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기사 몇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지난 주말에 한국학술단체협의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와 관련한 기사가 두 편이고, 거기에 덧붙인 건 피아니스트 강충모 교수의 인터뷰 기사이다. 학단협 20년에 대한 회고의 주조음이 '뼈저린 반성'인 것이 이채롭다(관심을 끄는 발표주제들이 있어서 홈피의 자료실을 찾았더니 고작 서너 편의 발표문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역시나 반성은 말뿐인 듯싶다). 대저 학문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더불어, 이 학문/예술과 삶, 그리고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본다. 개인적인 스크랩이지만 혹여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 더 계실까봐 '공개'로 해놓는다...  

한국일보(08. 11. 06) 2008년 한국사회 진보의 자기반성

2008년 한국 사회에서 '진보'란 어떤 목소리일까. 한국학술단체협의회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21세기 진보와 진보학술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연합 학술대회를 7, 8일 건국대에서 연다. 학단협은 6월항쟁의 열기가 남아 있던 1988년 진보적 학술단체들이 결성한 협의회로, 현재 26개 단체 5,000여명의 회원들이 '학술활동을 통한 사회 민주화'를 목표로 각종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번 대회는 신자유주의의 전지구적 확산과 국내 보수정권 출현이라는 환경 속에서 진보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마련됐다. 두 편의 발표 논문을 통해 2008년 오늘, 진보의 목소리를 미리 들어본다.

김범춘 건국대 강사(철학)의 발표문 '지연되는 미래와 진보 철학'은 진보의 뼈저린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진보는 때때로 악수를 두는 멍청한 보수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갖고 있는 '저항'이라는 낡은 콘텐츠마저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방적 콘텐츠로서 진보가 행사하던 이론적 우위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진보는 진보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콘텐츠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진단했다. 그는 "이 처참한 현실을 메우기 위해 이론의 과잉은 불가피"하지만 그렇게 끌어들인 레비나스, 로티, 벤야민, 들뢰즈도 제대로 소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실에 맞는 레시피(조리법)도 없이 그저 번역하고 세미나하고 논문 쓰고 토론한 결과, 진보적 지식인은 새로운 지식의 홍보전문가이거나 출판전문가로 변신했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김재현 경남대 교수(철학)는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장을 위하여'라는 발표문을 "민주주의가 갖는 문제에 대한 처방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라는 존 듀이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시대정신이 따로 있고, 진보진영의 시대정신이 따로 있는가"라고 물은 뒤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미성숙한 것"이라고 스스로 답한다. 그리고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사회권, 인정투쟁, 민주주의 등의 개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진보, 개혁의 위기는 민생의 위기이고 민생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은 민주주의의 확장을 통해 해결 가능한 것으로 본다. 비정규직, 소수자 인권, 실업자 생존권 등의 문제를 들며 이것이 아직 남아 있는 '반민주 대 민주'의 전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는 최장집 교수의 말을 다시 인용하며 끝을 맺었다.(유상호 기자)

한겨레(08. 11. 06) 학단협 20돌 ‘학술운동 제도권화’ 자성 목소리

국내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연구단체의 협의기구인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가 창립 20년을 맞았다. 1988년 11월 한국산업사회연구회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정치연구회 등 10개의 진보적 학술단체가 모여 출범한 학단협은 “연구와 학술 활동을 통해 사회 민주화에 이바지한다”는 정관이 말해주듯 학술 ‘운동’ 단체로서 실천적 지향이 뚜렷했다. 이론을 매개로 현실을 비판하는 ‘이론적 실천’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적 이론’을 안출하려 했고, 일부는 그 이론을 들고 현실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 학단협 안팎에선 “학술운동이 제도권 내부의 ‘교수운동’이 되어버렸다”거나 “운동의 정체성을 잃고 국가기관의 ‘협치’(governance) 파트너로 전락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서유석 학단협 상임대표도 “학술운동이 상당 부분 ‘제도권 학회’의 연합운동으로 축소된 측면이 있다”고 인정한다. 핵심 회원단체들이 정부 지원을 받는 제도권 학회로 자리매김되고, 연구활동 역시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이나 학술진흥재단(학진)의 등재지 기준에 따라 규율되면서 지식생산 역시 특정 방향으로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88년 문학예술연구소 회원으로 학단협 창립에도 참여했던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만드는 사람)는 이런 현상을 ‘학문의 국가종속’이란 관점에서 비판한다. 그는 “종속은 두 가지 형태로 이뤄졌는데, 하나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연구자들 일부가 통치시스템에 적극 가담하는 형태였다면, 다른 하나는 학술진흥기금을 매개로 학술활동이 정부 통제체제에 편입되는 방식이었다”며 “두 가지 모두 학문 자율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활동하는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학술운동’이란 명칭 자체에 회의적이다. 이 교수는 “연구자 대부분 대학에 자리를 얻고, 단체들 역시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학단협은 제도권 안에서 공식 지분을 가진 ‘좌파 학계’가 됐다”며 “특히 학술지를 운영하거나 학진의 심사에 참여하는 좌파 연구자들의 행태는 과거 그들이 비판했던 우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꼬집었다.

90년대 중반 산업사회연구회 활동을 통해 학단협과 인연을 맺은 신진욱 중앙대 교수도 “진보 학술지들이 학진의 등재(후보)지가 되면서 연구자들에게 표준화·획일화된 글쓰기가 강요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게재 기준을 충족시키려다 보니 대중과의 소통 지점은 좁아지고, 운동에 대한 실천적 고민도 약화되는 문제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학단협 안에서도 자성과 쇄신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2003년 상임대표를 지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학술운동이 외부 권력과의 싸움은 중시하면서도 내부의 제도·문화·관행을 개혁하는 데는 소홀했던 게 사실”이라며 “우리 스스로를 권력대상으로 성찰하지 않는 한 운동의 발전은 없다”고 진단했다. 조 교수는 8일 열리는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와 함께 △탈국가·생태·여성주의 시각의 내재화 △복합적 신계급담론의 정교화 △제도권·비제도권의 경계 허물기 △학벌주의·학진 질서 타파 △신자유주의적 지식생산 규칙의 극복 등을 진보 학술운동의 과제로 의제화할 계획이다.

80년대 초반 김진균·변형윤 등 해직교수들을 중심으로 분과학문별 소규모 연구그룹이 생겨난 뒤 대학원생·사회운동가를 주축으로 세를 규합해간 학술운동은 88년 6월 서관모 충북대 교수의 논문에 대한 검찰조사에 공동 대응하는 과정에서 상설 협의체인 학단협을 탄생시켰다. 현재 26개 단체 5000여명의 연구자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매년 한 차례의 연합 심포지엄을 열며, 수시로 사회 쟁점과 관련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이세영 기자)



경향신문(08. 11. 10) 피아니스트 강충모 “클래식의 대중화? 그건 난센스”

피아니스트 강충모(48·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참 ‘미련한’ 사람이다. 서울이 월드컵 열기로 한창 뜨겁던 2002년 초여름, 그는 바흐의 피아노 음악을 암보(暗譜)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바흐의 느리고 차분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월드컵도 중요하지만 나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었다.

그의 고집스러운 행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바흐 전곡 연주’를 펼친 그는, 곧바로 해설과 연주를 병행하는 ‘렉처 콘서트’를 시작했다. 이 또한 5년 계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이달 15일에 마침내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6일 서초동에서 만난 강충모는 “이제 좀 지쳤다. 앞으로 4~5년 연주를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두 가지 문제를 풀어보려고 렉처 콘서트를 시작했지요. 피아노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악보만 들여다보는 게 답답했어요. 음악은 오선지 속에만 들어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해야 하고, 왜 그 곡을 작곡했는가, 담겨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등등, 악보의 이면(裏面)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죠. 또 하나의 동기는 ‘클래식 대중화’라는 구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죠. 제가 9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당시 한창 인기있던 <열린 음악회>를 보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클래식을 ‘대중화’한다는 발상 자체가 난센스 아닙니까? 대중화라는 말만 앞세우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클래식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방식이죠.”

그는 “한국의 음악문화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외국 연주자들이 내한해 한국 청중을 우습게 보는 연주를 펼치는 걸 심심찮게 본다”면서 “그 무성의한 연주를 지켜보노라면 같은 연주자로서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또 “허명(虛名)뿐인 연주에 청중이 열렬히 기립박수를 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도 했다.

제가 한창 바흐를 연주하고 있을 때, 외국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한 분이 내한했어요. 저도 그 콘서트에 갔었지요. 그 사람이 연주할 곡도 바흐였거든요.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이었어요. 상당히 기대를 하고 갔었는데, 연주가 아주 무성의한 겁니다. 심지어 펼쳐놓은 악보를 군데군데 건너뛰면서, 그야말로 ‘대충’ 하더라고요. 한국 청중을 너무 ‘쉽게’ 본 거죠. 또 어떤 연주회에서는 중간에 그냥 나와버린 적도 있어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문제 많았던 연주에 청중이 열광하더라고요.”

한국의 연주회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일부 청중의 키치(Kitsch)적 태도. 강충모는 신분이나 교양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음악회장을 찾아오는, 속물적인 ‘문화 귀족’들에게도 일침을 놨다. 그는 “입장료가 비싼 연주회일수록 그런 청중이 많다”며 “콘서트홀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교장으로 변질돼선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연주자를 꿈꾸는 후학들에게는 ‘해석의 깊이’를, 콘서트홀을 찾는 청중에겐 음악에 대한 ‘이해와 견해’를 갖게 해주고 싶어서 5년간 렉처 콘서트를 이끌어왔다는 강충모. 그는 ‘인투 더 클래식’이라고 이름붙인 이 장기 프로젝트를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마감하면서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대곡(大曲)으로 꼽히는 ‘21번 B플랫장조 D.960’, 베토벤 후기의 초탈한 음악성을 대변하는 ‘소나타 32번 c단조’, 쇼팽이 작곡한 3곡의 소나타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3번 b단조’ 등이다. 3곡의 공통점은 세 작곡가의 마지막 소나타라는 점. 그래서 연주회 이름도 ‘마지막 소나타’로 붙였다. 특히 베토벤의 소나타 32번은 강충모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라며 애착을 표하는 곡이다.

그는 “죽을 때 가져가고 싶은 음악이 있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있다”고 답했다. “어떤 곡이냐?”고 묻자, “베토벤의 32번, 말러의 ‘대지의 노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2악장”이라고 답했다.(글·문학수 선임기자)

08.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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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1-11 09:20   좋아요 0 | URL
^^ 콘서트홀이야말로 '과시적소비'를 가장 세련된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공간 중에 하나일겝니다. 강충모가 좋아하는 곡은 저도 좋아하는 음악들이네요. 가을 요맘때는 중국 한시에 곡을 붙인 말러의 '대지의 노래'가 귀에 잘 들립니다.

로쟈 2008-11-12 00:53   좋아요 0 | URL
청중들의 키치적 태도 못지 않게 문제인 건 공연비평 같습니다. 좋은 공연과 부실한 공연을 가려주는 비평문화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다면 허술한 공연이 발붙이기 어려울 듯싶은데, 사정은 그렇지 못한 듯해서요...

수유 2008-11-11 09:44   좋아요 0 | URL
슈베르트 D.960은 이 계절하고도 아주 잘 어울리죠..저도 좋아하는 곡들입니다.
나이들면서 슈베르트의 곡들의 어떤 진정성들이 와닿아요..
별 관련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콘서트홀의 '키치적 행태'야 익히 보아온 것들이고..그래도 요즘 많이 나아진것 같기도 한데
뭐 그렇습니다.

로쟈 2008-11-12 00:56   좋아요 0 | URL
공짜표 청중과 '문화 귀족' 없이도 고급 공연문화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1-11 16:35   좋아요 0 | URL
학단협...가물가물 기억나는 단체...한나라당이 재집권했으니 예전 군사정권 때처럼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로쟈 2008-11-12 00:51   좋아요 0 | URL
별로 기대가 가지는 않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