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사회주의 운동사'란 마이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그 계기가 되었던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75). 임경석 교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08)에 관한 것이다. 러시아 자료에 대한 언급이 눈길을 끈다.

시사인(08. 07. 29) 한 역사학자의 혁명가 ‘발굴기’

대략 7년 전 일이다. 2001년 10월21일. 역사학자 성대경 교수(전 성균관대·사학)와 그 제자인 교수·연구원 7명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경남 창녕에 있는 고택의 한 귀퉁이였다. 당시 빨치산 생존자 성일기씨가, 자기와 함께했던 빨치산 부대 사령관이 어떤 문서를 작은 항아리에 담아 파묻었다고 증언한 곳이다. 한나절을 팠다. 구덩이가 넓고 깊어졌다. 그리고 유리병이 나왔다. 그 안에는 빨치산 부대 ‘제3지대장’ 남도부의 ‘비장문건(秘藏文件)’이 들어 있었다. ‘비밀스럽게 숨겨두는 문서’였다. 소설가 이병주가 쓴 대하소설 <지리산>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알려진 빨치산 남도부. 그가 작은 공책에 당시 상황을 소상히 연필로 적어둔 것이었다. 유품이 발굴되자 예순아홉 살의 빨치산 생존자는 울었다. 그곳에 무언가 파묻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서,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무엇이 또다시 자신의 삶을 옭아맬까 공포스러워 50년 동안 비밀로 간직했던 노인은 오랫동안 꺼억꺼억 울었다. 회한의 눈물이었다.



당시 ‘문서 발굴’에 참가했던 임경석 교수(성균관대·사학)가 최근에 펴낸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일제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혁명가 9인의 초상을 그렸다. 윤자영,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강달영, 김철수, 고광수, 남도부, 안병렬.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남한에서 잊힌 사람이다. 임경석 교수는 “사료를 통해 논리적 인과관계를 찾는데, 간혹 감정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사료를 읽는 도중에 만났던, 눈길을 거두기 어려웠던 사람들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모아두었다”라고 말했다. 2000년부터 계간 <역사비평> 등에 연재했고, 2006년까지 쓴 글 여덟 편을 모았다.

임경석 교수는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를 연구해온 역사학자이다. 그가 대학원에 진학했던 1982년에만 해도 한국사 연구 대상은 주로 1919년 3·1운동까지였다. “3·1운동 이후로 가면 사회주의적 운동이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 풍조에서도 중요한 현상이 되기 때문에 연구 자체가 불온시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의식을 가진 젊은 연구자들은 3·1운동 이후를 연구하는 것을 일종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4800여 명의 ‘이명 사전’ 만들기도

당시만 해도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일본 관헌 문서 정도였다. 그것도 접근이 어려웠다. 강덕상, 박병식 등 재일 한국인 연구자가 평생을 바쳐 일본에 있는 ‘식민지 조선’ 관련 자료를 모았는데, 그 자료집이 주된 연구 자료가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학계 내에서 ‘몰래 복사본’이 유통되었다. 자료난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한 이후였다. 소련 밖의 나라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한 내밀한 자료가 모스크바에 있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1993년부터 이 자료가 서방 학자에게 개방된 것이다. 임경석 교수도 그 공개된 자료를 참고해 박사 논문 <고려공산당 연구>를 마무리했다.

“러시아에서 공식 출간된 조선 관계 자료만도 대단한 연구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1990년 봄부터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1994년, 1995년 러시아에서 1년6개월 동안 머물며 문서보관소로 출근했다.” 러시아에서도 난관이 많았다. 문서 한 장을 복사하는 데 1달러20센트였고, 연구자 1인당 복사할 수 있는 양이 1년에 최대 1000장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 유학 중이던 전현수 교수(경북대·사학)의 도움을 받아 문서보관소 직원과 친분을 쌓아 비용과 복사 분량 제한 문제를 그럭저럭 풀었다.

임경석 교수의 연구실 한 면에는 러시아에서 복사해온 자료가 빼곡히 차 있었다. 연구실 중앙에 책장을 마련해 한두 사람이 앉으면 꽉 찰 정도였다. 임경석 교수가 자료와 싸우는 ‘현장’이다. 사료를 읽다 보면 또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해 동일 인물의 이명을 찾는 일이었다. 임 교수는 사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가명을 인물별로 출처를 표기해 정리했다. ‘이명찾기 사전’이다. 근 20년 동안 갱신한 인물들이 4800명가량 된다. 

임경석 교수가 이번에 쓴 책은 잘 읽힌다. 시대와 정면으로 맞선 인물들의 고뇌가 느껴진다. 그래서 임 교수에게 ‘문학적’이라고 물었다. 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학은 행위의 사슬로 인과관계를 구축한다. 때로는 인간의 행위만 건조하게 남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줄밖에 안 되는 인간의 행위라도 그 현장에서 겪은 내면은 우주적 고민을 담을 수도 있다. 어떤 행위와 결합한 그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내 공부의 목표이기도 하고, 역사가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임경석 교수는 책에 나온 인물을 ‘중음신’이라고 했다. 사람이 죽어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 49일 동안 떠도는 것을 이르는 불교 용어다. 반공 이데올로기로 남한에서 잊힌 인물들. 그리고 북한에서는 종파로 몰려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 그는 그 인물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그래서 아직 스스로 지켜야 할 ‘공부 약속’이 많이 남아 있다.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후속편을 써야 한다. 1920년대 조선공산당을 내재적 방법으로 해명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 임시정부 시절  자금을 횡령했다고 알려져 암살당한 초기 사회주의자 ‘김립’이라는 인물을 다룬 <암살>이라는 단행본도 준비 중이다. 횡령 여부에 대해서는 당시 코민테른이 임시정부에 지원한 독립자금의 성격과 관련해 달리 볼 부분이 있다.” 임경석 교수의 책상에는 러시아어로 쓰인 복사본 문서가 놓여 있었다. <암살>을 쓰는 데 주요하게 참고할, 코민테른의 결산 보고서였다. 그는 오래된 사료에서 한 인물을 ‘발굴’하고 있었다.

08.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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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8-08-05 21:58   좋아요 0 | URL
철학을 전공한 저는 사학과 수업에서 글을 쓰기위해 읽어야 했던 그 엄청난 사료앞에서 항상 좌절하곤 했습니다. 임선생님의 수업을 안 들었던 것은 약간 후회되긴 하지만, 다른 수업에서 <한국사회주의의 기원>을 읽으며 '아, 이런 책을 쓰려면 도대체 얼마만한 시간과 공력이 들어야 하는가' 암담했던 좌절의 기억만 떠오릅니다.

지금도 역사관련 서적을 보면 책 속 한줄을 쓰기 위해 얼마만큼의 사료를 읽어야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면 항상 두려움과 함께 경외감이 먼저 듭니다. 제도권 공부의 엄정함만은 짧은 기간에도 톡톡히 맛봤던 셈이지요.

그러한 고생을 톡톡히 하고 나면 서평에서 한줄로 씹어제끼는 재기발랄한 글들이 그저 왕재수발랄한 지저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금도 비평 한줄보단 원사료 한줄에 대한 해석의 노고가 더욱 소중하다 생각하고요.

간만에 임경석선생의 글을 꺼내 쓰다듬으며 써야할 논문을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합니다^^;

로쟈 2008-08-05 21:59   좋아요 0 | URL
그게 분야마다 적성이 따로 있나 봅니다. 그런 작업에도 '흥미'와 '재미'를 느껴야 계속할 수 있는 것이죠.^^;

열매 2008-08-05 22:0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엉덩이가 무거워야 할 뿐만 아니라 나름의 사명감이 있어야만, 또 그 사명감을 뒷받침해줄만한 경제력이 있어야만 그 사료들을 읽어낼 수 있을겝니다^^

로쟈 2008-08-05 22:09   좋아요 0 | URL
네, 엉덩이와 돈!..

노이에자이트 2008-08-05 22:17   좋아요 0 | URL
전에 소개해드린 노가원<남도부>말고 반공물 중에 남도부 체포하는 내용이 김중희<한국전쟁>제 10권에 있습니다.전형적인 반공물이지만 시나리오 작가 특유의 스피디한 문체에다가 상당한 자료를 섭렵한 방대한 기록물입니다.이 책을 통해서 빨치산들이 휴전 이후에도 남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남도부도 1954년 정월에야 대구시에서 생포됩니다.혹시 나시찬이란 배우 기억하세요? 40이 못 되어 요절한 배우인데 KBS<전우>에서 김소위 역을했죠.그때 전우의 시나리오 작가가 김중희 씨입니다.제가 꼬마였을 적의 일이죠.

로쟈 2008-08-05 22:34   좋아요 0 | URL
네, 나시찬 기억하죠. 저도 꼬마였을 때.^^

노이에자이트 2008-08-05 22:20   좋아요 0 | URL
기사내용 중 재일 한국인 연구자 강덕상,박병식이라고 나오는데 박병식이 아니라 박경식입니다.일제시대사 전공자로 강덕상,강동진과 함께 늘 손꼽히는 대가입니다.우리나라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가 번역되어 있는데 책 뒤에 소개된 일제관련 자료와 일제시대 연표가 정말 유용합니다.

로쟈 2008-08-05 22:33   좋아요 0 | URL
이 주제에 관해서는 따로 비블리오그라피를 쓰셔도 되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5 22:45   좋아요 0 | URL
연구자를 위한 독서안내 식의 글을 써볼까요? 일제시대사와 해방 이후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로쟈 2008-08-07 12:18   좋아요 0 | URL
네, 기대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5 22:46   좋아요 0 | URL
로쟈 님은 꼬마였을 때보단 좀 나이가 드셨을텐데...

로쟈 2008-08-07 12:18   좋아요 0 | URL
저는 그렇게 연로하지 않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7 12:35   좋아요 0 | URL
그래서 좀 나이가...했지 많이 나이가...이렇게 한 건 아니잖아요.다 아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