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의 기획연재에서 다시 서평이 특집으로 다루어졌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0). 취지에 따르면, "이번 특집기획은 ‘다시, 서평을 말하다’이다. 지난 <비평> 특집기획 ‘한국 서평의 현 주소’의 문제의식을 더 밀어보자는 주문이 많았다. 이번에는 △좋은 서평의 조건(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1) △문학서평의 갈 길(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2) △사회과학서평의 위상학(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3) △과학서평의 위치와 갈 길(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4) 등으로 나눴다. 지난 특집기획이 일반적인 서평을 놓고 그 지나온 길을 짚었다면, 이번 특집기획은 분야별로 차이를 갈라 ‘그럼 어떻게 쓸 것이냐’를 제안한다." 그 중 문학서평에 관한 꼭지를 옮겨놓는다.
교수신문(08. 03. 31) 비평으로서의 서평과 비평적 판단
문자 그대로 책에 대한 評을 뜻하는 한 서평이 비평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고 해야 할 듯하다. 물론 서평과 비평을 가르는 형식적 기준이라는 것이 없지는 않다. 지면의 할애 면에서도 구분이 되지만 특히 우리 학계에는 비평을 서평보다 한 급 높은 지적 활동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더라 하더라도 서평이 비평과 절대적으로 차별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비평안이 없는 독자가 좋은 서평을 쓸 수 있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비평적 안목이 뒷받침하지 않는 서평 행위가 玉石을 제대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뿐더러 더러는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데 일조하는 현상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현상이 만연해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우리 인문학계 전체를 부당하게 폄훼할 위험도 있지만 2008년 1월 28일자 <교수신문>만 보더라도 대체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서평문화’가 튼실하게 정착됐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싶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3).
다른 한편 <교수신문>이 제시한 여러 통계적 수치나 여론조사 자체도 비판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하나의 텍스트적 성격이 있는 법이다. 따라서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여겨지는 객관적인 데이터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 데이터’와는 약간 성격이 다른, 좋은 서평에 걸림돌이 되는 몇 가지 장애물을 환기해보는 것도 훌륭한 서평의 덕목을 다시 성찰해보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중 필자가 특히 주목한 장애물은 ‘분과학문별 결속주의’와 ‘비판을 꺼려하는 전통문화’다.
분과의 경계가 해체되고 비판이 장려되는 학문세계에서 이 두 문제는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따져보면 양면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분과학문별 결속주의적 행태야 타개해야 마땅하지만 그 나름의 전문성을 살리는 협동작업은 분과학문에서도 필수적이다. 논쟁을 꺼리는 전통문화도 학연이나 지연 등으로 침묵의 카르텔을 만들어 패거리화되는 것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우리 학계에서는 자기의 이름을 내는 방편으로 선학들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무분별한 비판도 관행이 되다시피 한 면이 있다. 전문성을 키우되 전공 결속주의에 빠지지 않고 논쟁을 지향하되 격을 갖추려는 노력은 건강한 서평 문화를 키우는 데 없어서는 안될 점이다. 인문학 가운데서도 문학 분야는 그러한 비평으로서의 서평 문화의 토대가 특히 허약한 듯한데, 여기서는 그 점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서평의 공정성과 객관성
문학 서평도 비평의 범주에 속한다면 평단에서 가장 큰 폐해로 지적하는 이른바 주례사 비평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겠다. 물론 예전에 ‘죽비소리’라 해 신간이 나오면 익명으로 사정없이 질타한 적도 있었지만 일방적인 찬사와 덕담을 늘어놓는 주례사나 작품의 미덕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흠잡기에 열중하는 죽비소리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에 해당한다. 물론 이 상반된 서평 태도와 거리를 두면서 비판과 찬사를 적당히 섞어 작품을 얼버무리는가 하면, 아예 서평대상과는 무관한 자기의―십중팔구는 수입돼 유통되는― ‘이론’에 몰두하는 논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얼버무리는 경우도 그 간이 절묘하지 맞지 않을 경우 비판의 유효성을 중화시키기 십상일 뿐더러 찬사의 온당한 근거를 댈 수 없기 십상이라서 절충적인 서평의 위험도 주례사나 죽비소리에 못지않다고 봐야 한다.
비평문화에서 주례와 죽비, 절충 등으로 분류되는 서평에도 오랜 관행이 있다. 출판시장의 판도를 좌우하는 ‘자본’이 활개 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서평 장르는 사실상 책의 광고를 좀더 고급하게 내주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주례는 주례대로, 죽비는 죽비대로, 절충은 절충대로 얼마든지 포장의 修辭로 동원될 수 있는바, 근대가 賣文으로서의 무수한 비평문과 거간꾼으로서의 서평가들을 양산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것은 필연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그 자신 프랑스라는 ‘문필 공화국’의 자부심 강한 시민으로서 정열적인 삶을 살다간 발자끄가 『저널리스트』(1843)에서―때로는 자신의 발등을 찍어가면서―풍자한 그대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 평단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문화정치적 세계와 긴밀하게 연동된 언론사와 출판사가 조장하는―발자끄가 그야말로 꼼짝하기 힘든 독설을 퍼부은―파당의식과 이해관계는 과거만의 일이 아님이 절절히 실감된다.
상황이 그렇다고 해서 서평으로서의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이자 덕목인 공정한 평가와 비평적 객관성이라는 난제를 포기할 수는 없다. 필자 자신도 서평이나 촌평을 여러 차례 하면서 그같은 난제를 충분히 감당했다고 자신하기 힘든 순간이 적지 않았다. 근래 우리 문단의 화제인 김훈의 역사소설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도 그런 난제를 서평으로서의 비평이라는 맥락에서 짚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김훈 역사소설에 대한 서평에서도 눈에 띄는 점은 상반된 평가다. 하나의 문학작품을 두고 독자의 견해가 다른 것은 물론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김훈에 관한 대조적인 평가에서 흥미로운 것은, 문학비평을 업으로 삼는 논자치고 그의 역사소설을 이런저런 눈치를 보지 않고 엄정하게 읽었다는 느낌을 주는 비평가는―허무주의니 파시스트니 하는 ‘재’를 과장되게 뿌린 비평에 비하면―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부연하자면 <교수신문>에 기고한 오창은의 평문은 이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15). 그런 서평은 오히려 비문학도들이 시도했다.
가령 심사위원들이 “한국문학에 내려진 벼락과 같은 축복”이라며 동인문학상을 수여한 『칼의 노래』(2001)도 그러하다. 국어학자인 이익섭은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들을 세세하게 골라내면서 “너무 기초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작품들이 상을 받을 때마다 나는 심사 기준에 뭔가가 더 추가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푸념한 바 있다(<문학과 사회> 2002년 여름호). 또한 역사학자인 정옥자는 이 작품을 두고 “식민사관에서 우리를 집중적으로 세뇌시킨 당쟁론이 여과없이, 아니 더욱 심하게 묘사돼 있”음을 지적하면서 선조와 당대 현실정치에 대한 작가의 편향된 시각을 꼬집은 바 있다(<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
비록 문학서평을 전문으로 하는 독자는 아니지만 이들은 쉽게 넘겨버리기 어려운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두 논자의 문제제기는 사실 재현의 정확성과―‘역사의식’과 완전히 동의어라고 말하기는 힘든―역사인식으로 모아진다. 역사소설을 다루는 데서도 이 쟁점은 전혀 간단하지 않다. 가령 『칼의 노래』에서 왜 거북선이 나오지 않느냐, 고고학계도 아직 정확히 밝히지 못한 殉葬의 구체적인 거행과정을 『현의 노래』처럼 그런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드는 것도 역사소설의 평가에서 초점을 흐릴 공산이 다분하다. 史觀의 결여를 비판하는 일은 더 까다로운데, 그것은 문학의 역사화라는―‘역사주의’라는 잣대로 문학을 재단한다는―반론을 불러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성과 역사인식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역사소설을 제대로 논하기 힘든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그런 문제가 소설 비평에서의 일반적인 쟁점과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이익섭은 『칼의 노래』에서 시간이나 사건의 전개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사실’을 적시했지만, 그건 차라리 창작 일반에 해당하는 기본을 환기했달 수 있다. 즉 작품 “뒤에 연보며 海戰圖까지 붙여 역사적 사실과 연관 지으려는 의도가 뚜렷하”고 “史實에 맞추어 소설을 전개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칼의 노래』의 무수한 사실왜곡과 부주의함을 적시한 것이다.
김훈은 ‘일러두기’에서 15세기의 임진왜란과 5세기의 가야 멸망, 17세기의 병자호란이 배경이 되는 각각의 작품을 다른 무엇이 아닌 오직 소설(=허구)로만 읽혀야 한다고 되풀이해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소설의 이름으로 그같은 왜곡과 부주의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역사소설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팩션’으로 가공된 역사적 소재나 사건이기 때문에 ‘소설’로 읽어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도 사실과 허구의 관계, 더 나아가 ‘역사적 진실’의 문제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정옥자는 이보다 더 차원이 높다면 높을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역사소설에서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 여부만 가지고는 제대로 해명할 수 없는 것, 즉 작가의 세계관 또는 역사를 보는 관점의 문제점까지를 들추어낸 것이다. 이 관점도 따지고 들어가면 사실이냐 진실이냐, 역사냐 허구냐를 가르는 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난점에 부딪히게 된다.
전문적으로 읽고 즐기는 독자의 의미
우리 문단에서 비평가라는 이름의 독자들이 이 난점과 어떻게 씨름하고 있는가를 소개할 지면은 없다. 다만 원래 이 글의 주제로 돌아와 짤막한 서평도 비평의 차원을 겸해야만 이 난제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음을 강조할 만하다. 다른 한편 김훈의 역사소설 평가를 둘러싼 이런 종류의 어려움을 어떤 한 탁월한 독자가 홀연히 나타나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낭만적 공상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책을 전문적으로 읽고 즐기는 독자들이 하나의 실체적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비평에 값하는 수준의 서평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상식과 통찰을 문화적으로 축적할 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문단에서 촌평이나 서평의 형식으로 각종 문예지에 실리는 많은 글이 책의 단순한 선전이나 소개의 차원에 그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자족할 수는 없다. 우리 문화현장에서 인터넷 서평을 선도하는 블로거의 활약도 옥석을 분별하는 본격 비평의 지평을 지향해야만 ‘시장’의 들러리 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유희석/ 전남대·영문학, 문학평론가)
08. 04. 01.
P.S. 필자의 주장은 서평도 '평'인 이상 비평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리 분량이 짤막하더라도 비평의 차원을 겸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예전에 적은 대로 약간 다른데(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6), 아무래도 '분량'과 '지면(자리)'의 성격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10-20짜리 서평(혹은 리뷰)과 50-70매 규모의 비평은 체급이 다른 것 아닐까. 한편으로 서평문화의 걸림돌로 ‘분과학문별 결속주의’와 ‘비판을 꺼려하는 전통문화’에 대해 지적한 대목은 공감하게 된다. 필자가 '침묵의 카르텔'과 '자기의 이름을 내는 방편으로 선학들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무분별한 비판 관행', 어느쪽이 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지적은 이것이다.
"비평문화에서 주례와 죽비, 절충 등으로 분류되는 서평에도 오랜 관행이 있다. 출판시장의 판도를 좌우하는 ‘자본’이 활개 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서평 장르는 사실상 책의 광고를 좀더 고급하게 내주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주례는 주례대로, 죽비는 죽비대로, 절충은 절충대로 얼마든지 포장의 修辭로 동원될 수 있는바, 근대가 賣文으로서의 무수한 비평문과 거간꾼으로서의 서평가들을 양산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것은 필연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서평이 비평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비평도 "사실상 책의 광고를 좀더 고급하게 내주는 포장지"에서 예외가 아니다(비평 또한 출판시장 바깥에 있지 않다). 거기다 문제는 "주례는 주례대로, 죽비는 죽비대로, 절충은 절충대로 얼마든지 포장의 修辭로 동원될 수 있"다는 통찰이다. 이건 아주 래디컬하다. 주례이건 죽비건 '포장의 바깥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그에 비하면 "비평에 값하는 수준의 서평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상식과 통찰을 문화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여건에 대한 필자의 요구는 좀 뭉툭하다. "賣文으로서의 무수한 비평문과 거간꾼으로서의 서평가들을 양산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비평의 지평'(공정성과 객관성) 이상의 뭔가 더 뾰족한 수가 필요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