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이 국방부 '불온서적'에 포함됨으로써 화제가 됐던 장하준 교수의 인터뷰기사를 한겨레에서 옮겨온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6688.html). 이번주 시사IN의 불온서적 리뷰에서는 책 제목이 '붉은 사마리아인들'로 불린 얘기도 나온다. 불온한 책이니 '나쁜' 책이면서 '붉은' 책이기도 한 것. 좌우 양편에서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장하준 경제학이 '상식'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한다. 아니, '상식'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니 미국 따라하기가 아니라 그걸 경고하는 장하준 따라잡기가 우리에겐 일단 필요하다. '전망'이나 '대안'의 모색은 그 이후에 가능할지 모른다(장하준의 기본적 정향은 '자본주의 안에서의 변화와 개혁'이다). 

 

한겨레(08. 08. 26) "미국을 따라하지 말고 반면교사 삼아라”

“스위스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란 게 관광객에게 ‘뻐꾸기 시계’나 ‘소 목에 매다는 종’ 팔아서 돈 벌고, 좋게 얘기하면 금융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방학을 맞아 한국에 온 장하준(45·[사진])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지난 20일 한겨레신문사 초정 강연과 뒤이은 인터뷰에서 잘못된 관념과 신화를 깨야 한다며, ‘스위스를 탈산업화 사회의 표본’으로 여기는 통념을 한 사례로 들었다.

“사실은 1인당 제조업 생산량이 제일 많은 나라가 스위스다. 서비스로 먹고사는 나라가 아니다. 일본보다 24% 높고, 미국에 비해 2.2배 높다. 세계에서 제일 산업화가 된 나라인데, 우리는 그 나라가 서비스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잘못 갖고 있는 관념이 많다.”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의 흥미로운 사례는 줄줄이 이어졌다. 파나마모자는 에콰도르에서 만든 것이며, 뻐꾸기시계는 독일에서 발명했으며, 프렌치프라이는 벨기에에서 생겼고….

삶의 질 낮고 금융불안한 미국 ‘신자유주의 신화’ 본색 드러나

장 교수는 화두로 삼고 있는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가 전세계를 휩쓰는 대세이며, 대안이 없다는 것도 신화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전세계 이데올로기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자꾸 없다고 하니까, 찾아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한다”며 “안 보려고 하니까 대안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기업이면서 민간기업보다 훨씬 효율적인 데가 많으며 스웨덴처럼 (신자유주의 흐름과는 달리) 노사 대타협을 맺어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활력을 동시에 이루고 있는 예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흔히 미국이 제일 잘사는 나라라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신화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생활수준이 높은 게 아니다. 미국은 노동시간이 유럽보다 10~30% 길다. 노동시간당 국내총생산(GDP)은 구매력 기준으로 해도 세계에서 7~8위다. 그만큼 저임금 노동이 많다는 이야기다. 독일은 (오후) 5시면 (가게) 문 닫고, 미국은 24시간 가게 열고 늦게까지 일한다. 범죄율, 유아사망률, 기대수명 같은 ‘삶의 질’에 관한 지표가 선진국 중 최하위권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모델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미국을 따라갈 이유가 없고, 그것은 또한 위험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곧 외환위기 이후 펴 온 한국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외환위기 뒤 기업의 부채비율을 400% 수준에서 200%로 무리하게 낮추는 식의 정책이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고 일자리 감소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부채 비율 낮은 게 좋은 거라면 브라질이 세계 1위다. 브라질 기업들은 돈을 안 빌린다. 부채 비율이 50%다. 우리나라는 성질이 화끈해서 완전히 극단으로 간다. (외환위기 뒤 부채 비율을) 200%로 낮추라고 하니까, 100%까지 낮췄다. 미국이나 영국도 150% 정도인데….”

한국 사회에선 장 교수와 달리, 외환위기 뒤의 신자유의적 구조조정은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했다는 견해가 득세했다. 마땅한 대안이나 다른 방향을 채택할 수 없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장 교수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신자유주의적으로 하자면, (기업을 지원하는) 정부의 산업정책이라는 게 있을 수 없음에도 (신자유주의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산업정책을 펴고 있다는 점을 한 예로 들었다.

“미국처럼 (심하게) 산업정책을 시행하는 나라가 없다. 미국의 연구개발(R&D)비 지출이 대단히 많다. 우리나라나 일본도 국가 주도형이라지만, 총 연구개발비에서 정부가 대는 게 20%, 유럽이 30%인데, 미국은 50% 가까이 된다. 1990년대 중반에는 50~60% 사이, 해에 따라서는 70%까지 된다. 미국 기술 경쟁력의 기초는 정부의 지원을 통한 연구개발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산업정책을 구시대의 유물로 용도폐기하는 것은, ‘몰래 시험공부 미리 다 해놓은 친구 따라 영화 보고 미팅하러 돌아다니다가 시험을 망치는 바보’가 되는 길이라고 장 교수는 비유했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장 교수가 신자유주의자를 비유해 지칭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갑자기 착하게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걸 기대할 수도 없고, 그 반대에 서 있는 쪽에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을 착하게 고쳐먹도록 압박할 ‘힘’도 없는 게 현실 아닌가?

“두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하나는 소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들 가운데도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쪽이 있다. 예컨대 핀란드·노르웨이는 후진국에 원조를 활발히 하는데, 그런 나라마저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후진국에 부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신자유주의적 정책)가 가장 맞는 정책 아니냐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지칭된 이들 가운데서도 ‘아! 이게 맞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겨날 수 있다.” 그보다 조금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소탐대실이라고 느낄 것이라고 장 교수는 덧붙인다.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를 잘살게 해주는 게 (장기적으로는) 이익이라는 것을 안목 있는 사람들은 깨닫게 될 것이란 기대감이다.

신자유주의적 처방에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고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 대기업의 기능을 중시하는 장 교수의 견해는 종종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통한다거나, 한국 사회 재벌의 문제를 간과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장 교수와 두터운 교분을 쌓고 있는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또한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장 교수의 신자유주의 비판에는 공감하지만, 재벌의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바 있다.

한국사회 재벌문제 심각해도 대기업들 구실은 여전히 중요

장 교수는 이에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다 생각하니까 그것을 엮어서 (노사) ‘대타협’을 이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한국 경제 성장에서 재벌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은 유종일 교수님도 동의할 것이다. 다만,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냐 아니냐는 부분에 있어서 판단이 다른 것이다.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업(재벌)들이 책임 있는 행동만 한다면 스웨덴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장 교수는 같은 맥락에서 지난해 10월에 불거져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삼성 사태’는 잘못 가닥을 잡았다고 진단한다. 재벌 제도의 장점이라는 게 기획조정실을 중심으로 ‘계열사간 상호 연계’를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인데, 그 구조를 포기하는 대신 ‘가문의 승계 구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고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선 오히려 거꾸로 됐어야 한다는 게 장 교수의 견해다.

미국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비롯된 국제 금융시장의 혼란, 고유가에 따른 물가 급등세 등으로 현재 한국 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에 빠져 있다. 영국 학계에 몸담으며 넓은 식견을 갖춘데다 한국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장 교수에게 한국 경제의 앞날은 어떻게 비칠까?

“과거 10여년 동안 주식시장과 부동산 붐에 힘입어 잘나가는 듯했던 미국·영국·스페인 같은 나라들보다는 상황이 낫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수출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다. 주요 수출시장인 미국이 휘청거리고, 또 미국 때문에 먹고사는 중국이 휘청거리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한국이)흑자 낸 많은 부분이 중국에 기계와 중간재료 팔아서 번 것 아닌가. 무엇보다는 국제 금융시장이 불안하다. 앞으로 최소 1년 이상은 세계경제가 어려울 것으로 본다.” 장 교수는 “(외환위기 뒤) 경제 체질이 약화돼 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미국식 자본주의가 좋은 게 아니구나 하는 계기로 만들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미국식으로 더 나가려고 하니 걱정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했다.(김영배 이정연 기자)

08. 08. 26.

P.S. 장하준 교수의 최신간은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부키, 2008)와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산책자, 2008)이다. 전자는 아일린 그레이블과의 공저로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제시한다고 한다. 후자는 '새로운 좌파의 길'로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글모음인데(생각보다 자극적이고 유익한 글모음이다), <국가의 역할>,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를 우리말로 번역한 이종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참고로 <국가의 역할>(부키, 2006)에 대한 자세한 리뷰도 옮겨놓는다. 필자인 홍기빈에 따르면 장하준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은 '경제적 현실주의'로 정리될 수 있다.  

프레시안(06.12. 07) '신자유주의 경제학', 설 땅을 잃다

장하준 교수의 책 <국가의 역할>(이종태, 황혜선 역, 부키 출판사)이 출간되었다. 원저인 <Globalization, Economic Development & the Role of the State>(London: Zed Books, 2003)는 이미 세계의 많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요한 교재로 채택되어 명성을 얻은 책이다. 다행히도 500쪽에 달하는 이 역저가 이종태, 황혜선 두 분의 노고 덕분에 근래에 보기 힘든 훌륭한 번역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도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 실천적 파산과 그 폐해를 지적한 책들이 없지 않았으나,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그 중요성과 의의에서, 특히 난마와 같은 정치경제 구조변환의 혼란에 빠진 한국사회에 대해 갖는 함의에서 특기할 만하다.

사이비과학의 위험에서 정치경제학 구해내기
과학철학의 중요한 작업 중 하나는 과학과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demarcation)이다. 사이비 과학의 특징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 모호한 개념들을 기초로 하여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는 명제를 도출한 뒤 이를 보편적인 법칙으로 승격시킨다'는 데 있다. 한때 유럽을 풍미했던 연금술이나 점성술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이것들은 '5행성의 성질'이니 '여러 금속의 서열'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사용하여 예언과 주장을 내어놓은 뒤, 그것이 현실에서 어긋나게 되면 "이 경우는 특수한 경우로서…"라는 갖은 특수설명(ad hoc)으로 둘러대 논증도 논박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생과 사회의 나아갈 바라는 추상적인 법칙으로까지 그것들을 승격시킨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를 풍미하면서 전 지구의 정치경제 체제를 소위 '전지구적 시장 체제'로 바꾸어놓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 체계를 장 교수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 이후 벌어진 신고전파와 오스트리아 정치경제학파의 '정략결혼'으로 파악한다. '경제적 최적화의 계산'이라는 기술적 한계를 넘지 못한 신고전파 경제학이 오스트리아 학파로부터 자유, 시장, 국가 등의 개념에 대한 일관된 자유주의적 논리를 제공받는 대신, 그동안 주류 경제학에서 따돌림당하던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이론의 '과학성'을 인정해주는 일종의 '빅딜'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결혼이 신랑 쪽이나 신부 쪽이나 모두 100살이 넘었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본축을 이루는 이론들은 모두 파레토, 왈라스, 클라크, 혹은 그 이전에 나온 19세기 경제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 오스트리아 학파의 정치경제 사상이라는 것은 미제스나 하이에크 등이 이미 1930년대부터 끝없이 반복하며 설파했던 '19세기식 시장사회', 즉 "자유주의 정치경제 사상의 중심 가치는 신성불가침의 자연법"이라는 생각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20세기 100년 간의 역사는 시장도 국가도 사회도 자유도 후생도, 어느 것 하나 19세기 식으로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계대전, 파시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과 관련된 파란만장한 대사건들 속에서 계속 변모해 온 현대의 정치경제 체제를 과연 이 100년 묵은 이론 두 개를 합쳐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증손자, 아니 고손자를 기다리면서 학설사의 한 페이지로 그냥 조용히 늙어가야 할 이 할머니 할아버지 이론들이 과연 '회춘'하여 왕성한 생산력으로 새롭게 자손을 번창시킬 수 있을까. 혹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추상적 개념들로써 논박도 논증도 애매한 명제들을 마구 쏟아놓으면서 "한 나라, 아니 전 세계의 정치경제가 나아갈 바는 이런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거대담론으로 치닫는 '사이비과학'이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사태가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기에 의혹이 더 짙어진다. 이미 20세기 전반에 카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19세기식 자유주의 정치경제 사상의 패러다임이 지닌 '과학'으로서의 가치가 파산상태에 달하여 이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된 현실을 폭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 나아가 지식대중 전부가 그렇게 '이데올로기'로 변해버린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운데 현실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전 세계가 파시즘과 세계대전이라는 위기로 치닫는 기막힌 현실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런 사태에 부닥쳐 카아(E. H. Carr)와 같은 사람은 사회연구는 더 이상 '유토피아와 사이비 실증과학이 뒤섞인'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 현실을 재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회적 현실을 관찰하여 신중한 정책제안을 가능케 하는 '현실주의' 정신을 가지라고 제창한 적이 있다. 이 저서에서 장하준 교수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카아의 '현실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장 교수는 자신의 방법을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정치경제학을 사이비과학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하여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과학으로 재정립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 교수는 이런저런 현실의 폐해 사례를 극적으로 강조하거나 '사회적 관계와 가치의 파괴'와 같은 도덕적, 윤리적 명제에 호소하여 비판을 전개하고 있지 않다. 사상, 이론, 정책의 세 측면 모두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정면으로 맞서 씨름하면서 (1) 그 사상적 기초와 개념이 대단히 모호하거나 그릇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고 (2) 그것이 주장하는 숱한 이론들이 얼마나 실증적 기초가 박약하거나 현실적 사례에 의해 종종 논박되며 (3) 그 정책적 귀결이 비현실적이고 해롭기까지 함을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더욱이 이 저서 전체에 걸쳐서 장 교수는 한 순간도 글을 '날려서 쓰는' 법이 없다. 치밀하고 촘촘한 논리가 펼쳐지는 가운데 그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된 문헌과 데이터의 양과 규모도 실로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서는 21세기 초에 새롭게 역동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의 발전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경제적 현실주의'의 선언으로 자리매김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안으로서의 산업정책

이 책 1부의 1장과 2장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기둥이 되는 두 개의 핵심 개념, 즉 '시장'과 '국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보통 자유, 효율성, 정보, 자발성 등에 의해 작동하는 동시에 그런 것들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시장'이며 불필요한 규제, 정치적 왜곡, 비효율, 무지, 자유의 억압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국가의 경제개입'이라고 규정해, 전자를 최대한으로 확장하고 후자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운영의 나아갈 바라는 단순명쾌한 주장을 그 사상적 기초로 삼는다.

장 교수의 비판은 이런 식으로 단순하고 모호하게 정의된 '시장'과 '국가'의 개념이 실제 현실에서는 그 발생과 작동 및 운영에 있어서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결국 그러한 단순한 개념화에 기반을 둔 사상적 명제가 터무니없이 단순화된 현실의 희화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대신 시장도 국가도 인간사회 속에서 존재하며 숨을 쉬는 수많은 제도 중 하나로서 현실적으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두 제도에 대한 그릇된 환상이나 신화를 넘어서서 현실의 여러 제도들과 가장 잘 결합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러한 문제와 방안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경제학 방법론으로서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이 제안된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의 틀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주장과 정책적 제안 양자를 반박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2부에서는 먼저 대외경제의 측면, 즉 최근의 경제적 지구화의 담론 속에서 가장 예민하게 떠오르고 있는 세 가지 쟁점을 다루고 있다. 초국적기업, 지적소유권, 산업정책의 문제가 그것이다. 4장에서는 초국적기업이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초국적기업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경제를 개방하는 것만이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여지가 없는 선택이라는 명제를 실증적으로, 논리적으로 부수고 있다. 이를 통해 장 교수는 초국적기업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자대상국이 얼마나 건전하고 수익성 높은 내부적 경제 틀을 갖추고 있는가가 오히려 더 많은 외국투자를 불러들이는 데 관건이 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5장에서는 특히 '지식기반 경제'에서 초국적 지적소유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장치가 필수적이라는 명제가 근본적으로 비판된다. 지적소유권 보장과 경제성장의 관계는 대단히 의심쩍은 것이며, 개도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일방적인 손해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된다.

6장에서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어라 할 '산업정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지구적으로 확장된 세계시장의 역동성 속에서 하나의 국가가 자국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나 이룰 수 있는 산업정책이라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특히 일본, 프랑스 등 산업정책으로 성공한 나라들은 독특한 제도적, 사회적 환경이 그런 정책의 성공요건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경우이며, 따라서 산업정책을 보편적으로 시행할 수도 없고 시행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장 교수는 20세기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는, 서구에서나 제3세계에서나 순수한 '시장경제'보다는 오히려 국가에 의한 산업정책이 더 보편적이었음을 들어 반박한다.

이러한 6장의 논지는 곧 국내경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할 것인가를 다루는 3부의 논의로 이어진다. 2부에서 소위 '지구화로 인한 불가항력의 외적구조 변화'라는 담론을 비판하고 난 뒤 3부는 국내경제를 조직함에 있어서 바로 이 국가에 의한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산업정책 부활만이 오히려 이 지구화 시대의 세계경제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임을 역설한다.

실로 논쟁이 많은 이 주제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 쪽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은 '시장경제' 대 '산업정책'이라는 논쟁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본 뒤, 20세기의 대규모 산업경제에서는 산업정책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시장의 비효율성'을 피할 수 있는 필연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경제이론의 차원에서 입증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 논쟁에서 실로 가장 첨예한 전투장이요 가장 많은 사상자, 피해자가 발생한 장인 '공기업'의 문제, 즉 '공기업은 반드시 수익성이 낮을 수밖에 없는가'를 다루고 있다.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지난 몇십년 간 대학에서, 매체에서, 정계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휘둘러 온 일사천리의 주장,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시대착오에 빠져 있거나 경제법칙의 과학성을 무시하는 철없는 좌파"라고 하던 매도에 속절없이 말문이 막혔던 이라면 이 책의 출판을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그러한 지난 몇십 년 간의 '시장개방'이 과연 지구적 규모에서나 일국적 규모에서나 고도성장과 보편적 풍요와 효율성이라는 낙원으로 우리를 인도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이 우리의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경제성장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고 하던 IMF와 김대중 정부의 경제관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투자, 저성장, 양극화, 투기 붐, 고실업, 가계경제 파산 등의 현실을 모르쇠하지 않는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장하준 교수가 목 놓아 역설하고 있는 "문제는 산업정책"이라는 목소리에 전적으로 공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장하준 교수의 노고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굳이 몇 가지 비판적 문제제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자 한다. 첫째, 산업정책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국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빠져 있어 국가가 여전히 어떤 집권세력이든 자신들의 뜻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로 놓여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이는 프랑스의 정치학자 풀란차스가 지적한 바 있듯이 '제도주의' 정치경제학 일반에 나타나는 편향으로서, 국가를 다양한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과 이익대립과는 무관한,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는 중립적인 제도로 본다는 문제점이다. 1960년대 일본의 국가든 1970년대 한국의 국가든, 그러한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이라는 복잡한 정치역학과 무관하게 '중립적이고, 순수하게 경제적 효율성만을 모토로 하여' 산업정책을 추진한 국가는 없었다. 따라서 21세기의 환경에 걸맞은 산업정책을 추진할 국가는 어떠한 내용과 성격을 가진 국가여야 하는가라는 논의가 빠져 있다면, '국가의 산업정책이 효율성을 담보할 것이다'라는 명제는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이 최고의 효율성을 담보할 것이다'라는 명제나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차원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둘째, 장하준 교수가 제시하는 산업정책의 정의와 그 사례들은 사실상 1980년대 이전의 상황과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산업정책의 정의는 "국가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한 결과를 특정 산업-그리고 그 요소로서의 기업-으로 하여금 달성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 즉 '선별적 산업정책'과 유사한 것이다(265쪽). 하지만 이러한 산업정책은 199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을 필두로 하여 세계 곳곳에서 포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이 책에서 장 교수가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득세로 인한 이념공세가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포기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을 천착하여 그 실정을 좀 더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21세기형 산업정책의 정의와 원칙을 제시하는 작업이 추가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문제는 별개로 볼 수 없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사실상 국가와 기업 양자 모두에게 있어서 '새로운 축적전략'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처럼 효과적인 산업정책을 통한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이라는 축적전략이 포기된 대신에 금융적 기법을 통한 다양한 방법의 재자본화(recaptialization)가 주된 축적방식으로 떠오른 것이 1990년대 이후 지구정치경제의 현실임은 누누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곧 국가의 성격, 기업의 행태, 정책의 선호체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공세에 맞서는 대안은 곧 이러한 변화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성격의 국가, 대안적 성격의 경제주체를 형성하는 전략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책에 제시된 수많은 혜안과 지혜를 좀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벼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이 아닌가 한다. 지금 간절히 필요한 21세기형 산업정책을 수행하는 국가라면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의 공세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광범위한 경제주체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더 공격적인 경제정책을 펼 수 있는 성격의 국가일 수밖에 없다. 즉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국가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해서 시행될 산업정책의 내용도 단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예전의 산업정책과 같은 기술관료적 합리성의 좁은 틀을 벗어나야 한다. 작업장 민주주의의 실현, 노동과정의 인간화, 생태환경의 보전, 나라의 정신적·문화적 고양 등 한 나라의 살림살이인 경제를 운영하는 데서 국가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끌어안으면서 좀 더 포괄적인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하는 틀로 산업정책이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의 세계화를 앞세운 21세기 지구정치경제의 현실에 국가가 역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위한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관점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도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중요한 출발점의 역할을 해줄 것 같다. 이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갖은 '교조'들을 영구불변의 자연법이나 되는 것처럼 외쳐대는 '사이비과학'은 딛고 설 땅을 크게 잃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저서의 위력을 십분 증가시켜 준 두 번역자의 훌륭한 번역문장이다. 시중의 번역서에 나오는 알쏭달쏭한 문장들과 씨름하다 지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이번에는 걱정을 붙들어 매시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이 책을 만들어준 저자, 번역자, 출판사 모두의 노고가 값진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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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울바람의 생각
    from rifflewind's me2DAY 2008-08-30 11:32 
    재벌 제도의 장점이라는 게 기획조정실을 중심으로 ‘계열사간 상호 연계’를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인데, 그 구조를 포기하는 대신 ‘가문의 승계 구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고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선 오히려 거꾸로 됐어야 한다는 게 장 교수의 견해다.
 
 
마노아 2008-08-26 20:12   좋아요 0 | URL
책에서 받은 느낌과 장교수님 얼굴은 많이 다르네요. 좀 더 샤프해 보일 거라고 상상했어요^^;;
로쟈님 페이퍼의 책들은 큰책 링크라서 땡스투가 안 생기더라구요. 책 정보에서 페이퍼에도 안 뜨구요...

로쟈 2008-08-26 20:45   좋아요 0 | URL
옮겨온 글들은 상품 페이지에 노출하지 않습니다. 알라딘의 권고이기도 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6 22:28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 계열인 자유기업원에서 하이에크,미제스의 저서나 그 해설서를 많이 냅니다.아담 스미스의 경제사상도 그들은 신자유주의 식으로 해석하는 것 같더라구요.저는 신자유주의는 포장을 걷어내면 적자생존의 소샬 다위니즘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이기면 충신,지면 역적.

로쟈 2008-08-26 22:32   좋아요 0 | URL
장교수도 미국식 자유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게 순전히 '편의적 자유주의'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만 정당화하는. 그러니 적자생존도 아닙니다. 자기들이 불리한 쪽은 또 철저히 보호하잖아요...

드팀전 2008-08-27 11:45   좋아요 0 | URL
흑색이 아나키스트들의 색이고,녹색이 환경/생태주의의 색, 붉은 색이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의 색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을 '붉은 사마리아인'으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협소한가를 보여주는듯 합니다. 저 정도의 케인즈주의적 접근이나 조합주의적 성향마저 불온으로 파악하는 저열성을 보면 말입니다.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은 지난 번부터 보관함에 넣어놓고 있었습니다. 이념적 지향이 아니라 현실정치 내에서 가능성있는 움직임으로 사민주의를 고려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모든 이념이 정당이 될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예전에 사놓은 박호성의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이 먼저 기다리고 있어서...(사민주의의 역사와 논쟁..그리고 현 시점의 사민주의가 다른 지평을 갖고 있음에도 먼저 사놓은 책이니까 ^^)

언젠가 사민주의 관련 페이퍼도 한번 꾸려주시지요...진보 패셔니스트들 중에는 사민주의로 전향이 쉬울 사람들도 많으니까. 글로만 접하는 알라딘의 진보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사민주의적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우파가 갈 수 있는 최대치의 끝인지...자유주의로의 개량인지...케케묵은 논쟁은 뒤로 하고 현실적으로 만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면 해볼말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국보법이 살아있는 나라에서 그것도 요원해 보이긴 합니다만...

로쟈 2008-08-27 09:41   좋아요 0 | URL
'붉은 사마리아인' 얘기는 그냥 기자의 말실수입니다. 서평을 청탁하면서, "<붉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서평을 부탁한다고 했데요. '불온'하고 '붉은'이 연상작용을 한 것이죠. 장교수는 <붉은 사마리아인들>이라는 제목이 훨씬 좋다며 웃었다네요.^^;

따우리~* 2008-09-23 11:08   좋아요 0 | URL
이런 양질의 도서가 '불온 서적'이라니..
정말 이해가 가지않고요.
역시 군대에 있으면 숭미주의 정신교육에 돌아 버릴것 같았는데.
노무현 대통령 임기말부턴 어찌나 욕하던지..
당연히 군대에 가야만하는 이 사회 제도가 '이념'이라는 단어에 아직도 힘을 실어주는
결정적인 원인인 것 같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강압적인 정신교육을 받으니까요.
그런 교육을 받았던 자들이 결국 이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이 되니까..
이런 악순환이 당분간 계속되겠죠?
저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로쟈 2008-09-23 14:05   좋아요 0 | URL
아직 '생환'하신 지 얼마 안된 모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