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 칼럼을 뒤늦게 읽고서 옮겨놓는다. '번역의 힘'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지난봄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예담, 2008)란 책으로 화제를 모았던 노문학자 석영중 교수이다.

서울신문(08. 07. 14) [문화마당] 글로벌시대 번역의 힘

19세기 러시아 시인 중에 주코프스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시도 잘 썼지만 유럽 문학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에서 더욱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가 공들여 번역한 ‘오디세이’는 러시아 문학사에 큰 획을 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배 작가 고골은 주코프스키의 ‘오디세이’ 번역이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연 사건이라고 환호하면서 미사여구로 가득 찬 아주 긴 에세이를 썼다. 한마디로 주코프스키의 번역은 기적이며 번역자는 원저자보다 더 생생하고 아름답게 고대 그리스의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코프스키가 평생 동안 썼던 창작 시는 이 번역을 위한 습작이라는 것이다!

나는 문제의 ‘오디세이’ 번역을 읽어 보지 못했으므로 고골의 평가가 어느 정도 공정한지 가늠할 수 없다.‘이거야 원 꿈보다 해몽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고골의 글을 읽으면 어쨌든 무척이나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을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문학 풍토가 부럽고, 번역가에 대한 지극한 예우가 부럽고, 번역을 창작보다 더 높이 둘 수 있는 독자의 열린 마음이 부럽다.

러시아는 옛날부터 번역을 중시했다.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다. 러시아는 17세기까지 유럽 문화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18세기 초부터 러시아인들이 당면한 과제는 서구 따라잡기였다. 번역은 서구화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지식인들은 서구 문화의 전통을 차용하고 번역하고 수용했다. 그러는 사이에 번역은 창작이 되고 수용은 서구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 되면서 찬란한 러시아 문학과 예술을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푸시킨에서 파스테르나크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유명한 문인들 대부분이 창작과 번역을 같이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의 번역문화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물론 러시아가 서구화를 향해 줄달음치던 시절과 오늘의 글로벌 시대를 같은 틀 안에서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히려 글로벌 시대이기에 그리스 로마 문화도 르네상스도 모르던 러시아를 한 세기 만에 문학강대국으로 만들어준 번역의 힘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번역은 대화다. 원저자와 번역자 간의 대화이고 언어와 언어 간의 대화이며 문화와 문화 간의 대화이다. 우리가 세계를 향해 말을 하고 싶다면 세계가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해의 양과 질과 속도는 결국 우리 문화의 성장을 좌우한다. 글로벌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대화로서의 번역을 요구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학부에 번역학과가 창설되기 시작했고 번역학회와 번역가들의 활동이 다원화되고 있으며 명저 번역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지속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전문 번역인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언어적 소양과 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전문가적인 양심을 갖춘 번역인 양성을 위해 지금이라도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더불어 번역 서평을 활성화하고 번역 윤리를 정착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무성의한 번역, 엉터리 번역, 기존 번역의 표절 같은 것들이 설 자리가 없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번역에 대한 사회 통념의 전격적인 변화이다. 번역은 문화 발전을 위한 가장 강력한 원동력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굳건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우수한 번역가도 필요하고 명민한 번역비평가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번역에 대한 국민의 인식 자체를 바꾸어 글로벌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번역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일이다.(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08. 09. 20.

Гомер Одиссея: Поэма (пер. с греч. Жуковского В.А.; предисл. Нейхардт А.; прим. Ошерова С.)

P.S. 주코프스키의 '오디세이' 번역은 http://az.lib.ru/z/zhukowskij_w_a/text_0180.shtml 에서 읽어볼 수 있다. 작가들의 번역도 '전집'에 포함하는 것이 '러시아의 번역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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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2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중시하는 나라가 문화대국입니다.우리나라도 대학원생들에게 공짜로 번역시키는 교수들이 사라질 때 문화대국이 될 것입니다.대학원을 안 다녀봐서 경험은 안 해봤지만 이런 일이 많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8-09-20 20:20   좋아요 0 | URL
우리의 '번역문화'죠.^^;

노이에자이트 2008-09-20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보다 더 뻔뻔한 종자가 모든 것을 맨입으로 해결하려는 놈들이죠.특히 위계질서 내세워서...

로쟈 2008-09-21 09:41   좋아요 0 | URL
덧붙여 현재와 같은 강사시스템도 세계적으로 희귀할 거 같다는 생각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달 전 주한외국인이 불법체류하다가 철창생활하면서 겪은 책이 소개되었는데 한국인은 감옥에서도 쉰살이 넘은 남자들이 누가 형이냐 동생이냐 따지더라는 일화가 나오더라구요.그 외국인 남자는 "한국엔 평등한 인간관계가 없다.모두 위아래를 따진다.아랫사람은 철저히 윗사람의 횡포를 감수해야 한다"고 결론냈는데 정확한 진단이라고 봅니다.

로쟈 2008-09-22 16:41   좋아요 0 | URL
네, 소개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Sati 2008-11-1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대그리스어를 모르던 주코프스키가 오디세이를 번역할 수 있도록 독일인 작가가 독일어로 축역을 해주었다니, 주코프스키의 명역도 팔자가 좋아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

로쟈 2008-11-13 06:56   좋아요 0 | URL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