 할 생각은 추호도없지만, 그것을 잠결에 날려버릴 정도로 무가치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이 글을 썼다. 혹시 자기 지성의 죽음에 대해 나처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하소연하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경향신문(08. 12. 04) [박홍규 칼럼]노숙자 인문학강좌

어제, 올해 마지막 노숙자 인문학강의를 했다. 괴상망측한 우익 역사교육 소동으로 시끄러운 탓만은 아니었지만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제로 관련 영화와 예술작품들을 함께 보았다. 북한 배경의 007영화에 동남아의 집과 물소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처럼 함께 웃은 것을 시작으로 서양의 동양침략을 정당화한 수많은 영화나 그림들을 노숙인들은 정확하게 보고 비판했다. 그 대부분은 그들이 생전 처음 보는 것임에도 그러했다. 아는 만큼 본다고? 아니다. 보는 만큼 안다. 아니다. 아는 게 중요하지 않다. 이해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여러 인간, 계급, 민족, 나라들이 서로 이해함이 중요하다.

올봄, 그 강의를 의뢰받자마자 즉시 수락한 것은 1970년대 노동야학 이후 그런 수업이 가장 즐거웠기 때문이다. 물론 돈 없이 말이다. 최근 수강료가 1000만원이 넘는 CEO 교양강좌 같은 것이 유행하고, 소위 우익만이 아니라 좌익이란 사람들까지도 엄청난 강사료를 받으며 그곳에서 CEO들을 가르친다고 화제지만, 교양이란 게 유한 지배계급의 특권적 사치로 타락한 게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게다가 교양 있는 좌우익이 함께 노닌 것도 어제오늘인가. 그래서 노숙인들은 ‘무식하기’ 이전에 ‘흉측한’ 사람들이고, 그런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에게는 철학할 기본적 능력이 없으니 그런 강의는 무익하며 기껏 허황된 자기만족을 부추길 뿐이라고 냉소한 진보적 철학자도 있었다. 특히 최소한의 논리적 능력이 있어야 인문적 사유가 가능하고 그 능력이란 여유에서 나오는 것인데, 삶의 여유가 전혀 없는 그들에게 논리나 사유는 아예 있을 수 없고, 그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고문이라고도 했다.

서로 이해하는 마음이 교양
나는 물론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교재 선택은 고민이었다. 지난해 서울에서 비슷한 강의를 주최한 사람들에게 의뢰받은 강의가 몽테뉴여서 비슷한 고전을 검토하기도 했지만 마땅치 않았다. 그런 강좌의 원조라는 미국인은 교도소에서 플라톤을 강의한다지만 나에게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철학자 왕의 독재를 주장한 자에 불과했다. 그 미국인도 CEO 교양강좌를 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우리 노숙인들에게 플라톤은 물론 어떤 서양인에 대해서도 강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겨우 한 시간 강의를 위해 한 달 이상을 고민하기는 생전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은 것도 처음이었다. 최소한 그들에게 도덕 설교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반성, 회개, 근면, 공부, 직장, 가족, 부모 따위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첫 시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만나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과 세상을 알고 아름다움을 느끼니, 문학자, 철학자, 역사가,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문학, 철학, 역사, 예술을 할 수 있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해야 그것이 비로소 가치 있는 우리의 인문학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 30분 질의응답 시간은 30년 대학수업 전부보다 훨씬 열띤 분위기였다. 이렇게 각자 생각을 말하고 그 사이에 남의 생각을 자기 생각과 비교하면서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으면 고쳐 하나의 결론에 이르거나, 또는 그렇지 못해도 남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임에 모두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인문학자다-우리 모두 철학자고, 문학자고, 역사학자고, 예술가로서, 책을 통해 말하는 것은 참된 인문학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토론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끝말에 나 스스로 흥분하면서 강의를 마쳤다.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마침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문제를 잘못 찍었다는 둥, 교수가 외우라고 줄쳐 준 것을 잊었다는 둥, 스펠링을 잘못 썼다는 둥 쌍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조금 전 만났던 노숙인들과는 전혀 다른 우리의 대학생들. 그 암기시험과 욕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오로지 암기만으로 시험을 치르고서는 곧 망각하게 하는 우리의 교육. 그리고 그 기계적인 허무함에서 나오게 마련인 욕지거리. 이런 것을 위해 최소한의 여유와 논리능력이 필요하다고? 아이들을 저렇게 기계화시키고 그 결과로 오로지 욕설밖에 못하게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대학이니 교육이니 교양이니 학문이라고?

암기를 학문이라 가르치는 대학
그런 교육을 시키는 자들은 그런 기계적인 짓을 그렇게 멋지게 교육이니 교양이라 치장하고 부와 명예와 권력까지 쥐고 살면서 자신처럼 돼라고 치열한 경쟁을 요구한다. 게다가 이제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며 남을 이해하는 인문적 사고와 전혀 무관하게 철저히 남을 지배하는 보수골통 CEO로 살아온 자들이 언론과 방송을 위시한 문화, 그리고 역사교육까지 쿠데타처럼 점령하고 있다. 그들이 정치나 경제를 지배하는 이상으로 문화와 교육을 지배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일이다. 문화와 교육, 인문과 교양, 학문과 예술은 그런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박홍규 영남대교수·법학)

08. 12. 04.

P.S. "우리 모두 인문학자다-우리 모두 철학자고, 문학자고, 역사학자고, 예술가로서, 책을 통해 말하는 것은 참된 인문학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토론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끝말에 나 스스로 흥분하면서 강의를 마쳤다."는 대목에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책은 이번에 출간된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궁리, 2008)이다.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이 그 부제다. 흠, 이 '지적 해방'의 문제에 대해서 뭔가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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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2-05 10:52   좋아요 0 | URL
<노동법>보다 더 두꺼운 THE LEFT가 눈에 띄네요. 나원 책을 저렇게 두껍게 만들어서야

로쟈 2008-12-06 09:52   좋아요 0 | URL
독서용이라기보다는 장서용에 가깝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05 17:24   좋아요 0 | URL
저는 지금도 초중고교 때 참고서 교과서 문제집만 읽다가 성인이 된 게 억울해 죽을 지경입니다.그런데 요즘은 아예 고등학교 1학년부터 저녁늦게 잡아두니...그래도 제가 학교 다닐 땐 2학년까진 6시 안에 끝났는데요.

로쟈 2008-12-06 09:55   좋아요 0 | URL
밤 9시까지의 '야자'가 기본이었죠. 요즘은 심야학원에까지 다니니까 돈 주고 몸 망치는 게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