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상하이에서 서울(인천)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몇 종의 신문을 읽을 수 있었는데 마침 토요일이라 북리뷰들을 싣고 있었다. 두 가지 점이 놀라웠다. 하나는 지젝의 <전제주의가 어쨌다고?>(새물결, 2008)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케넷, 2008)가 번역됐다는 점. 후자의 경우엔 놀라움이라기보다는 반가움이라고 해야겠지만. 나머지 새로 나온 책들도 몇 권 눈길을 끌었지만 새로운 책들을 매주 나오는 것이니까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함께 또 한권의 시리즈 책으로 눈길을 끈 건 루틀리지의 '크리티컬 씽커즈'의 하나로 나온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앨피, 2008).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로 아예 굳어버린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에 대한 '다시 읽기'이다. '실용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제목에서 '와'는 단지 이 두 권의 우연한 접속관계만을 지시할 뿐이다. 이 달에 내가 관심을 갖고 읽어볼 두 권의 책(그 '우연'이 만들어낼 수도 있을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실용주의>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사가 눈에 띄지 않아서 한 칼럼을 대신 옮겨놓는다.

중앙일보(07. 12. 22) [분수대] 실용주의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의 어원은 행동·실행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프라그마(pragma)’다. 그만큼 행동과 실천을 중시하는 철학이다. 유용성이 진리 판단의 기준이다. 지식도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기 위한 도구로 본다. 실용주의는 현대 미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미국이 내놓은 거의 유일한 철학 브랜드이고, 미국적 가치·프런티어 정신의 요체이기도 하다.

실용주의의 뿌리로는 19세기 말 공리주의가 꼽힌다. 당시 유럽 자본주의는 극심한 빈부격차, 노동운동에 직면했다. 부르주아에겐 사회주의에 끌리는 노동자 계층에 맞서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내세운 공리주의가 그 대안이 됐다. 실용주의는 이런 공리주의의 미국적 전개로 불린다. 당시 미국 역시 남북전쟁의 후유증으로 통합을 위한 지적 치유가 필요했다. 시기적으로도 독점 자본주의의 문턱에 접어들고 있었다.

187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는 지식인 살롱 ‘메타피지컬(형이상학) 클럽’이 문을 열었다. 기호학자 찰스 S 퍼스, 법학자 올리버 웬들 홈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교육철학자 존 듀이 등 4명이 핵심 멤버였다. 클럽은 9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책 『메타피지컬 클럽』은 여기서 실용주의와 오늘의 미국이 탄생했다고 썼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상이 ‘저 멀리’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포크나 나이프, 마이크로 칩처럼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한 도구라고 믿은 점”이다. 이들은 “사상의 생존은 그것의 불변성이 아니라 적응성에 달려 있다”며 “실용주의란 생각하는 방식에 관한 설명” “사람들의 신념이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말했다. 내용이라기보다 태도로서의 실용주의다.

철학자 탁석산은 한 강연에서 “민생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용어로 오해받고 있지만 실용주의야말로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인이 택해 온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산업화·민주화를 거치며 그때그때 어떤 것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가를 선택하는 사상적 틀로 실용주의를 채택해, 시대에 필요한 과제를 해결해 왔다”는 설명이다.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가 ‘실용의 정부’를 내세우며 ‘실용’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관심은 그저 정치적 차별화를 노린 수사로서의 실용주의가 아니다. 실용의 내용을 실용적으로 잘 채워, 실용주의의 실용성을 입증하는 일이다.(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해럴드경제(08. 02. 01) 리오타르사상 다시 읽기

포스트모더니즘을 꺼내드는 것은 철 지난 이야기일까. 혹자는 언제 포스트모더니즘이 제대로 논의된 적이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특히 IMF라는 한국적 특수성 아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소개와 소멸은 너무도 신속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아전인수격, 코끼리 코만지기식 해석과 이해만이 한차례 유행처럼 불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먼 말파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윤동구 옮김,앨피)는 옮긴 이의 표현대로, 오랜기간 풍문으로만 전해지며 숱하게 오독된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두 리오타르의 사상 전반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말하자면 리오타르 다시 읽기다. 저자는 무엇보다 리오타르가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개념과 본질을 명확히 밝히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복잡하고 시급한 문제들을 사유하는 틀로써 그의 사상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리오타르 오독의 핵심은 그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밝힌 "메타서사들에 대한 불신"이라고 포스트모던을 정의한 부분이다. 거대서사의 붕괴가 상실, 허무주의,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돼왔기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제대로 읽는 단서를 리오타르가 붙인 부제에서 읽어낸다. ‘지식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야말로 결정적 단서라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후기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 지식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으며 이는 정보저장과 의사소통과정에서 나타난 변화들이 우리가 지식을 사용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법을 변형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거대서사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리오타르는 지속적으로 역사를 사유하고 서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리오타르는 특정한 방향을 조직하는 서사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대신 서로 다른 목소리와 가능성을 출현시키는 서사와 양식의 무한한 출현을 꾀한다. 보편성, 합리성으로 불리는 역사적 사건들의 모순은 그 균열속에서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가령 아우슈비츠의 경우, 증거나 통계자료 등 지식의 규칙들 너머로 어떤 감정이 이 단어에 따라붙는데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정치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탐구하도록 요청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아우슈비츠를 변형시킴으로써 경험주의적 역사를 뒤엎는 하나의 기호가 된다고 본다.

여기에 창조적 예술가의 책무가 부각된다. 인간존재의 안정성에 대한 감각을 훼손시키는 다양한 표현방식을 통해 인식의 전복을 꾀하기때문이다. 리오타르는 변기와 같이 일상적으로사용되는 물품을 낯설고 불온한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는 현대작가 뒤샹의 방식에 주목한다. 해석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우리가 예술에 응답하도록 자극하기때문이다. 이 책은 숭고, 사건, 분쟁 등 리오타르 사상의 핵심개념이자 오해의 소지가 많았던 부분들을 명쾌하게 제시할 뿐만아니라 리오타르 논의가 어떻게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지도 폭넓게 보여준다.(이윤미기자)

08. 02. 03.

 

 

 

 

P.S.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들은 <메타피지컬 클럽>을 비롯해 몇 권의 프래그머티즘 관련서이다(대부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책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실용주의 철학자 듀이와 신실용주의의 주창자 로티를 듀엣을 다룬 이유선의 <듀이 & 로티>(김영사, 2006)가 입문서격으로는 좋겠다. 개인적으론 리쩌허우의 '실용이성'과도 연관해서 이 현대 미국철학과 중국철학의 접속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리오타르의 책은 몇 종 출간됐지만 의외로 심심한 편이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두 가지 번역본으로 나왔었고 <지식인의 종언>(문예출판사, 1993)이 추가되지만 리오타르의 전모를 조감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스튜어트 심의 <리오타르와 비인간>(이제이북스, 2003)은 심심한 책이었고, 그의 숭고론을 이해하기 위해선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현대미학사, 2000)와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를 참조할 수 있지만 좀 '전문적'이다. 줄리언 페파니스의 <이질성의 철학>(시각과언어, 2000) 등 몇 권의 현대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관련서에서 '개관'을 읽을 수 있는 게 거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 역시 개관 범주에 속하지만 그래도 가장 미더운 분량이다...

P.S.2. <실용주의>의 구 번역이 있나 찾아보니 김용배 역의 <실용주의>(민중서관, 1956)가 나와 있다. 223쪽 분량. 이번에 나온 국역본은 383쪽 분량이다. 내가 아는 원저는 얇은 책이어서 예전 번역본과 얼추 분량이 맞는데, 새 국역본의 분량이 두툼해진 이유는 실물을 봐야 알 것 같다. 또 다른 번역으론 '윌리엄 젬즈'의 <프래그머티즘>(미네르바, 1971)도 눈에 띈다. 덧붙여 'Essays in Pragmatism'을 옮긴 이남표 역의 <프래그마티즘의 철학>(중앙문화사, 1962)도 출간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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