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학교 연구실에 다녀온 사이에 전화선 공사를 하는 바람에 서재가 폭탄을 맞은 꼴이 돼 버렸다. 주로 바닥에 쌓아놓았던 책들이 뒤죽박죽이 된 탓에 마침 읽어보려던 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저런 시름이 늘어서 가뜩이나 찌푸린 날씨 같은 기분인데 책들마저도 '비협조적'이니 무얼로 울적함을 달래야 할는지. 예전에 쓴 시나 한편 옮겨놓는다. 접시에 코라도 박고 싶은 마음에...

Lost Highway

불안은 종이들을 잠식한다

어느 한순간이다, 한순간 불안은 종이들을 잠식한다 
어느 한순간 깨알같은 생의 일지(日誌)들은 백열등 아래 잠 못 이루며
얇은 가슴팍 갈피마다 눌러 적힌 글자들을 뒤적여야 한다
무얼 자백하고 무얼 숨겨야 할 것인가
언젠가 부질없는 마음이 긁고 간 이 치욕스런 오점들
언젠가 다시 불꽃 속으로 사그라질 이 덧없는 회한들
어느 한순간이다, 바로 한순간 불안은 종이들을 잠식한다
어느 한순간 접시에 코를 박고 종이들은 숨을 죽인다

08. 04. 26.

P.S. 시의 제목은 물론 파스빈더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3)를 패러디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는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1997)의 것이고 지금 듣는 음악은 그 주제가 데이비드 보위의 '나는 착란에 빠졌어요(I'm Deranged)'이다(http://www.youtube.com/watch?v=OtpHR3d0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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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까 2008-04-2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배경화면을 로쟈님 서재사진으로 한번 바꿔보심이..

로쟈 2008-04-26 23:47   좋아요 0 | URL
제가 온라인 서재를 만든 이유가 없어집니다.^^;

Mephistopheles 2008-04-28 00:03   좋아요 0 | URL
지젝을 로쟈님 서재로 초대하면 아마도 가능할지도...

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를 좋아하시나봐요.이 영화가 대표작이라서 그의 전기도 이 제목이던데요....로날드 헤이만이 쓴 전기 국역판은 도서관에도 없고...저는 독일 역사논쟁에서 이 감독을 처음 알았어요.장정일씨가 되게 좋아하더라구요.근데 요절했네요.

로쟈 2008-04-27 09:22   좋아요 0 | URL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을 좋아하고 사실 <불안>은 보지 않은 영화입니다. 전기는 읽어봤지만.^^

다락방 2008-04-2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니까 로쟈님, 시도 쓰시는군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

로쟈 2008-04-27 09:21   좋아요 0 | URL
옛날에 쓰던 걸 가끔씩 올려놓고 있습니다.^^;

Mephistopheles 2008-04-27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스트 하이웨이의 마지막 부분 그로테스크한 외모를 출동시킨 누구를 많이 닮은 마를린 맨슨의 기억이 자꾸 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