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에 읽은 시사인의 출판리뷰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37#). 평론가 정홍수의 <소설의 고독>(창비, 2008)을 다루고 있는데, 이 평론집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리뷰도 술술 읽힌다. '문학이 된 평론'의 사례들이어서일 게다.
시사인(08. 07. 15) 어? 평론집이 술술 읽히네
영화평론은 영화가 될 수 없고 음악평론은 음악이 될 수 없지만 문학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다. 문학평론이 가장 위대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문학평론은 그만큼 특수하다는 얘기다. ‘뭔가’에 들러붙어서 바로 그 ‘뭔가’가 되는 유일한 글쓰기다. 이것은 축복받은 특수성 아닌가. 그렇다면 문학평론이 문학이 되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하면 문학이 되는가. 정답은 내면과 문장이다. 진리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격랑을 드러내는 목소리, 무색무취의 보편 문장이 아니라 스타일에 대한 고집으로 충전된 문장을 갖추면 된다.
이 간단한 정답을 어떤 이는 모르고 또 어떤 이는 모른 척한다. ‘모르는’ 분이야 그렇다 쳐도 ‘모른 척하는’ 분이 많다는 것은 좀 문제다. 나는 문학평론만큼 보수적인 ‘글쓰기 제도’를 알지 못한다. 후자인 분들은 평론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내면이나 문장 따위가 아니라 통찰과 논리라고 점잖게 말씀하신다. 맞다. 좋은 글을 만드는 힘의 90%는 통찰과 논리가 감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좋은 ‘글’일 뿐이다. 좋은 칼럼·보고서·논문과 다르지 않다. 나머지 10%에 해당하는 것이 내면과 문장이다. 바로 그 10%가 평론을 ‘글’이 아닌 ‘문학’으로 만든다.
오랜만에 ‘문학이 된 평론’의 사례가 있어 소개하려 한다.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첫 번째 평론집 <소설의 고독>(창비)이다. 문학평론집을 소개해도 될까 주저했다.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본래 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평론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동시대 한국 문학의 세부 주제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가 그 주제에 대한 추상적 논의를 따라가는 일 역시 어렵다. 이를 다 무릅쓰고라도 읽어보시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억지다. 그러나 이 책은 읽어도 된다. 내면과 문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평론이기 이전에 고급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1부와 3부의 계간평과 월평 특히 좋아
먼저 문장. “이제 조금 이혜경 소설에 눈이 익어가는지, 어지간히 고단하고 아픈 이야기가 나와도 타박타박 따라가며 기다려보고 싶다. 어스름녘의 착잡함을 견뎌보자 싶다. 그냥 안타까움 속에 지칫거리며 고갯마루에 서 있어보자 싶은 것이다. 뭐, 크게 환해질 일이 있겠는가. 숨을 고르며. 욕하지 않으며. 말하지 않으며.” 예컨대 평론가 정홍수는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 돌을 씹어 먹는 듯한 맛의 도입부 때문에 지레 읽기를 포기하게 되는 수많은 평론과는 뭔가 다른 출발 아닌가. 어떤 작가 혹은 어떤 주제를 다루건, 글의 도입부가 이러하다면 한번 따라가볼 만한 것이다.
다음으로 내면. 이인화가 독자를 계몽하려 하는 비장한 이야기꾼이 된 게 못내 불편했던 이 평론가는 본래 소설은 계몽하지 않음으로써 계몽한다고, 소설은 본래 그런 비장이나 독선과 싸우는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이런 문장을 적는다. “나는 아직도 이야기꾼으로 스스로를 격하시키지 못한 소설가들, 그들의 기억의 ‘외딴방’ 그 ‘외진 골목’에서 힘겹게 끄집어내 들려주는 그 내면의 고백들, 거기에서 출발한 ‘한국의 순수문학’을 사랑하니까.” 평론가의 이런 소박하지만 결연한 ‘내면의 고백’을 다른 평론집에서 만나기 쉽지 않고, 그 내면이 책 전체에 은은하면서도 완강하게 배어 있는 평론집을 만나기 또한 쉽지 않다.
이런 문장과 내면이 떠받치고 있어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아주 드문 평론집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1부와 3부에 수록돼 있는 계간평과 월평이 좋다. 2004년과 2006년에 발표된 소설 중에서 뛰어난 것을 선별해 어떤 내용인지를 소개하고 왜 좋았는지를 다감하게 털어놓는다. 특히 3부의 앞부분에 수록돼 있는 서간체 평론 예닐곱 편은 이 책의 백미다. 절친했던 문우 고 김소진에게 바쳐진 글 두 편에서는 이 평론집의 심장이 뛰고 있으니 그것들은 각별히 아껴 읽어야 한다.
평론가 정홍수는 1963년에 태어나 1996년에 등단했다. 정확한 안목을 갖고 있어 평가에 헛다리를 짚는 일이 없고 냉철한 평형감각을 갖고 있어 제 흥에 취한 경박한 호들갑도 없다. 글쎄, 평론가라면 가끔은 무모한 베팅도 하고 세상의 취향과 독야청청 싸우기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신 그는 다른 일을 해왔다. 발터 벤야민은 장터에서 ‘구라’를 푸는 과거의 이야기꾼과 골방에서 내면을 파먹는 근대의 소설가를 대조하면서, 소설은 고독한 개인의 작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이야기꾼과 소설가’). 이 평론집의 제목 ‘소설의 고독’이 거기에서 왔다. 그 고독과 소통하는 일이 지난 12년 동안 그의 일이었다. 사려 깊고 겸허하고 다정다감한 이 ‘한국의 순수문학’ 애호가 덕분에 많은 소설가가 잠시나마 고독을 잊었을 것이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8. 0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