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필요 때문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창, 1996)을 뒤적거렸는데, 이미 알고 있었던 바이지만 한심한 오역들이 속출하여 짜증스러웠다. 원제가 '지식인의 표상(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s)'이지만 '오역의 표상'이라고 해도 무방한 책이다. 이에 대한 맛보기 지적은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 2003)의 1부 3장을 참조할 수 있다. 책은 서경식 교수도 '영향과 격려를 많이 받은 책'이라고 토로하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938368), 한국어로 이 책을 읽고 영향과 격려를 받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참고로, 일본어본과 중국어본의 제목은 모두 <지식분자론>이다). 젊은 세대가 어제의 야구 한일전에서처럼 일본을 '이기고자' 한다면 이런 대목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혹시나 해서 서평을 검색해보니 수년 전 <말>지의 기사가 뜨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제목 그대로 '구조화된 졸속 번역, 부실한 한국 인문학'에 대한 지적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는 게 씁쓸하다.  

말(2001년 2월호) 구조화된 졸속 번역, 부실한 한국 인문학

최근 대학원생들이 발간한 무크지 <모색>은 사제지간이 아니라 도제가 되어버린 대학원생의 실태, 그리고 교수와 학생간 침묵의 카르텔을 폭로했다. "번역을 제자들에게 시키는 것은 그나마 애교로 봐줄 만하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 논문, 심지어 책까지 대부분을 제자들이 집필하는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수천만원짜리 프로젝트의 대부분을 수행한 대학원생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수고비 명목의 몇십만원에 불과하다."

'허리 아래' 이야기는 누구도 공개하지 않듯, 이 공공연한 비밀은 지금껏 우리 모두를 '비밀결사대'로 만들었다. 결사대란 한사코 비밀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해 현실의 상처부위가 내뿜는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폭로했다. 몇 사람(필경 폭로한 사람이리라)이 다칠 테고 문제의 교수는 도덕적인 질책으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도의적 책임을 지고 교수직에서 물러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뒷말이 나올 것은 뻔하다. "왜 나만 갖고 이러냐. 그런 교수가 어디 한둘이냐." 맞다.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한둘이 아닌 상황을 만드는 문화 혹은 구조'로 옮아간다.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의 대역비리는 공모적인 것이 아니라 착취관계에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석박사과정 학생 가운데 지도교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느긋한' 처지는 거의 없다. 출신학교가 평생을 따라다니고, 이후 학문적 행로의 대부분을 결정하는 '순종주의' 풍토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양 철학자 김상봉씨는 이런 현실에서 건실한 학술번역이 나올 수 없다고 꼬집는다. "박사 후 연구원 과정에 지원한 제자에게 지도교수가 학술서적 대역을 요구한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자신의 장래를 쥐고 있는 교수의 요구를 부당하다 해서 거절할 수 없는 입장으로 난처해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학생이 책임 있는 번역을 하리라 보기는 힘듭니다."

"왜 나만.... 어디 그런 교수가 한둘이냐"
지난해 언론과 여론을 들끓게 했던 영어공용어화론의 중심에 있던 소설가 복거일씨는 "모국어와 이별한다는 것은 당장은 쓰라린 일이지만, '큰마음 먹고' 후손을 위해서 한국어를 버리자"고 진심 어린 걱정을 털어놓았다. 영어에 주눅들어 있는 이들에게는 다만 '엽기적인' 농담으로 들리겠지만, 논쟁의 거품을 걷으면 언어기능주의의 뼈대가 드러난다. 당시 복거일씨의 주장에 『신동아』2000년 9월호에 반론을 제기했던 정시호 교수(경북대 독어교육과)가 "언어를 '가지고'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사고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학술서적의 번역을, 해당 외국어를 '좀 하는' 학생들에게 맡긴 교수들은 언어기능주의자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다.

혹은 그들이 '나쁜' 교수이기 때문인가. 그런 면도 없지 않다. 만약 '학자적 양심'이란 것이 있다면 최소한의 양심이 없는 교수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법학전공 C교수가 십 수년 전에 출간한 『위대한 법사상가들』은 일본어로 된 논문을 학생들에게 번역시켜 출간했다는 사실은 이미 학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다. 자연히 오역 투성이에 한글도 아닌 일본어식 표현이 곳곳에서 튀어나오지만, 이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이들은 없었다. C교수는 최근에도 번역서를 자신의 저작으로 둔갑시키는 등 학자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학계의 평가가 이미 퍼져 있다.

오역문제가 공론화된 사례는 물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권력과 지성인』(도서출판 창. 1996)이 번역상의 오류로 인해 완전히 재번역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다.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을 번역해 국내에 사이드를 최초로 소개한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학과)는 지난 1996년 『교수신문』 지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오역사례를 나열하고 재번역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공동번역자인 당시 전모 서경대 교수와 서모 고려대 강사의 반론도 있었다. 지상논쟁은 끝났고, 오역사례는 회자되고 이슈를 낳아 책임 있는 학술번역의 중요성은 학계에 어느 정도 환기되었다.(실제 번역을 맡았던 이는 이름이 실렸던 교수가 아니었다고 한다.)

오역으로만 따지자면 우리 시대의 스승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학문적 존경의 최상급에 위치한 고 함석헌 선생 역시, 일본어 중역으로 인한 과실의 표적을 피할 수 없는 지경이니, 오역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선생의 간디와 칼릴 지브란 번역본은, 일어 외에는 다른 언어를 배운 적 없는 해방 이전 식민지 시대에 공부했던 60, 70년대 지식인들의 공통된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지금껏 검증된 결정적인 오역사례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에서 'trade union'을 '노동조합'이 아니라 '무역협회'로 번역한 경우는 번역작업이 사회현실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는 가장 희극적인 사례이다.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에서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one-dimentional man)이 '평면적 인간'으로, 제랄드 그라프의 '문학에 대항하는 문학(Literature against itself)'이 '자신이 적이 되어가는 문학'으로 오역되는 등, 이들 오역의 심각함은 원서가 갖는 날카로운 현장감과 정치성이 두루뭉수리로 희석되어 버리는 데 있다.

잘못된 번역서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유종호 교수(연세대 국어국문학과)는 번역의 기술적인 어려움에 주목하기도 한다. "출판사에서 다급하게 요구해서 졸속으로 번역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하는 경우 일어와 영어 중역으로 번역을 망치는 경우도 있지만, 번역 자체가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도 간과할 수 없지요."

하지만 '번역은 반역'이라는 문학작품 번역의 원초적 불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번역이 어렵다는 사실에 호소하기에는 국내 학술서 번역의 오류는 이미 정도를 넘어서 있는 실정이다. 인문학 강의실에서 교재로 번역서를 쓰다가 실패했던 경험을 토로하는 교수들이 적지 않고, 번역서를 '해독'하다 결국 원서를 찾아 확인절차를 거치는 낭비는 흔한 사례이다.

번역은 반역 아닌 졸역, 오역인 현실
오역과 졸역의 문제가 영세한 우리의 출판현황과 얽혀 있다는 지적은 비약이 아니다. 특히 인문학 번역서는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저렴한' 비용으로 단기간에 번역되기 일쑤다. 자연히 번역자는 출판사와의 게임에서 제2의 창작자가 아닌 '계약직 노동자'에 불과한 위상을 갖게 될 뿐이다. 굵직한 오역사례가 자주 발생하는 '현대미학사' 역시 그러한데, 전문적인 학술서의 경우 번역자에게 출판의 대가로 인세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저작권 로열티의 일부를 부담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지난해 윤건차 교수의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당대)를 번역한 장화경 성공희대 교수는 번역자가 대접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출판사에서는 두꺼운 학술서적을 두세달 만에 번역해달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엔 꼼꼼히 번역하기 힘들어요. 게다가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한 학술서적의 번역료를 형편없는 인세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 재판을 찍을 때 인세를 챙겨주질 않는 일도 있습니다."

최근 한 일본문학 전문번역가는 출판사가 15일만에 책 번역을 요구하는 황당한 경험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출판사를 악덕기업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출판사와 번역자 모두 척박한 학문현실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학술서적은 대학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서 의무구매하도록 돼 있다. 책값이 비싸고 소장에 적합한 도서관용 하드커버와, 저렴하고 휴대하기 편한 시장판매용 소프트커버의 두 종류로 출판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어떻든 미국의 학술전문 출판사는 좋은 책만 출간한다면 '싸고 빠른' 번역자에게 맡겨 비용을 최소화하는 데 몰두하지 않아도 적자는 면한다.

번역에 손놓고 있는 교수들에게 일말의 면죄부가 있다면, 그건 번역을 연구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학계의 풍토다. 니체의 저서를 영어로 번역한 월터 카우프만이 니체 전문학자로, 롤랑 바르트를 영어로 옮긴 수잔 손탁이 미국에서 바르트에 관해 일가를 이뤘다고 인정받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우리나라에도 리처드 로티를 줄곧 번역해온 김동식 육사 교수가 있지만, 김 교수의 작업을 학문적인 성과로 인정하기보다는 성가시고 고된 작업을 대신 해내서 감사하다는 정도이다.

오역문제를 지적해온 박홍규 교수는 일본과 비교하면서 번역작업의 학문적 가치를 재차 역설한다. "일본에서는 산스크리트어같이 희귀한 언어로 된 저서나 경전의 번역이 탁월할 때는 석박사 학위 논문으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책임 있는 번역판이 구비돼 있기 때문에 원전을 인용할 때도 번역서의 페이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번역물이 '지적인 공유재산'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돼 있지요."

박교수는 졸속한 국내 번역실태에 분기탱천 '번역 윤리'를 언급하고, 급기야 '번역감시단'을 만들자는 주장을 펼칠 만큼 졸역으로 인한 지적태만과 허위의식이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우리말이 학문언어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이미 학계에 팽배해 있다. 김상봉씨는 우리말이 근대적인 학문언어로 성장하는 계기를 번역작업의 활성화에서 찾고 있다. "번역은 우리말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장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국어의 발전이라고까지 봅니다. 졸속한 번역은 우리말을 발음기호로 전락시켰습니다. 가능한 한 우리말을 개발하려고 애쓰고 끊임없이 학문적인 말을 길러내는 것이 철학(인문학}에서 번역작업이 할 일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가 지난해 발간되면서 그간 잠수해 있던 문제의식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번역의 문제조차 근대성이라는 체에 걸러야 하며, 알다시피 우리의 근대라는 체는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번역자 임성모 씨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는 서구, 중국, 일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말하자면 '삼중 번역된' 근대"다. 지금에 와서야 '저항으로서의 번역'(윤지관)이 회자되지만, 그것 역시 삼중 번역된 근대의 상처를 끌어안고 시작해야 할 프로젝트다.



주체적 번역으로 근대성 이룬 일본
반면 일본은 서양 근대의 산물을 일찌감치 철저히 번역해 모방했다. 그 결과 이제 주체적 모방으로 나아가는 활주로를 뚫어낸 것이다. 일본사상사 전공자인 강재언 교수의 구분법에 의하면, 18세기 초반에 네덜란드어 번역으로 난학(蘭學)이 활성화된 사실을 두고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의 갈림길이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2백년 번역 역사를 거치면서 일본은 근대를 형성하고 완성했으며, 번역에서도 '주체적 번역'이라는 역설적인 단어의 배합을 허용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를 증명하듯 얼마 전에는 한 학자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마치 소설처럼 번역해 대단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랜 번역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번역을 괄시하면서 원서와 저자의 권위를 숭배하는 국내 학계에서는 언간생심 생각지도 못할 시도다.

이제 오역(욕?)의 역사를 마감할 시기라는 의식은 합의에 이르렀다. 한길사에서 출간하고 있는 그레이트북스 시리즈처럼 정전들을 '번역'하여 우리의 고전으로 '변형' 시키는 기초작업이 절실하다. 학문 식민주의, 원서 숭배를 벗어나면서 창조의길을 모색하는 출발점은 오히려 철저히 '번역의 시대'를 겪어내는 데 있다. 그것만이 서구 근대의 오류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한다면 학술번역의 막중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이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보며 다시 새길 교훈이다.

제도적으로 학술번역을 육성할 필요도 있다. 다행히 그런 움직임도 미약하나마 포착된다. 학술진흥재단에서는 올해 번역지원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교육부에서 지난달 초 발표한 '2001 학술연구 지원 기본계획'에 따르면 동서양 학술 명저와 고전 번역사업 지원비가 10억원으로 확대됐다. 다만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섣부른 당위를 내세워 우리 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에만 집중투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제도 바깥에서 가능한 것이 인문학이므로 제도적 개선은 출발이 될지언정 도착점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이옥진기자)

08. 08. 17.

P.S. 이후의 상황과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재작년에 나온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연속해서 참조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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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tuepeak 2008-08-17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 교수의 저작 목록이 제법 긴데 몇 개 읽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냥 다양한 주제를 놓고 요약 정리한 수준밖에 되지 않던데, 저런 사정이 있었군요..

로쟈 2008-08-17 23:53   좋아요 0 | URL
법학 교재들의 표절 시비도 있었지요...

book소리 2019-01-13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제목의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각각 출간했더군요. 이런 경우 괜찮은 책이라 훗날 다시 출간했거나 이전 책이 번역상 문제가 있어서 번역을 다시하여 재출간 했을 거 같아 두 책을 동시에 펼쳐두고 비교해보면 재밌겠다 싶어 둘다 책꽂이에서 꺼내 들었습니다. 98년 아무 곳이나 펼치고 몇 줄 읽었는데 제가 영어문장을 읽고 이해했을 때의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것이라는 대명사를 그대로 옮긴다거나 더욱 더 추구한다 같은 부분에서는 도대체 무얼 더 추구하는가 싶어 추구의 대상을 앞뒤로 수색했네요. 그래서 같은 부분을 12년 판에서 찾아보고 다른 부분도 이런 방식으로 몇 군데 비교읽기를 해보니 처음엔 거친 번역에 실망했다가 나중에는 원서를 구해서 직접 해석해보고 두 권과 비교해보면 영어실력이 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번역을 꼼꼼하게 하고, 자국어로 글을 잘 엮어 내는 문화가 확고히 자리 잡을 때야 비로소 한국의 학문 역량이 세계와 견줄 준비가 될 것 같습니다. 번역자에게만 문제가 있다면 번역자만 비판하면 되는데 번역 관련 전반적인 토대가 문제라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거 같다는 게 문제죠. 영어 강의를 한다느니 외국인 학생을 유치한다느니 등등의 억지 코스프레 글로벌 대학을 운운하는 거 보면 처음에는 씁쓸하다가 종국에는 쓸쓸해지더군요. 카우프만이 여러 생각이 들게 하다가 로 선생님 블로그까지 오게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