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끄려다가 얼떨결에 읽게 된 지난주 시사인의 기사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42). 스크랩해놓는다고 하면서 깜박 잊고 지나갔었다(얼마전 번역/오역과 관련한 글을 쓸 일이 있었는데, 미리 사건이 터졌다면 흥미로운 사례로 들 뻔했다). 생각난 김에 챙겨놓고 눈을 붙여야겠다.

시사인(08. 07. 15) 한국 번역사에 길이 남을 일

만세. 오역하면 처벌된다. 학식이 드높으시고 글공부의 깊이가 한량없으신 검사 다섯 분이, 무려 다섯 분이, 문장 하나하나의 오역을 이 잡듯이 뒤져주신다. 온갖 오역과 짜깁기 번역에 오랫동안 신음해온 우리 지식계에도 드디어 서광이 비치려나? 초고 제출 요구에다 압수 수색까지 해서 엉터리 번역자와 출판사를 아주 요절을 내주시려나?

번역 일을 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이번 <PD수첩>에 대한 검찰 수사는 정말이지 인상 깊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마지막 대사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니까”라고 번역해낸 것이 가장 유명한 명번역이었다면(참고로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PD수첩> 오역 논란도 한국 번역사에 길이 남을 일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설마 이걸로 처벌받는다면 말이다.

광우병에 걸린 것이 아닌지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아레사 빈슨의 어머니는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Actually I could not understand how my daughter could possibly have contracted…the possible…human form of mad cow disease.”

즉, “인간 광우병이라니, 그런 희귀한 병이 대체 어쩌다 우리 딸한테 생겼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라는 뜻이다(방송 내용으로 보아 이 말 뒤에는 “농장 주변에 간 적도, 외국 여행을 간 적도 없는데”라는 구절이 덧붙었다). <PD수첩>은 “사실은 내 딸이 인간 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번역한 자막을 내보냈다.

그런데 검찰은 “우리 딸이 광우병에 걸렸을 리가 없다”라고 번역했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처벌해야겠다고 한다. 하늘에 떨어지는 해를 보며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처벌한다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

만일 누군가가 “폐암이라니 정말 모를 일이다. 우리 남편은 평생 담배도 피워본 적 없고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남편이 폐암에 걸렸을 리가 없다”라고 해석해서 알아들어야 하는가? 게다가 “폐암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번역하면 처벌받아야 하는가?

삼성 특검도 검사 한 명에 검사보 세 명이었는데
물론 <PD수첩>이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논조로 내용을 몰고 가긴 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라면 ‘한국 경제 대폭락 다가온다’ ‘중국 올림픽 분위기 썰렁’ ‘아침 걸러도 살 안 쪄’ ‘촛불시위 과격 양상’ ‘해삼 멸종 위기’ 등등의 기사 작성자도 죄다 조사하고 처벌할 일이다. 마음먹고 보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굳이 한쪽 면만 부각시킨 ‘왜곡’을 저질렀으니 말이다.

<PD수첩> 수사는 명예훼손 건이라 한다. 정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의 명예를 어마어마하고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떨어뜨린 ‘미국 동물성 사료금지 오역사건’부터 수사하라. 검사 다섯 명을 배치해서. 번역 초고 제출을 요구하고. 불응하면 농림수산식품부 청사를 압수 수색해서라도. 누군가가 그랬다. 삼성 특검도 검사 한 명에 검사보 세 명이었는데, 번역을 잘했니 못했니 하는 일에 검사를 다섯 명이나 투입한다고.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최내현_월간 판타스틱 발행인)

08.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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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7-23 08:48   좋아요 0 | URL
검사들이 고시공부하느라 영어를 못했나보지요...그래서 5명이 필요한가봐요..지금 사전 뒤적이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러니까 맹박군이 '영어공용화'이야기를 꺼냈나봅니다.
역설적이게도 온 국민이 영어에 능통하다면 저 문장을 가지고 쪽팔리게 자동차면허를 제외하고 최고의 국가고시라고 하는 사시출신 검사5명이 머리대고 앉아서 사전 뒤적일 필요도 없을텐데...

하여간 저도 영어를 잘하고 싶어요.예전에 좀 탄력받았을 때 계속했으면 좋았을 것을.직무상관도가 영 떨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안하게 되요. 요즘은 다시 관심이 갑니다. 전 우리 아이도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어요.(이거 또 오해받기 좋겠지만...) 외국애들이랑 자연스럽게 의사소통하고,또 영어로된 어려운 책도 따로 번역없이 술술 읽어나가고...더 넓고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영어학원 다닐때 수업시간에 무식한 영어선생이랑 무식한 영어잘하는 학생이 무식하게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제 생각은 100이나 그걸 50밖에 설명하지 못하니까 돌겠더라구요.

며칠전부터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신곡 강의>를 보고 있는데 다시금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느낍니다. 여러 판본의 번역문을 짧게 비교해주고 있어서지요.그걸 읽다보면 번역의 미묘한 차이가 주는 미적 감각의 다층적인 차이에 대해 짧은 감탄을 쏟습니다. 모든 국민이 다 영어를 잘할 수 없으니 번역가를 키운다는 일본의 방향성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대안이 아닐까 합니다.

로쟈 2008-07-23 21:55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교수의 책을 읽다 보면 일본 인문학이 만만찮게 느껴지지요. 우리도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노이에자이트 2008-07-23 23:00   좋아요 0 | URL
음...요 문장을 제가 아는 울프 여사에게 물어봐야겠네요.러시아어도 하는 캐나다 여성이랍니다.

로쟈 2008-07-24 22:07   좋아요 0 | URL
한국어도 잘해야 하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5 17:22   좋아요 0 | URL
물어본 결과 검찰의 해석은 틀렸고 피디수첩 것도 맞는 것은 아니라는데 영어가 딸려서 울프여사의 말을 잘 못알아 먹었어요.영어 그만 두고 예전처럼 한자 강의를 해야 하나 봐요.이렇게 영어가 어려워서야 원...가정법이 어렵긴 어렵네요.영어 하기 싫어...

로쟈 2008-07-25 17:34   좋아요 0 | URL
이도저도 안 맞으면 재판 오래가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