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종말'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읽은 가장 유익한 책은 러셀 자코비의 <이데올로기의 종말: 무관심 시대의 정치와 문화>(모색, 2000)이다. 저자는 미국 UCLA의 역사학 교수인데, 주로 지성사 분야의 책을 내고 있으며 국내에는 <이데올로기의 종말> 외에 <사회적 건망증>(원탑문화사, 1992)이 소개돼 있다(저자가 '럿셀 제이코비'로 표기돼 있다. 'Russell Jacoby'이므로 본토에서는 '제이코비'라고 부를 듯도 하지만 일단 처음 소개된 대로 여기서는 '자코비'라고 부르겠다).

 

 

 

 

'자코비'는 최근에 들춰본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탑, 1996) 4장에서도 미국 지성사를 다룬 <마지막 지식인들(The Last Intellectuals)>이 자세하고 언급되고 있어서 다시금 상기하게 된 이름이다(국역본은 <최후의 지성인들>이라고 옮겼다). 알라딘에서는 검색도 되지 않는 책 <나르시시즘의 문화>(문학과지성사, 1989)의 저자 크리스토퍼 래쉬(라쉬)(1932-1994)가 왠지 자코비와 나란히 연상되었는데, 찾아보니 서로 긴밀한 교류를 나눈 사이이기도 하다(래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코비가 추모기사를 쓰기도 했다). 래쉬의 저작으론 <엘리트의 반란과 민주주의의 배반>(중앙M&B, 1999), <여성과 일상생활>(문학과지성사, 2004)이 더 번역돼 있다. 하지만 대표작인 <나르시시즘의 문화>가 절판된 건 유감스럽다. 1970년대 미국문화를 분석하고 있는 책이지만 요즘 우리의 모습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자코비로 돌아오면, 그의 최신작은 <미완성 그림: 반-유토피아 시대를 위한 유토피아 사상>(2005/2007)이며 며칠전에 <마지막 지식인들>과 같이 입수했다. 두 권의 책표지는 이렇다.  

 

모두가 번역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좀 성의껏 소개되었으면 싶다는 것. <유토피아의 종말>의 경우에도 유명한 전문번역가가 나섰지만 어떤 사정에서인지 결과는 상당히 실망스럽다. 처음 읽을 때는 따로 원서를 구할 수가 없어서 대조해보지 못하다가, 최근에 도서관에서 원서를 대출해 묵은 궁금증을 풀어본 결과이다(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정운영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기증도서다. 장서가로 알려진 그의 책들이 도서관에 기증된 덕분에 접해보게 된 책이 개인적으로는 벌써 여러 권 된다. 감사한 일이다). 일단 색인도 빠졌거니와 40쪽에 이르는 미주들을 모두 날려버린 것은 역자나 출판사나 독자에게 별로 배려할 의사가 없음을 말해준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을 독자 말이다. 책의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1955년 1월, 레이몽 아롱과 아더 슐레진저를 비롯해서 수백 명의 저술가와 학자가 밀라노의 국립 과학기술 박물관에 모여들었다. '자유의 미래'라는 주제를 토론하기 위한 국제학술대회였다."(11쪽) 원문은 "In September 1955, several hundred writers and scholars from Raymond Aron to Arthur Schlesinger, Jr., assembled in Milan's National Meseum of Science and Technology to discuss 'the future of freedom.'"

오역의 여지가 별로 없는 서두이지만 번역문은 'September'를 '1월'로 잘못 옮겼다. 물론 실수인데, 첫문장에서의 이런 실수가 암시해주는 것은 번역문이 제대로 교정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암시는 암시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걸 자세하게 말하는 것은 상당한 분량을 요하는 일이기에 이 페이퍼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제목대로 여기서는 '레이몽 아롱'을 떠올리게 된 계기만을 늘어놓을 참이다. 그렇다고 그 계기란 게 거창하게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인용한 문장이니까. 참고로, 아롱과 같이 언급된 '아서 슐레진저 2세'의 책으론 <미국 역사의 순환>(을유문화사, 1993)이 번역돼 있다(분량이 578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이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슐레진저는 "냉전시대 미국의 자유주의 철학을 정립한 역사학자"로 평가되는 사람이다.  

사회학자 아롱이나 역사학자 슐레진저나 거물급 학자들이면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반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이 1955년 밀라노에 모였을 때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이어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데탕트를 선언한 이후였다. 미국과 서유럽은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스탈린식 사회주의와 마르크시즘은 퇴조하고 있었다. 때문에 학술회의장은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장' 같았다고 하며, 한 참석자는 "공산주의가 서구와의 이념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확신에 들뜬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이것이 말하자면 첫번째 '이데올로기의 종말'의 풍경이었다(1장의 제목은 '이데올로기의 종말의 종말의 종말'이며 아직 두번의 반전을 더 남겨놓게 된다).    

 

동갑내기이자 고등사범학교의 동창으로서 사르트르와 함께 전후 프랑스 지성계를 양분했던, 그리고 프랑스 지식인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우파였던 레이몽 아롱(1905-1983)의 화제작 <지식인의 아편>이 발표되는 것이 바로 1955년이다(영역본은 1957년에 나왔다). 내가 갑자기 궁금해진 것은 그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서가 왜 시중에서 눈에 띄지 않을까, 라는 점(뉴라이트들도 아롱까지는 못 챙기는 것일까?). 찾아보니 국내에는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왔었다. <지식인의 아편>(중앙문화사, 1961; 삼육출판사, 1986)은 안병욱 번역이고,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지식인의 아편>(미문출판사, 1983)이라고 만하임의 책과 같이 묶인 건 정하룡 번역이다. 나는 뒤늦은 관심 때문에 여기저기 검색해보다가 <지식인의 아편>을 교보에서 주문했다(삼육출판사본이 아직 남아 있는 걸로 떠 있어서). 지금은 모두 품절이지만 사실 아롱의 책은 <사회사상의 흐름>을 비롯해서 여러 권이 소개된 바 있다. 그 몇 권의 표지 이미지들을 나열하면 이렇다.   

다시 <지식인의 아편>에 대한 자코비의 설명: "마르크시즘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레이몽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은 미국 의회의 무기가 되었다. 밀라노 회의를 주도한 사람으로서, 아롱은 그 책에서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을 선언했다. 이데올로기는 혁명과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혁명과 유토피아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또한 선진 자본주의를 대체할 다른 방안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더 이상 나올 수 없었다."(13쪽) 이 인용문의 첫문장은 역자의 '작문'인데, 원문은 이렇다. "Raymond Aron's The Opium of the Intellectuals, his criticism of Marxism, appeared just before the Party Congress."

<지식인의 아편>이란 책이 '전당대회(Party Congress)' 직전에 나왔다는 말이 어떻게 '미국 의회의 무기가 되었다'는 뜻이 되는지? 게다가 그 '전당대회'는 1956년 2월 소련의 제20차 전당대회를 가리키는 것인데 말이다. 스탈린을 비판하는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이 행해진 바로 그 전당대회다. 아무튼 <지식인의 아편>은 그러한 맥락에 놓여 있는 책이며 나는 지성사와 '유토피아의 종말'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조만간 읽어볼 참이다.

참고로, 같이 읽을 만한 책은, 자코비도 이어서 다루고 있는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1960)이다. 재작년에 <탈산업사회의 도래>(1973)가 뒤늦게 번역되어 화제가 되었지만 국내에도 3-4종의 번역이 나올 만큼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이었다. 물론 이제는 모두 '역사'가 되었다...  

08. 08. 21.

P.S. 자세히 적을 여유가 없어서 간단히 언급하면, 자코비의 한 가지 지적은 1989년 동구권 공산주의 붕괴 이후의 정세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의 정세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때 똑같이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이 대두하는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주장은 (본인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애쓰지만) 다니엘 벨의 주장과 "한치의 차이도 없는 결론"에 이른다. 벨은 1960년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단언했지만 그가 예기치 않게도 1960년대의 시대정신은 곧 급진주의쪽으로 흘러가며 신좌파(뉴레프트)가 장악하게 된다(그것이 1968년 혁명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의 종말의 종말'이다. '역사의 종말'을 구가하던 1990년대가 지나고 우리가 2001년 9.11과 함께 봉착하게 된 것은 '역사의 종말의 종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유토피아의 종말의 종말'이다. 여기에 어떤 '순환'이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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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8-2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전에 봤던 이효인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문화사>에서 한국 영화에 반영되는 쾌락과 나르시시즘에 대한 평가가 래쉬의 저 책에서 나온거였다는 기억이 납니다...기억이라서..^^

로쟈 2008-08-22 10:30   좋아요 0 | URL
저자가 '이효인'입니다.^^

드팀전 2008-08-22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맞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3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사상의 흐름>에 파레토도 나오는군요.경제원론에 나오는 학자는 사회사상이나 정치사상에 잘 안 나오는데 이 양반은 아니더군요.그렇다면 사회사상의 흐름을 사야겠군요.헌책방에 있는 걸 봤거든요.

로쟈 2008-08-23 20:56   좋아요 0 | URL
파레토는 코저의 <사회사상사>에도 나오지 않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3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더 슐레진저 2세의 책 중에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게 케네디 정부 때 보좌관 시절을 회고한 <1000일>.우리나라에선 한림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원본 일부를 뺐다는 데도 엄청나게 두툼해서 읽을 맛이 나죠.드골을 굉장히 비난했던 내용이 기억납니다.그때 독자노선 걸으면서 미국 속을 확 뒤집어 놓던 때라서요.

로쟈 2008-08-23 21:01   좋아요 0 | URL
원서 이미지를 봤는데, 국역됐군요. 대학 도서관들에는 없는 책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3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경제원론에도 나오고 정치,사회사상사에도 나오는 유일한 사상가라는 의미로 쓴 거예요.저는 휴즈<의식과 사회>에서 파레토를 읽었을 때 이 사람이 파레토 최적이론을 만든 그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그 사람 같아서 아...그렇구나...했죠.이데올로기 론에도 나오구요.
코저 책에도 나오는군요.경제사상사에는 파레토가 안 나오는 책이 없는데 사회사상사에는 안 나오는 책이 있어요.역시 경제학 쪽에서 더 많이 취급하는 인물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