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있던 신문지들을 버리려고 꺼냈다가 어제 읽은 기사가 다시 눈에 띄었다. 최근 번역돼 나온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나남, 2008)의 번역자 백창재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다. 두 권짜리나 되니 당장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인문학의 즐거움>(휴먼&북스, 2008)에서 '미국 인문학의 기원'에 대해서 잠시 들여다볼 수 있었던 기억 때문에 이 책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대략의 윤곽 정도는 아래 기사에서 챙겨볼 수 있다. 학문의 대미 종속에 대한 문제의식도 덩달아 챙겨두면서...

경향신문(08. 06. 02) “국내학계 美사회과학 신화 깨야”

“미국 사회과학의 보편성과 역사성이 한국에도 유효한지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미국 사회과학은 한국이 그대로 따라야 할 ‘보편’이 아닙니다.” 백창재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48)가 최근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 1·2’(나남)를 같은 대학의 정병기 연구교수와 함께 번역, 출간했다. 지난 29일 만난 백 교수는 미국 지성사 연구의 대가인 도로시 로스의 이 책을 번역한 이유를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국 학문은 오랜 기간 해외의 영향을 받아왔다. 중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의 영향이 컸지만 해방 후에는 미국 학문, 그중에서도 사회과학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적 사회과학’이라는 말을 하면 즉각 사회과학은 보편적 학문이어야 한다는 반론이 나옵니다.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는 만큼 ‘한국적’ ‘미국적’ 이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번 책에서 보론과 해제를 통해 밝혔지만 백 교수는 미국 사회과학의 과학성 또는 보편성에 대한 한국 학계 내 신화가 더 깨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가 로스의 논의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미국 사회과학에 담긴 ‘과학주의’ 문제다. 로스의 논의는 미국이 구대륙과 다르다는 ‘미국 예외주의’에서 출발한다. 예외주의의 대상은 계급갈등에 시달렸던 유럽 자본주의 또는 유럽 정체(政體)였다. 미국이 예외이려면 계급갈등 없는 산업화를 이뤄야 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사회과학자들의 책무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 예외주의는 자유주의와 결합됐고, 사회과학계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합의가 만들어졌다. 또 사회과학자들의 근본문제는 사회를 어떻게 관리·통제하느냐에 맞춰졌다. 단기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과 통제의 사회과학’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사회과학은 추상적 체계와 계량적 측정기법으로 고착됐고, 이것이 ‘과학주의’라는 이름으로 보편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백 교수는 “미국 사회과학은 미국의 특수한 사회적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나온 역사적 산물”이라며 “그것은 일상적·실용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익숙해져, 거대 사회문제가 생겨도 볼 수 있는 도구가 없어지는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명해진다. 미국 사회에 비해 변화와 갈등이 여전히 중대한 문제로 남아있는 한국 사회에서 미국 사회과학의 보편성·과학성을 중시하는 것이 얼마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모습인지.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박사들이 국내 주요 대학 교수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은 간단해 보이는 이런 문제조차 인식하기 어렵게 한다.

백 교수의 이번 번역은 학문마저 미국 종속성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더 의미가 있다. 일부 사립대에 이어 서울대마저 교수임용과 승진 심사에서 톰슨사라는 미국 민간기업이 만든 ‘사회과학인용지수(SSCI)’ 논문 게재 실적을 요구하는 규정을 마련 중이다. 백 교수는 “창피하고 비극적”이라고 했다. “SSCI 실적을 쌓으려면 한글로 써야 적합한 논문조차 영어로 써야 하는데, 해외 학자들은 왜 그러는지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SSCI 실적을 요구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마 지구상에서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합니다.”

백 교수도 미국 UC버클리에서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국내에 들어와 10년쯤 지나니 사회과학이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외에도 이런 생각이 들더란다. “미국은 학계가 두꺼워 더 이상 쓸 주제가 없을 정도입니다. 한 명의 학자가 큰 건물에 벽돌 하나씩 채우듯 꽉 맞물려 돌아가는 거죠. 우리는 미국처럼 벽돌 하나씩 채워 집을 짓기엔 학계가 빈약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담벼락 하나 쌓거나 벽돌 여러 개 채우는 걸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 전공(미국의 대외정책) 외에 이런 문제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손제민기자)

08. 06. 03.

P.S.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론 '학문 주체화의 새로운 모색'이란 부제를 가진 <우리 안의 보편성>(한울, 2006)이 있다. 묵직한 책이긴 하나 별다른 반향 없이 묻혀 버린 책이기도 하다(나부터도 무게와 가격이 부담스러웠으니). 그래도 찾아보니 소개기사 정도는 챙겨두었었군(http://blog.aladin.co.kr/mramor/907805).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학문 속의 미국>(한울, 2003)도 관련도서다. '미국적 학문 패러다임 이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그 부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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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rad 2008-06-03 20:58   좋아요 0 | URL
제가 무슨 피해의식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서구의 신화를 깨야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대부분 유학 갖다 온 분들이더라구요. 역시 큰 물에서 놀아봐야 하는 건가요...

로쟈 2008-06-04 00:08   좋아요 0 | URL
그런 면도 없진 않습니다. 탈식민주의 이론 같은 게 대표적인데, 많은 부분 미국 대학의 엘리트 담론이었으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6-04 00:12   좋아요 0 | URL
역시 미국사회 과학 특유의 추상적 체계와 계량적 방법에 대한 고전적 비판은 밀즈<사회학적 상상력>이죠.이해찬 씨가 휴학중 번역한 모양입니다.저는 지금도 종종 봅니다.
국내 연구서적으로는 권용립<미국-보수적 정치문명의 사상과 역사>역사비평사1991이 좋았어요.특히 초기 미국사 해석에 대한 논쟁,보수적 복음주의 개신교의 영향 등이 자세히 나와있어서 좋았습니다.근데 좀 어렵더군요.
박정희 시절 국적있는 한국적 사상이란 시각에서 쓴 대표적인 글로 박종홍 씨 글을 많이 거론합니다만 신일철 씨의 글도 중요하다고 봅니다.신일철 한국사상서설.이 글은 신일철 외 저<한국의 사상가12인>현암사 현암신서26 서문입니다.한국적 민족주체성 냄새가 물씬 풍기죠.
역시 이런 문제는 학문의 보편성 특수성 논쟁과 얽히게 마련인데 정통 맑시즘 시각에서 이 문제 다룬 것으로 이진경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이 괜찮았어요.특히 제3장.독일 문헌을 자유자재로 인용한 것이 부러웠어요.

로쟈 2008-06-04 00:10   좋아요 0 | URL
밀즈의 책은 고전이고, 권용립 교수의 책은 새롭네요. 박종홍, 신일철 교수의 책들은 별로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미국식 학문의 대안이 '민족주의 국학'이라고 생각되진 않아서요. '우리 안의 보편성'을 찾아내고 이론화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6-04 00:17   좋아요 0 | URL
그래요.국학...그들도 그런 소신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박정희 식 민족주의 냄새가 너무 나지요.그런데 이런 식의 민족주의가 보수적 한국사학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요즘은 이태진 한영우 식의 민족주의가 그 계열 같아요.고종 살리기나 박정희 살리기라는 공통점으로 뭉쳐 있구요.
저는 요즘 프랑스 철학에 심취한 이후의 이진경 씨 책은 안 봤어요.예전 자신의 사과방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로쟈 2008-06-04 18:11   좋아요 0 | URL
책을 다시 낸다는 것으로 보아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2008-06-04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6-04 18:09   좋아요 0 | URL
빠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6-05 23:45   좋아요 0 | URL
개정 사과방 서문에는 전향의 변이라도 써야겠네요.

로쟈 2008-06-06 12:02   좋아요 0 | URL
책이 나와보면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