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서 분야에서 이번주에 포커스로 다루어질 만한 저자는 단연 한형조 교수다. 조선 유학에 관한 논저 <왜 조선 유학인가>와 <조선 유학의 거장들> 두 권을 한꺼번에 출간했기 때문이다. 한겨레에서 자세한 리뷰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139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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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08. 10. 04) 조선 유학 그 끝에서 길을 보다
조선은 왜 망했는가? 지난 10여년간 독창적인 시각과 활달한 문체로 한국 유학을 천착해온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새 책 <왜 조선 유학인가>는 제1장을 이런 제목으로 시작한다. 이 물음은 조선 지배계급 건국이념의 토대였고 나라가 존속한 500여년 동안 백성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했던 조선 유학(주자학)이 왜 망했는가로 바꿔 놓을 수 있다. 왜 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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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유학사>를 쓴 현상윤은 문벌을 중시해 인재를 경시하고 계급을 고착시킨 것, 배타적 가족주의, 당쟁 격화, 무를 경시하고 문약으로 흐른 것, 상공업을 천시한 것 등을 ‘조선 유학의 죄’로 지목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유학의 말기적 폐단이 유학 자체의 잘못이냐, 아니면 조선사람의 잘못이냐고 물었다. 한 교수가 보기에 그것은 유학의 죄라기보다는 조선 주류 유학의 죄요, 결국 사람의 죄다. 조선 주류 유학은 점점 초기의 근본정신을 배반하고 적응력을 잃어갔으며, 이를 비판하고 문제를 제기한 비주류와 변경의 목소리들을 배척하면서 몰락의 길을 갔다. 이런 현상은 특히 임진·병자년의 침략전쟁을 겪은 뒤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상황이 바뀌었으면 이념의 지도도 바뀌어야 했다. 하지만 바뀌기는커녕 전쟁의 공포와 황폐에 짓눌린 주류는 더욱 경직되면서 기득권에 집착했다.
“허균의 한탄처럼 우연의 평화를 믿다가 왜적에게 강산을 유린당했고, 망해버린 명을 업고 정치적 이득을 챙기느라 오랑캐로부터 만고의 치욕을 당하고 백성을 어육으로 만들었으며, 이후의 역사를 혼란과 부패, 무능과 무질서로 끌고 갔다.” 한 교수는 여기서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경구를 떠올린다. “역사의 교훈을 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하여 똑같은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날 것이다.”
산타야나의 경구는 현실이 됐고 조선과 조선 유학은 결국 망했다. 현상윤이 말한 말기적 폐단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한 교수는 우선 유생들이 직업을 갖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직업이 있었다면 오직 과거급제 뒤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었으나 대다수 유생들은 거기서 소외됐고, 그들은 상공업적 이익을 천시하고 금기시했으며 농사도 직접 지은 적이 없다. 절박한 생계문제를 비롯한 구체적 현실과 유리된 학문은 관념화하면서 “헛기침과 체면치레가 자랐고, 번잡한 허식을 절대의 이름으로 고수하는 완고를 키웠다.”지독한 가난 속에 귀천이 분열되고 지배와 저항이 갈렸으며, 지배계급은 그들이 떠받든 경전의 일자일구도 바꾸지 못하게 했고 어떤 이의도 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학술을 죽이고 인재를 죽였으며, 지식과 학문과 경영이 부재한 가운데 부패와 무능 사이를 오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오히려) 학문을 살렸고, 이후의 활발한 주석이 학문을 죽였다”며 유교가 가진 자들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을 한탄했던 정조는 거기에 칼을 대다 자신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조선 유학은 결국 자멸한 뒤에야 비로소 부활의 가능성을 열었다. 조선 유학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한 교수는 그 실마리를 주류들이 배반하고 배척했던 초기 근본정신과 변경 비주류 유학에서 찾았다. 주자학의 전면적 재검토를 통해 기반 다지기 작업을 벌여온 한 교수가 지난 15년 동안 매만져온 또 하나의 새 책 <조선 유학의 거장들>이 율곡 이이부터 시작해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다산 정약용 등을 거쳐 혜강 최한기를 파고든 것은 그런 맥락 위에서다. <왜 조선 유학인가>는 자책, 방법, 스펙트럼, 지도 등 7가지 주제로 쓴 조선 유학에 대한 메타적 성찰들을 모은 것이고, <조선 유학의 거장들>은 조선 유학 최고봉들의 핵심적 아이디어와 그들 간의 사상적 격전을 통해 의외로 넓은 조선 유학의 스펙트럼과 뜻밖의 깊이를 드러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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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율곡·퇴계의 시대까지는 조선 유학이 열려 있었다. 이학(理學)의 틀 안에서 벌이는 주기(主氣)론 쪽의 율곡과 주리(主理)론 쪽 퇴계의 사단칠정 논쟁, 주리론 쪽에서 파생되는 북학파와 실학, 그리고 주자학의 토대를 무너뜨린 최후의 실학자 혜강의 기학(氣學) 간 길항이 날카롭다. 서인-노론으로 이어지는 정치지형 속에서 비록 권력에선 소외당했지만 독특한 빛을 발했던, 퇴계와 동갑이었던 단호한 실천가 남명이 빚어낸 무늬도 이채로웠다. 율곡은 16살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삶의 허무를 이기지 못해 금강산 절로 들어갔다가 1년 남짓 뒤 하산한다. 바로 이 행적 때문에 율곡은 나중에 두고두고 이단 혐의를 받으며 고통을 당했으나 한 교수는 오히려 그 체험을 통한 실존적 자각이야말로 율곡이 “투명한 공적 자아로 사태의 원리를 탐구하고, 그 지식을 토대로 현실을 혁신해나가도록” 만든 더할 나위 없는 자산이었다고 본다.
1554년 그때 율곡이 한 암자에서 만난 노승과 나눈 선문답적 대화를 자세히 살피고 분석한 글은 불교와 유교의 동질성과 본질적 차이를 드러내는 글이지만, “유학의 르네상스는 아마 유교 문화권이 아니었던 곳에서, 혹은 전통의 격세유전을 통해서 기지개를 켤지 모른다”고 한 지은이의 남다른 의지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지은이 자신이 원래 유교 전통 바깥에서 성장했다. 기학의 근대를 거쳐 탈근대가 운위되는 지금 이학의 재발견, 근대가 잃어버린 인간 본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더 많은 사적 이야기들이, 편견과 독단을 무릅쓰고 풍성해지기를…. 조선 유학의 실체는,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현란한 언설들 사이에서, 무성한 변증과 격돌의 현장에서 피어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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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와 함께 /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한형조(50) 교수는 대학 철학과에서 불교 공부를 했으나 졸업할 때쯤 유교 쪽으로 바꿔 ‘다산의 인간관’으로 석사를, ‘주자학에서 다산으로의 철학적 전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왜 바꿨을까. “학부 초년 시절 휴학하고 무작정 절로 들어갔는데, 그쪽 얘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아무 문제도 아닌 걸 문제로 껴안고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적이 “율곡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공부를 마음의 본성에 낀 때를 벗겨내는 방편으로 삼는다는 점에선 불교가 주자학과 다를 바 없었으나, 불교엔 유교가 중시하는 플러스 알파가 없다는 생각을 그는 했다.
“주자학엔 2개의 코드가 있다. 심학과 예학인데, 심학은 주자학 쪽이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서로 공통이다. 하지만 인간관계나 현실, 곧 문명의 질서, 문명적 구상을 다루는 예학이 불교엔 없다.” 율곡이 노승과의 선문답에서 얘기한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 교수가 한때 산으로 들어갔다가 하산한 뒤 유교로 옮겨간 행적이 율곡의 그것과 닮은꼴이다.
한 교수는 10여년 전 <주희에서 정약용으로>라는 책을 낼 때 “이제부터는 <정약용에서 주희로>가 필요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학위논문을 쓸 때는 다산이 고전 재해석처럼 경학을 통해 경학을 재검토하는 방식의 주자학 비판을 발전사적 관점, 진보적 시각에서 점검을 했는데, 논문을 끝낼 때쯤 다산의 그런 주자학 비판이 전적으로 옳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다산의 관심사, 곧 다산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주자학을 바라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내가 아직 주자학을 잘 모른다는 거였다. 주자학의 내면적 맥락과 가치들을 본격적으로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얘길 했다.”
조선 유학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그는 “나도 퇴계처럼 개인주의자여서 소명의식 같은 거창한 건 없고 공부와 개인 성장을 위한 훈련 방법, 나름의 가치 추구와 그를 위한 고찰이나 반성에 유익하다는 생각을 했고, 또 그런 게 나만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에게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중요한 것은 강압이 아니라 공감과 감화인데,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 아니겠느냐”고 했다.
한 교수는 “상자 바깥에서 달리 생각하는 법, 전혀 다른 사고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예전에 비하면 많이 자유로워졌고 풍요로워졌으나 개인적 공간은 별로 넓어진 것 같지 않다. 주류 바깥, 체제 바깥에서 생각해야 새로운 사고가 나온다. 특히 인문학은 공부해서 자기만의 것을 써낼 수 있으려면 30년은 걸린다.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논문 쓰기 위주 학사체계에 수업시간도 너무 많고 그것도 일방적인 수업이다. 학생들도 학교수업 소화하기 바쁘고 취직에 매달리니 성찰할 기회가 없다. 그러니 창의성도 없다. 이런 기업식 학문 추구 풍토에서는 주자학 연구자 같은 학계의 아웃사이더들이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다.”
최근 국내외에 ‘퇴계학’이 떠오르고 있는 이유는 뭘까. “퇴계는 노력가로 도산서원에서 오랫동안 충분히 주자학을 연마하면서 학자나 교사로는 최고의 수준에 올랐다. 그에 따라 제자들도 많다. 외국에서 특히 퇴계학이 환영받는 것은 퇴계가 심학 쪽을 받아들이기 쉽게 정리해놨기 때문이다. 예학 쪽은 외국인들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비하면 율곡은 천재과인데, 대개 그런 사람들이 제자나 후손이 약하다. 게다가 율곡은 노론의 종장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주자학 정통 주류가 됐으나 그만큼 비주류 쪽의 견제나 비판도 심했다.”
08.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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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기억에 내가 읽은 한형조 교수의 책은 <주희에서 정약용으로>(세계사, 1996)가 유일하다. 번역서로는 에드워드 콘즈의 <한글 세대를 위한 불교>(세계사, 1990)도 소장도서였다. 중간에 <왜 동양철학인가>(문학동네, 2000) 같은 책도 나왔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언제 도서관에서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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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의 거장들>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 백민정의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사계절, 2007)과 곽신환의 <조선조 유학자의 지향과 갈등>(철학과현실사, 2005)를 들고 싶다. 전자는 공자 이후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해주고 있는 책이다. 후자는 살펴보지 못한 책인데, 다루는 범위가 <조선 유학의 거장들>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