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의 불황 국면을 맞이하여 미국 경제의 추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선도 앞두고 있기에 미국 정치도 연일 기사화되고 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떠올리게 된 책은 모리스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황금가지, 2002)이다. 책을 읽어서가 아니라 이 참에 읽어볼 마음이 생겨서이다(알라딘에는 품절로 뜬다). 리뷰기사를 찾으니 생각보다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미국 문화의 몰락'이 결코 남의 나라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모르겠다. 미국식이라면 몰락마저도 황홀해 할 한국인들도 있지 않을까?). 오래전 기사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오마이뉴스(02. 09. 05) 미국문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나
80년대 초 나는 원로시인 고은 선생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은 미국에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미국은 머지않아 멸망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선생은 주로 도덕의 붕괴에 따른 미국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올해 나는 저명한 미국의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Morris Berman)이 쓴 <미국문화의 몰락(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심현식 옮김/황금가지 펴냄)>을 읽게 된다. 미국은 고은 선생이 멸망할 것이라고 진단한 이후 20년이나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의 학자가 자기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 세계를 점령할 듯이 호령한다. 테러분자들을 소탕한다고 아프가니스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을 축출하겠다고 을러댄다. 여중생들을 장갑차로 깔아 죽인 미군을 내놓으라고 하면 죄가 없다고 강변하고, 우리나라, 우리 문화의 상징인 덕수궁터를 짓밟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배 정도나 되는 규모로 대사관과 아파트를 짓겠다고 으르렁거린다.
더구나 미국기업인 맥도날드, 코카콜라는 상품으로 세계를 평정한다. 세계 어디나 맥도날드의 햄버거로 도배하여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를 이룩하며,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까지 '가구가락(可口可樂:cocacola)'을 마구 뿌려댄다. 미국이 생산한 군수물자 등 미국의 상품을 사주지 않으면 미국정부의 압력에 당해낼 국가가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21세기는 미국의 독무대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리스 버만의 지적처럼 미국문화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지 않을까? 글쓴이는 미국문화가 멸망할 거라는 정황으로 다음의 4가지를 들고 있다.
1.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즉, 부익부 빈익빈은 극에 달해 있으며, 미국의 중산층은 붕괴됐다. 2. 사회보장제도가 위기에 빠져 있다. 3. 반지성주의에 따른 지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문맹률은 급증한다. 4. 상업주의 문화가 지배하는데 따른 정신적 황폐함이 극심하다.
중산층은 전체 사회의 허리 구실을 한다. 이 허리가 붕괴됐으니 사회 전체가 온전할 리 없다. 글쓴이는 말한다. 고대 로마 시민들이 검투경기와 서커스에 넋이 나가 있었던 이후 고대로마제국의 멸망이 온 것처럼 오늘날 미국 시민들이 할리우드가 만든 블록버스터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미국 멸망의 징조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중들이 지엽적인 문제에 온통 정신이 팔리거나 문화적인 삶이 끊임없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국가는 분명히 문화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버만이 진단한 말이다. 미국 문화는 엉망진창으로 죽어간다고 판단한다. 겉보기에는 활력이 넘치고 경제도 호황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의 부제로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이라고 한 것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상업주의 문화에 목적의식도 창조력도 매몰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미국 사회의 활력은 상업주의 문화의 광란일 뿐이다.
물론 그는 이 멸망을 해결할 방법으로 수도사적 해법을 제시한다. 수도사적 해법이란 어떤 조직적 운동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생활방식을 뜻한다. 즉 거창하거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 대신 미술관이나 음악회를 찾고, 베스트셀러 대신 고전을 읽는 등의 작지만 의식있는 실천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문화의 몰락이 아니라 한국문화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버만이 지적하는 미국문화 멸망의 정황 4가지는 한국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정황 그대로이다. 특히 IMF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이 책을 읽은 다음 경각심을 갖고 한국문화의 몰락을 방지할 수도사적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할 일이다. 미국문화의 몰락은 미국만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의 우리 자신들도 걱정해야할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김영조 기자)

주간동아(02. 07. 04) "미국, 지금 너 떨고 있니?”
‘멍청한 백인들’(나무와 숲 펴냄)에서 마이클 무어가 미국 사회의 제도적 부조리와 정경유착 문제를 통렬히 비판한 데 이어,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은 ‘미국 문화의 몰락’을 예고한다. 4~5세기경 로마제국처럼 미국은 화려했던 전성기를 뒤로하고 몰락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버만은 ‘미국 문화의 몰락’에서 얼핏 보기에 미국이 에너지와 활력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활력이 상품 구매와 소유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혼란스러움에 불과한 이런 에너지가 미국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공허함을 숨기는 구실을 해서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사실 미국 지식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비슷한 경고를 했다.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은 “미국이 겉으로는 민주주의라는 화려한 장식을 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몇몇 기업이 권력을 휘두르는 과두정치 체제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고, 사회비평가인 토머스 프랭크는 “인간 의식에 대한 시장의 화려한 승리”라며 ‘암흑시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버만이 “미국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독일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서 ‘서구의 몰락’에서 찾을 수 있다. 슈펭글러의 종말론적 역사관에 근거해 저자는 미국 몰락의 징후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가속화, 둘째 사회·경제적 문제를 사회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한 비용투자에 따른 한계이익 감소, 셋째 비판적 사고 및 지적 의식수준 등의 급격한 저하와 문맹률의 확산, 넷째 정신적인 죽음(문화의 저급화). 21세기 미국은 이미 이 네 가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둔재 생산국 미국’의 현실은 참담하다. 미국 성인의 42%가 세계지도에서 일본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15%는 미국조차 찾지 못한다. 1996년 10월 설문조사에서 대통령 후보가 누구인지 모르는 유권자가 10명 중 1명. 저자는 과거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의 정신병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대통령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 밖에도 한 토크쇼에서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작위 인터뷰를 한 결과, 지구에 달이 몇 개 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한 학생(천문학 수업은 A학점이었다고 함)이 있는가 하면, 3의 제곱을 6 혹은 27이라고 대답한 경우도 있다.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도 ‘도쿄대생은 바보가 됐는가’라는 책에서 일본 대학생들의 무식함을 개탄한 적이 있는데, 일본의 추락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미국 문화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몰락을 막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기서 저자는 ‘수도사적 해법’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문화를 지키기 위한 역사적 선례를 보면 로마제국의 혼란기에 그리스 로마가 남긴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앞장선 것은 수도사들이었다. 이들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책과 필사본을 모으고 베껴 600년 후 새로운 유럽 문화 태동에 쓰일 수 있도록 했다.
현대의 정신적 수도사들은 상업주의 광고에서 거짓과 진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으며, 컴퓨터와 인터넷을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지만 삶과 도구를 바꿀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이들은 다니엘 스틸 대신 호머를 읽고, 자녀를 데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러 가는 대신 캠핑이나 박물관을 찾는다. 진리의 탐구, 예술의 함양, 비판적 사고방식은 바로 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즉 쇼핑이라는 오락에 빠져 있는 98%를 제외한 나머지 2%가 미국 사회를 구해낼 정신적 수도사가 될 것이다.
‘미국 문화의 몰락’은 미국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문화비평서이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드러난다. 먼저 저자는 미국이 직면한 문화적 위기를 경고하는 데 급급해 정작 지켜야만 하는 ‘미국 문화’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또 ‘수도사적 해법’이 담고 있는 엘리트주의나 지나친 고급문화 취향은 거부감을 준다. 그러나 ‘지구를 살리자’ 유의 구호성 문화운동이 지닌 한계를 감안하면 소수가 조용히, 그렇지만 맡은 소임을 다하자는 ‘게릴라성 문화재건 운동’에 기대를 걸어봄직하다. 세계화 과정에서 더 이상 ‘미국 문화’가 미국만의 것이 아니듯, ‘미국 문화의 몰락’은 한가한 남의 나라 걱정거리로만 읽히지 않는다.
08. 10. 11.


P.S. <미국 문화의 몰락>(2000)에 이어지는 버만의 책은 <미국의 암흑시대: 제국의 마지막 국면>(2006)이다. 타이틀로 보아 '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