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의 '서문'에 대한 새로운 번역을 옮겨놓는다. 며칠전 컬처뉴스에 리뷰를 썼던(http://blog.aladin.co.kr/mramor/1945199) 출판기획자 이재원씨의 번역이고 그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이다. 비록 '서문'에 한정된 것이긴 하나 우리에게 주어진 국역본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가와 우리가 랑시에르를 얼마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가를 동시에 보여준다. 참고로 문단은 편의를 위해서 원문/번역문보다 더 잘게 쪼갰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프랑스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어느 여인, 학교에서 히잡을 벗지 않으려는 여학생들, 적자를 내고 있는 사회보장제도, 바칼로레아 제시문 중 왕좌를 차지했던 라신과 코르네유를 끌어내린 몽테스키외·볼테르·보들레르, 자신들을 위한 연금제도를 지키기 위해 시위를 벌이는 임금생활자들, 대안적 입시제도를 도입한 그랑제콜, 날로 대중화되어 가는 리얼리티 TV·동성결혼·인공수정…….

이처럼 그 성격이 이질적인 사건들을 한데 묶어 볼 수 있게 해주는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수많은 철학자들,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정신분석가들, 저널리스트들, 그리고 작가들은 진작부터 줄줄이 책과 기사와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면서 답변을 내놓고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증상은 동일한 질병의 발로인데 이 모든 결과들에는 오직 단 하나의 원인이 존재할 뿐이다. [역시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 원인은 현대 대중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끝없는 욕망이 군림하는 통치체제, 즉 흔히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이런 비난의 독특함을 구성하고 있는지 살펴봐야만 한다. 분명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새로울 게 없다. 실상 그 증오는 민주주의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인데,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증오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다수[데모스]의 지배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 속에서 정당성을 갖춘 모든 질서의 붕괴를 목도한 자들이 일종의 욕으로 사용한 단어이다.

권력이란 당연히 [남을 지배할 수 있는] 그런 운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나 그에 걸맞은 역량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혐오의 동의어였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신성한 법의 계시만이 인간의 공동체를 조직해 주는 유일한 합법적 토대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러하다. 확실히 민주주의를 향한 이와 같은 맹렬한 비난은 동시대의 의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비난 자체가 이 책의 목적은 아닌데, 그 이유 역시 단순하다. 나는 이런 비난을 퍼뜨리는 자들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이에 대해서 논쟁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목도하기도 했다. 이 비판은 민주주의에 뭔가 알맹이가 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그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민주주의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해왔다. 먼저 귀족주의적 입법자들과 전문가들의 술수가 있는데, 그들은 민주주의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보고 그와 타협하려고 애썼다. 미국 헌법의 제정 과정은 이런 술수의 고전적인 예인데, 미국 헌법은 민주주의라는 현실에서 최대치를 얻어내고자 권력들을 조직하고 공공 기구들간의 균형을 맞추는 한편, 서로 동의어로 간주되는 두 가지 [공공]선(善)을 보호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엄격히 한정했다. 최선의 정부와 소유질서의 보존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실용적 비판의 성공은 자연스레 또 다른 비판의 성공을 북돋웠다. 청년 맑스는 공화주의 헌법의 토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소유권임을 손쉽게 폭로할 수 있었다. 공화주의 입법자들은 그런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맑스는 아직까지 그 원천이 고갈되지 않은 사유의 전형을 정립할 수 있었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는 단지 외양이자 도구일 뿐으로서, 그 외양 아래서 혹은 그 도구를 통해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권력을 관철하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 외양[즉, 형식적 민주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되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라면 자유와 평등은 더 이상 법제도나 국가에 의해서 대표[대의]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태 자체를 통해서 구현될 것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책의 주제인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이 두 가지 모델에 모두 딱 들어맞지 않는다. 비록 그 두 모델에서 빌려온 요소들을 결합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이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의 주창자들 모두는 자신들이 단순히 민주주의적인 국가인 게 아니라 딱 잘라 말해 민주주의 자체라고 공언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의 주창자들 중 더 실제적인 민주주의 같은 것을 요청하는 자는 없다. 오히려 이들은 누구나가 민주주의를 너무 많이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인민들의 권력을 구현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제도들에 불평을 늘어놓거나, 그런 권력을 제한하는 어떤 조치를 취하자고 주장하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몽테스키외, 매디슨, 토크빌의 동시대인들을 열광시켰던 제도적 장치는 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들이 불평하는 것은 인민들[이라는 존재] 자체, 그리고 인민들의 습속이지, 인민권력의 제도들이 아니다. 이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타락한 통치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사회를 들볶고, 그럼으로써 국가를 들볶는, 문명의 위기이다. 도대체 왜 이들이 이처럼 오락가락하는지는 일견 놀랄 만한 일이다. 실제로 차이의 존중, 소수자들의 권리, 차별철폐 조치 등과 관련된 모든 악을 우리에게 퍼뜨림으로써 [프랑스] 공화국의 보편주의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이유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바로 그 자들은, 미국이 무력을 통해서 전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고 하면 앞장서 박수를 쳐대는 자들이다.

확실히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중 담론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우리는 여타의 모든 통치체제 중 민주주의가 최악의 통치체제라는 말을 듣는 데 이골이 나 있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정서는 이 통상적인 공식을 훨씬 더 논란을 일으킬 만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요컨대 민주주의라는 통치체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모든 차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민주주의 사회가 자신을 붕괴시키도록 내버려둔다면 나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달리 민주주의 사회 탓에 허약해진 개인들을 다시 결집시킴으로써 문명의 가치들, 문명들간의 충돌과 관련 있는 그 가치들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면 민주주의라는 통치체제는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 새로운 증오가 제시하는 테제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좋은 민주주의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이라는 재앙을 억압하는 민주주의이다. 이어질 본문에서 나는 이 테제의 구조를 분석하고, 이 테제가 맺고 있는 이해관계를 도출해볼 것이다. 여기서 쟁점은 동시대의 이데올로기 형태를 단순히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분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황을, 그리고 이 세계가 정치라는 말로써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분석은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양산한 스캔들을 명확히 이해하고,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활기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08. 03. 05.

P.S. 새 번역문을 읽다 보니 거듭 국역본에 유감을 표하게 된다. 그런 공적인 유감에다가 사적인 유감까지 보태고 싶은데, 알고 보니 역자는 몇몇 포스트를 통해서 번역상의 문제를 제기한 나를 명예훼손으로 이미 1월말에 고소까지 했다. '허위사실'을 유포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다시 책을 펴들고 역자 서문을 보니 이런 구절이 있다. "독자가 주의해야 할 점은 저자의 반어적 표현과 반전을 거듭하는 논의 전개 방식이다. 아마도 저자는 민주주의의 혼란스러움과 반목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논점을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7-8쪽)

이건 혹 역자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고쳐 읽게 되니 말이다. "독자가 주의해야 할 점은 역자의 반어적 표현과 반전을 거듭하는 번역 방식이다. 아마도 역자는 말도 안되는 번역의 혼란스러움과 자신의 몰이해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번역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그 점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듯싶다. 독자들이여, 역자를 주의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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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학 철학 그리고 모순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3-06 11:06 
    * 로쟈님의 2008년 3월 5일자 페이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 중에서 발췌 - 이처럼 그 성격이 이질적인 사건들을 한데 묶어 볼 수 있게 해주는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이 세상에 좋은 민주주의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이라는 재앙을 억압하는 민주주의이다.
 
 
anathema 2008-03-06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지적한 번역 오류를 "허위사실"이라고 보는 '구체적'인 이유를 역자 백승대에게 직접 듣고 싶네요.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고 더 공부할 생각이나 할 것이지.

로쟈 2008-03-06 22:5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궁금합니다.

마립간 2008-03-06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 내용을 저의 서재에 옮깁니다.

로쟈 2008-03-06 22:50   좋아요 0 | URL
^^

닉네임을뭐라하지 2008-03-0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다른 맥락일 수도 있겠지만,
새삼 이윤기 선생의 '장미의 이름'(강유원)에 대한 대응(?)이 참 대단하다 생각되네요.

로쟈 2008-03-06 22:48   좋아요 0 | URL
번역에도 급이 있고 격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