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경향신문에서 '정부수립 60주년' 기획기사 꼭지들을 읽었다. 최근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가 내세우는 '건국신화 만들기'에 '지배 엘리트의 승리만 있고 민중의 피나는 투쟁은 없다'란 지적에서 바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벤야민의 역사주의 비판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주의는 승자들의 역사만을 기록한다. 반면에 역사적 유물론은 패자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며 그들을 상기하는 것이다(벤야민의 경고는 따라서 진보주의적 역사관으로는 파시즘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벤야민의 유명한 경구이지만, 승자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다(그러니까 일면 부듯하더라도 양식이 있다면 큰소리로 떠들 것까지는 없는 역사다). 저들의 이승만 건국신화나 북한의 김일성 건국신화나 그러고 보면 한 통속이다. '기적의 역사' '승리의 역사'를 내세우지만 역사관에서만큼은 서로 식별되지 않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경향신문(08. 08. 19) 이승만 건국에서 성공 씨앗 찾는 뉴라이트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가 추진 중인 ‘건국신화 만들기’가 위험한 것은 현대사를 바라보는 몇 가지 인식틀 때문이다. 우선 이들은 한국 현대사가 예정된 성공을 위해 걸어온 과정으로 본다. ‘기적의 역사’ ‘승리의 역사’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이러한 ‘역사 결정론’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이승만의 건국에서 이미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성공의 씨앗이 배태돼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이승만의 건국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적화된 공산국가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라는 우익의 인식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최근 극우 논객 조갑제씨가 했던 “박태환의 올림픽 우승은 이승만, 박정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이 잘 보여준다.
역사 결정론은 한국 현대사가 건국,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이제 선진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단계론’으로 이어진다. 해방 직후 공산화와 북한의 침략을 이겨내고 건국을 달성했고, 이를 토대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며, 그렇게 해서 성장한 중산층이 물적 토대가 돼 민주화까지 성취했으니, 이제는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 다시 제2의 산업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러한 관점의 문제는 이 도식의 레이더 망에 잡히지 않는 모든 것은 역사에서 배제된다는 데 있다. 가령 1948년 제헌헌법의 균등 교육, 토지 균분 등 사회주의적 요소들과 친일파 처벌이라는 민족주의적 의제는 좌우 갈등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정부 차원에서 사라져버렸다. 진짜 건국 정신은 여기에 있는데도 이 정부와 뉴라이트는 그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주류 무대에서는 사라진 듯 했지만 끊임없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의 의제로 남아 이후 87년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는 토대가 됐고, 한국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하는 데 기여해오고 있다.
산업화가 먼저 있었기에 민주화가 가능했다거나 둘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었다는 주장도 그런 점에서 사후 합리화의 성격이 짙다. 민주화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누군가가 ‘빨갱이’로 지목돼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배제될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문제 제기하며 실천하려 노력했던 가치이며 그 결과로 민주화도 가능했다. 산업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민주화를 한 것이 아니다. 산업화가 일어나기 전의 4·19가 그렇고, 이명박 대통령도 참여했다는 6·3 항쟁이 그렇다.
신주백 국민대 연구교수(한국현대사)는 “뉴라이트 역사관으로는 이승만이 4·19 혁명에 의해 쫓겨난 일을 정면에서 주목할 수 없으며, 만주국군의 중위였던 박정희 같은 엘리트 장교 가운데 민족의 운명보다 일본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를 동일시했던 반민족적인 성실한 기회주의자가 여럿 있었다는 점도 문제 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들 역사관의 가장 큰 문제는 지배 엘리트 중심의 역사관, 승리의 사관이라는 점이다. 이는 현대사 논쟁이라고 하면 늘 이승만, 박정희 등의 정치 지도자 얘기로만 이뤄지는 것과도 관계있다. 여공과 식모, 건설노동자, 농민 등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또 짓밟힌 민초들의 삶은 간단히 무시해버리거나 그저 구색 맞추기 식으로 끼워넣는 정도의 인식이다.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한국현대사)는 “역사란 다양한 가능성의 갈등과 그 역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라며 “여러 가능성들 중 현실화된 한 가지 가능성만 보고 희생된 다른 가능성들과 그로 인한 갈등을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이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식의 역사 인식은 과거를 현재에 종속시키려는 태도”라고 말했다.(손제민기자)
08. 08. 19.
P.S. 오늘 읽은 기사의 나머지 두 꼭지는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체성과 건국신화 만들기'(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code=210000&artid=200808181834035)와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의 위험한 현대사 인식'(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code=210000&artid=200808181839225) 이다. 기사에서도 참고자료가 밝혀져 있지만, 이 주제와 관련하여 네 권만 꼽자면, 박찬표의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7), 참여사회연구소가 기획한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한울, 2007), 그리고 서중석 교수의 <한국 현대사 60년>(역사비평사, 2007)과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펴낸 <건국 60년의 재인식>(기파랑, 2008)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