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독서평설>(10월호)에 게재한 '끝장토론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세계시민주의 VS. 애국주의'란 제목을 달고 있으며 부제는 '세계시민은 탄생할 수 있는가?'이다. 제목과 부제, 소제목 모두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다. 나름대로는 '세계공화국'(세계국가)을 다룬 9월호의 주제를 이어가는 것이기도 하다(http://blog.aladin.co.kr/mramor/2272048 참조). 

현실과 이상 - 국민 국가와 세계 국가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One World, One Dream).’ 지난 8월,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베이징〔北京〕 올림픽의 슬로건이다.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담은 이 슬로건처럼 지구촌 스포츠 축제를 즐기기 위해 베이징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였다. 그런데 이 ‘하나의 세계’는 동시에 말 그대로 ‘하나의 꿈’이기도 했다. 한여름 낮의 꿈. 한편으론 올림픽 개막 이전에 베이징 시내의 150만 빈곤층이 강제로 퇴거당했고, 또 올림픽 기간 내내 중국 당국이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탄압하고 심지어 발포까지 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그뿐인가? 올림픽 개막일에 터진 러시아와 그루지야 사이의 전쟁은 현재의 지구촌 사회가 ‘평화와 화합’과는 아직 거리가 먼 세계라는 걸 다시 한 번 입증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화와 마찬가지의 딜레마를 보여 주는 듯하다. 세계화가 국가 간 장벽을 넘어서 하나로 통합된다는 긍정적 의미를 지닌 동시에, 강대국 중심의 재편이라는 부정적 함축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올림픽에서 금메달 수로 우열을 다투는 국민 국가가 우리의 ‘현실’이고, 세계 국가(세계 공화국)라는 ‘하나의 세계’는 한낱 ‘하나의 꿈’, 곧 ‘이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번에는 ‘국민’과 ‘세계시민’(또는 ‘세계인’)이란 범주를 갖고서 이 문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물론 여기서 국민과 세계시민은 각각 국민 국가와 세계 국가의 구성원을 가리킨다.

정체성의 충돌 -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또는 ‘우리는 누구인가.’란 것은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맺고 있는 소속 관계에 따라서 한 가족, 한 지역 그리고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점차 확대되어 간다. 그리고 그 궁극에서 우리는 세계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곧 세계시민과 만나게 된다. 물론 세계 국가는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가상으로 존재하는 이념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시민은 국민과 달리 법에 의해 보증되거나 ‘자격증’이 부여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스스로를 세계시민의 ‘자리’에 갖다 놓고서, 그러한 자리에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들은 서로 공존할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갈등 관계에 놓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충돌할 수도 있다. 예컨대, 제2차 세계 대전 때 병든 어머니를 보살펴야 할 것인가, 조국의 부름에 응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했던 한 프랑스 청년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역시 어떠한 정체성이 우선하는가와 관련된다. 마찬가지로 국민과 세계시민이 갈등·긴장 관계에 놓이게 되면, 여기서도 무엇이 우선인지가 문제 될 수 있다. 애국주의(국가주의)와 세계시민주의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대립은 ‘세계시민’이란 말의 어원 자체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시민’(코스모폴리테스, kosmopolitēs)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키니코스학파(Kynicos, 견유학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그리스에서 ‘폴리테스’, 곧 시민은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특정 폴리스(polis)에 속했다.

그런데 ‘코스모스(kosmos)의 시민(politēs)’을 뜻하는 ‘코스모폴리테스’는 코스모스가 ‘지구(earth)’가 아니라 ‘우주(universe)’란 의미에서 공동체의 바깥을 지시하는 한, 특정 공동체의 소속을 배격했다. 곧 세계시민주의(또는 세계주의)는 본래 모든 시민이 여러 공동체 중 하나에 속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거부한다. 굳이 그 소속을 밝히자면 세계시민주의는 ‘공동체의 바깥’ 내지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렇게 ‘바깥’과 ‘사이’에서 바라볼 경우, 공동체 내부에서 볼 때와 달리 모든 공동체는 평등하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스토아학파 이전에 그리스 인들은 인간을 그리스 인과 야만인(barbarian)으로 나누는 것이 자연의 명령(또는 제우스의 섭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토아학파는 모든 인간이 하나의 공통된 이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진정한 현자(賢者)는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니라 전체 세계의 시민이어야 했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스토아학파는 패배한 적과 노예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키니코스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어디서 왔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라고 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출신 지역과 소속 집단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려는 일반 그리스 인들의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관심에 따라 스스로를 정의하려 한 것이다. 그의 뒤를 따랐던 스토아학파는 이러한 세계시민의 관점을 더 발전시켜서 우리가 사실상 두 개의 공동체, 곧 ‘우리가 출생한 지역 공동체’와 ‘인간적 주장과 포부의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적 주장과 포부의 공동체가 우리 도덕적 의무의 근본적인 원천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태도는 기독교적 세계시민주의에서도 반향을 얻는다. 가장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유태인이나 그리스 인이나, 노예거나 자유인이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너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때 ‘하나’가 바로 세계시민주의적 지향이라 할 수 있다. 그 세계시민주의의 이상을, ‘독일의 볼테르’라고 불리는 사상가 크리스토프 빌란트(Christoph M. Wieland, 1733~1813)는 이렇게 정리했다. “세계시민은 지구의 모든 사람을 단일한 가계의 자손으로 간주하고 세계를 하나의 국가로 간주한다. 다른 수많은 합리적 존재와 더불어 세계시민은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자연의 일반 법칙에 따라 전체의 완전성을 함께 도모하면서도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복지에 몰두한다.”

공동체의 확장 - 세계시민주의 VS. 애국주의
이러한 기원적 의미에 충실할 때, 세계시민주의는 우리가 특정한 지역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더욱 확장된 정의와 선(善)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라고 권유한다. 곧 정부 형태 같은 일시적 권력이 아니라, 전체 인류의 인간애에 의해 맺어진 도덕 공동체에 일차적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국주의와 대비해서 보자면, 세계시민주의는 민족주의나 국민 국가라는 협소한 틀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예컨대 한국과 일본, 두 국민 국가 사이에서 영토 분쟁 대상이 되고 있는 독도 문제를 세계시민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일본의 철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 교수는 예전에는 국경이 중요했지만 국적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됐다면서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판단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일본 학생이나 한국 학생은 다 똑같은 학생이다. 차별이 없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내게 ‘일본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철학자로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게 세계시민적인 사고 태도다. 세계가 나의 조국이다.”

그의 관점에 따른다면 독도 문제 같은 영토 분쟁은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인 시대착오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아예 한국과 일본이 독도를 상징적으로 각각 1년씩 지배하도록 하자는 해법도 제안한다. 그가 보기에, 오히려 이 문제는 민족주의를 넘어 진정한 세계시민주의에 도달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같은 입장은 즉각적인 반박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의 법학자 박홍규 교수는 세계화 시대에도 국경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땅 위에 사는 인간에게는 국경 구분이 여전히 중요하다. 국경 없는 곳에 인간은 살 수 없고, 인간이 사는 곳에 국경 없는 곳이 없다. 국경은 역사·정치·경제 등 많은 것과 관련된다. 독도는 작지만 그 의미는 크다. 경제적 이해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국경이 엄존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마치 국경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해 풀자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런 식이라면 그루지야 영토 전쟁이나 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국제 갈등을 해결하는 방안은 그 당사국이 각각 1년씩 지배하는 것이겠다.”라고 비판한다.

물론 박홍규 교수의 비판을 ‘애국주의’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세계시민주의의 ‘비현실성’을 비판한 것이라 할 때, 그 현실주의는 통상 애국주의에 가까운 모습을 취한다. 가령 올림픽에서 모든 선수의 선전을 기대하며 응원한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실제로는 ‘대~한민국!’이라는 응원에 이끌리기 십상이다. 한일 대표 팀 간에 야구 경기가 벌어질 때 국가적 소속감을 벗어나 두 팀을 응원한다는 것은 한국인에겐 확실히 덜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국가주의적 고려가, 다른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상충할 때 과연 최상의 방책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중국의 황사 바람은 국경선을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아마존 열대 우림의 파괴는 브라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미 세계는 더 이상 서로에게 무관심할 수 없게 되었다. 지구 온난화를 부추기는 온실 가스 제한을 위한 국제 협약인 교토 의정서(1997)가 체결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세계 최대 온실 가스 배출 국가인 미국은 이 협약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한 방침을 공언하면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 경제에 해를 끼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우선적인 것은 미국 국민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입장이 ‘현실주의’로 옹호될 수 있을까?

세계시민주의 - 보편적 윤리의 요구에 대한 응답
세계시민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오직 이성과 인간성뿐이어서, 덕분에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비현실적이란 비판에 자주 직면한다. 이러한 비판은 유구한 것이다. 세계시민이 된다는 것은 종종 외로운 일이며 디오게네스에 따르면 일종의 ‘추방’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추방인가? 그것은 지역적인 진리들이 주는 위안, 애국주의의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 자신과 자기 소유물에 대한 열광적인 자부의 드라마로부터의 추방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역적 정체성을 포기해야 할까? 애국주의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듯이, 세계시민주의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세계시민주의적인 애국자’, 곧 ‘지역적 헌신을 요구하는 세계시민주의’를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물론 애국주의도 아니고 세계시민주의도 아니라는 입장 역시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한 제3의 입장을 미국의 철학자 마사 너스봄(누스바움)은 ‘긍정적 애국주의’ 또는 ‘순화된 애국주의’라고 말한다. 과잉된 감정으로 무장한 애국주의는 다른 국민과 소수 민족을 억압하는 데 반해, 순화된 애국주의는 이보다 관용적이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만큼 다른 나라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처럼 순화된 애국주의자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타인의 다른 조국에 대한 사랑을 침해하지 않는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도덕’이란 말을 공동체의 규범이란 의미로, ‘윤리’를 보편적 의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어떤 공동체를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한 내부의 ‘규칙’이다. 가령 ‘공중도덕’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공중의 복리를 위하여 여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을 가리킨다. 길을 걸어갈 때 사람은 왼편으로 차량은 오른편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공중도덕이다. 이는 보편적인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도덕은 특정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지역적인 특성일 뿐 보편성을 따르지 않는다. 당장 일본만 하더라도 우리와는 반대로 사람은 오른편으로 차량은 왼편으로 가는 것이 공중도덕이다. 이처럼 각기 다른 공동체는 각자의 도덕규범을 갖는다.

거기에 비해 윤리는 보편적인 준수를 요구하는 의무다. 그것은 공동체의 규칙이 아니라, ‘공동체 바깥’ 또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의무다(그런 의미에서 ‘국민 윤리’라는 말은 모순이다.). “인간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도 대하라.”라는 칸트의 정언 명령이 그러한 윤리의 대표적인 사례다. 윤리적 명령은 그것이 ‘도덕’이 아니라 ‘윤리’인 한에서 언제 어디서나 지켜질 것이 요구된다.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한 특정한 공동체 바깥에 존재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세계시민주의는 어떤 고귀한 재능이나 게으른 자기변명이 아니라 보편적 윤리의 요구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분명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도덕의 준수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도덕은 언제나 보편적 윤리의 관점에서 제어되고 반성되어야 한다.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관계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08.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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