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철학아카데미 원장'이란 타이틀로 소개되는 '재야 철학자' 이정우 씨의 신간 <천하나의 고원>(돌베개, 2008)이 출간됐다. 이미 예고돼 있던 책이라(http://blog.aladin.co.kr/mramor/2126438 참조) 놀랍지는 않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얇은 책이다(이번주에 눈에 띈 책들 가운데 가장 얇다). 제목이 얼핏 시사해주는 것처럼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저자의 표기로는 <천의 고원>)에 대한 '읽기'이다. 한데, 그 점이 명시돼 있지는 않다. 머리말도 없이 다짜고짜 본문으로 들어가서는 "<천의 고원>은 개념적 콜라주이다."란 문장으로 시작할 따름이다. 짐작에 책은 "<천의 고원> 읽기의 개념적 콜라주"로 정리할 수도 있겠다. 들뢰즈 관련서에 대한 서평을 준비하고 있어서 결들여 빨리 읽게 될 듯하다. 일단 한겨레의 리뷰를 옮겨놓는다(지난주에 이어서 이번주에도 고명섭 기자가 어떤 책을 다룰지 알아맞혔다)...

한겨레(08. 10. 25) 들뢰즈의 ‘탈주’는 소수자를 향한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새 저서 <천하나의 고원-소수자 윤리학을 위하여>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사진)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천 개의 고원>(1980)의 해설이자 보충이다. 책의 제목이 ‘천하나의 고원’인 것은 <천 개의 고원>의 주요 개념을 그의 관점에 따라 충실하게 설명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책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함으로써 하나의 고원을 덧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새로 배치된 고원이 이 책의 부제에 담긴 ‘소수자 윤리학’이다. 윤리학(에티카)의 관점에서 <천 개의 고원>을 다시 읽은 것이 이 책인 셈이다.

들뢰즈의 관심은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와 같은 전기의 순수 이론철학에서 가타리와 함께 작업한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과 같은 후기의 실천적 사회철학으로 옮겨갔다. 특히 <천 개의 고원>은 들뢰즈 사유의 물줄기가 모두 모여들어 넘실대는 저수지와 같은 저작이다. 전기의 존재론적 사유가 저류를 이루고 그 위에 사회철학적 사상이 난만하게 꽃핀 연못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천하나의 고원>은 <천 개의 고원>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 존재론에서 윤리학으로 설명을 진전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들뢰즈의 존재론과 윤리학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이 드러난다.

지은이가 <천하나의 고원>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천 개의 고원>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야구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야구는 야구장에 심판과 선수가 모여 공과 글러브와 방망이를 들고 하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야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야구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양식은 ‘차이생성’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의 운명인데, 이 차이생성의 일시적 응결 형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이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이 ‘되기’의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이제 윤리학적 사유가 펼쳐진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되기론은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다.” ‘흑인 되기’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장애인 되기’가 되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하루 감옥 체험’이나 ‘시각장애인 체험’은 이 되기의 극히 작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토대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명섭 기자)

08. 10. 25.

P.S. 개인적으로 특이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한국 지식사회의 '들뢰즈 열풍'이다. 다른 철학자들과 비교하면 유례가 드물 정도로 단 기간에 대부분의 책이 번역되었고 각기 다른 목소리이긴 하지만 '들뢰즈 합창'이 여기저기서 울려퍼졌다. 주요 개념들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번역도 제각각이어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 '들뢰즈'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지만('Guattari'의 표기만 하더라도 '가타리' '거타리' '가따리' '과타리' '구아타리' 등 제각각이다), 한가지 열풍이 다른 열풍으로 넓어지고 깊어진다면 말릴 이유는 없다고 본다(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양체(multiplicity)'를 구성하고 있는 들뢰지언들의 '잘난 체'도 보기좋게 넘어갈 수 있겠고. 이 책에서는 기존 번역어들의 '오류'를 지적하며 새로운 번역어들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 저자의 첫번째 잘난 체이다. 그건 좀 흔한 종류에 속하지만, 특이한 것은 인용문헌에서 보이는 두번째 잘난 체이다. 

<천 개의 고원> 대신에 굳이 <천의 고원>이란 제목을 고집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저자는 왜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 국역본을 한권도 인용하지 않는 것일까?(나머지 책들에 대해서는 불어본의 쪽수만을 표기해준다.) 심지어 자신이 번역한 <의미의 논리>(한길사, 1999)조차도. 읽어줄 만한 가치가 없다는 뜻일까?(그렇다면 아예 불어로 책을 쓰는 건 어떨까?) 학술논문들에서 그런 잘난 체는 흔한 것이긴 하나, 대중 교양서(?)에서 그런 '폼'을 보는 건 씁쓸하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이 텍스트만큼 희화화되고 속화된 텍스트도 찾기 힘들 것 같다"는 '특이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저자는 <천 개의 고원>을 개나 소나 읽고 떠들어대는 책으로 보는 듯하다) "기존의 오해와 왜곡을 논파하는 비판적 측면에도 비중을 두었"다면, 무엇이 어떻게 잘못 이해/번역되었는지 짚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한국이라는 사회'에 대해서 저자가 약간의 애정이라도 갖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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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5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5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8-10-26 00:20   좋아요 0 | URL
이정우씨의 "잘난 체"는 어떤 면에서는 김용옥씨의 허세와 비슷한 면이 있죠. ㅎㅎ
그래도 그 분 책은 나오면 즐겨읽게 되더군요. 지난번 출간된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도 그분 특유의 "잘난 체"를 느끼게 하는 구절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들뢰즈와 관련된 서평을 쓰신다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요? ^^

로쟈 2008-10-26 00:47   좋아요 0 | URL
둘러보면 '잘난 체'는 들뢰지언들의 모든 차이를 지우는 속성소 같기도 합니다.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들뢰즈만 좀 읽었다 치면 다들 우쭐거리더군요.^^; 토드 메이의 <질 들뢰즈>가 제일 얇아서 읽고 있는데, 역자 약력을 여러 번 확인하게 됩니다.--;

역마살꾼 2008-10-26 18:52   좋아요 0 | URL
한국에서 들뢰즈 열기는 어떤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이정우씨 책보다 금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데리다의 미발표 수고가 훨씬 관심이 가는데 아직 구하질 못했습니다. 로쟈님은 혹시 읽어보셨는지요? 역자가 잘 번역을 했을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8-10-26 19:24   좋아요 0 | URL
기사가 뜬 건 봤는데, 정기구독자만 읽을 수 있게 해놓았잖아요. 말만 좌파 저널이지 카피레프트에 있어서는 보수보다도 더 보수적인 저널입니다.--;

2009-07-20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