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나온 주요한 학술서의 하나인 임철규 교수의 <그리스 비극>(한길사, 2007)에 대한 서평 두 편을 옮겨놓는다(차일피일 미루던 일이었다). 출처는 각각 교수신문(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397)과 담비(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8112)이며 서평자들이 서양고전학 전공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달쯤에는 소포클레스에 관한 장이라도 읽어볼 참이다(최초의 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17149 참조).

교수신문(07. 12. 24) "기여는 엄청나고, 아쉬움은 자잘하고, 실수는 사소하다”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느낀 감정은 솔직히 질투심이었다. ‘내가 쓰려던 책을 누가 먼저 냈구나!’ 하지만 책을 몇 쪽 읽자 곧 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은 내가 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런 책은 15년에서 20년 뒤에나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방대한 인용문헌, 그리고 그것들을 넘나들며 글을 짜나가는 솜씨였다. 각 작품을 보는 여러 시각들을 소개하고, 여러 해석의 계보를 밝히는 등, 한 책에서 이렇게 많은 것을 배우기도 근래엔 없던 일이다.

물론 자잘한 아쉬움도 없지 않다. 우선, 이 책이 개개 작품의 형식적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작품의 구조는 어떠한지, 작품 중앙 부근에는 어떤 장면이 배치돼 있는지, 각 인물에게 배당된 대사의 분량은 어떠한지, 어떤 대사를 어떤 인물에게 배당하는 것이 타당한지 따위의 문제들 말이다. 너무 좀스러운 요구 같지만, 때때로 이런 점들이 작품 해석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에우리피데스의 『힙폴뤼토스』에서 등장인물 네 사람의 대사 분량이 거의 같다는 점에 주목하면, 우리가 ‘여주인공’ 파이드라나 ‘남자 주인공’ 힙폴뤼토스에게 초점을 맞춰 작품을 해석하는 게 옳은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 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의 투표 장면에서는, 오레스테스를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이 ‘두 줄씩 말하기’로 진행하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세 줄짜리 대사가 나와서, 투표에 참가한 전체 배심원 숫자가 몇인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보통 한 줄마다 한 명씩 나가서 투표하고, 다음 줄에 들어오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방대한 인용, 명쾌한 해석의 계보
이 책에 보이는 사소한 실수 중에, 『아이아스』에서 “아이아스는 이복동생 테우크로스를 불러 자신의 아들을 부탁”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런 것은, 소포클레스의 초기 작품들이 양분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도 같은 배우가 전반부에서는 아이아스 역할을 하고, 후반부에서는 다른 가면을 쓰고 나와서 테우크로스 역할을 한다는 데 주목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런 문제는 이 책에 인용된 방대한 문헌목록이 보여주는 한 가지 특이한 점과 관련돼 있다. 20편 이상의 비극작품을 다루는 이 책에 인용된, 개별 작품의 주석서가 단지 4개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주석서가 인용돼야 하는 대목에서, 넓은 분야를 아우르는 2차적인 연구서가 인용되는 일이 종종 있고 그것이 논의의 엄밀성에 흠이 되기도 한다. 이런 흠들은 각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신화를 인용하는 대목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소포클레스의 『트라키스의 여인들』에 “황소의 모습을 한 강의 신 켄타우로스”가 등장한다는 주장 따위가 그런 것이다. 켄타우로스라면 반인반마인데 황소 모습이라니? 이 작품에는 황소 모습을 한 강의 신 아켈로오스가 언급되는데, 아마도 그게 잘못 섞여 들어간 모양이다. 같은 글에서 켄타우로스인 네소스가 자기 아내를 업고 달아나자 헤라클레스가 화살을 날리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화살은 “휘드라에게 쏘았던 흔적이 남은”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이 화살은 원래 헤라클레스가 물뱀 휘드라의 담즙에 담갔었고, 그래서 독화살이 된 것이었다.

한데 배경 신화라는 것이 대체로 이전 시대 작품들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니, 신화 인용상의 실수는 곧장 이전 작품 인용상의 실수로 연결된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인용하면서 “우라노스를 죽인 크로노스 역시 자식의 손에 죽는다”고 한 것이나, “에로스는 우라노스의 절단된 성기의 정액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 따위가 그렇다. 우라노스(하늘)는 죽지 않고 그저 땅과 분리됐을 뿐이다. 또 크로노스도 권좌에서 쫓겨날 뿐이지 죽지는 않는다. 그리고 뒷 문장은 에로스가 아니라 아프로디테의 탄생에 대한 언급이다. 다른 예로,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하는 일곱 영웅』에 나오는 에테오클레스의 독백을 아킬레우스와 맞서려 나서는 헥토르의 독백과 비교하면서, 이때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와 벌일 운명적인 대결을 위해 궁전을 떠나”갔다면서 『일리아스』 22권을 인용했는데, 사실 그 장면에서 헥토르는 이미 자기 궁전을 떠나온 지 사흘째였다. 그는 단지 성문 앞에 서 있다가 아킬레우스에게 다가가는 참이었다.



주석서를 참고하지 않을 때 생기는 더 큰 문제는, 원문 이해가 잘못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이스퀼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는 오레스테스가 이웃나라에 팔려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저자께서는 이것을 진담으로 해석하신 듯하다. “그녀의 잔인함은 … 어린 오레스테스를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았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어린 오레스테스를 노예로 팔고”.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메타포이다(A.F. Garvie의 132~3행 주석 참고). 제 자식은 팽개치고 情夫를 끌어들였단 말이다.

지리적 지식·번역 인용 불철저
주석 참조 문제 이외에 작은 아쉬움을 하나 더 밝히자면, 이 책이 보통 고전학자들의 글에 비해 수평적으로 엄청나게 범위를 확장하는 반면에 수직적인 연결은 조금 약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가령, 서사시에 쓰이던 어구를 끌어 쓴 경우, 그 문맥에서 필요한 뜻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역사 때문에 함께 딸려오는 다른 함의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 책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가멤논』에서 주인공에게 주어진 ‘도시의 약탈자(ptoliporthos)’라는 수식어다.

이 말은 원래 거의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에게만 붙는 수식어로 칭찬의 뜻이 들어 있다. 한데 이 책에서는 이 말이 아가멤논에게 쓰였다고 해서, 이것을 그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해석한다. “아이스퀼로스는 … 전쟁의 참혹함을 전해주고 있다. 가령 코로스는 … 아가멤논을 “트로이아의 약탈자”라 불렀다.”(118쪽) “도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 그를 ‘트로이아의 약탈자’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가멤논』에 이어지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아가멤논이 “‘신과 같은 이미지’로, 트로이아를 함락시킨 위대한 왕으로 그려”지고 “아무도 그의 잘못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이전과는 모순된 태도인 듯 보인다. 애당초 ‘도시의 약탈자’라는 말에 칭찬의 뜻도 들어있다는 것을 지적해 두었다면 그런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지리적 지식의 문제도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 소포클레스의 작품 『트라키스의 여인들』이 이 책에서 계속 ‘『트라키아의 여인들』’로 나온다는 점이다. 트라키스는 희랍본토 테르모퓔라이 바로 북쪽이고, 트라키아는 고전기 희랍인들은 거의 자기네 땅으로 여기지 않았던 저 북쪽 땅이다. 이 책에는 편집자들의 잘못인 듯한 실수들이 꽤 보이는데, “헤라클레스의 가족들이 … 아마도 본토 그리스에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구절로 보아, 이것만큼은 저자의 실수로 보인다. 육지에서 벌어졌던 플라타이아 전투를 “해전”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번역 인용의 문제도 있다. 이 책은 따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천병희 교수의 번역을 끌어다 쓰고 있는데, 그 번역에서 잘못된 것이 그대로 딸려 들어온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힙폴뤼토스』에서 주인공 청년이 죽게 되자, 코로스는 “전에는 뤼라의 기러기발 밑에서도 결코 잠든 적 없는 음악이 … 침묵하게 될 것”이라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기러기발’로 옮겨진 것은 희랍어 antyx로서 천 교수께서 너무 심하게 옮긴 것이다. 기러기발[雁足]이란 가야금이나 아쟁 따위에서 줄 하나하나를 받쳐주는 받침인데, 뤼라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 보통은 ‘브리지(bridge)’로 옮기는데, 그냥 ‘줄받침’ 정도면 될 것이다.

‘사소한 불만’을 너무 많이 열거해서 이 책이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는데 공정하게 말하자면, 기여는 엄청나고, 남은 아쉬움은 자잘하고, 실수들은 사소하다. 여러 사람에게 큰 도움을 줄, 정말 대단한 책이다. 이런 좋은 책을 써주신 저자께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강대진/ 서울예술대 강사·고전그리스문학)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8호) 타자의 비극성으로 재조명한 그리스 비극

『그리스 비극 -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이하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비극 연구가 일천한 우리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될 본격적인 연구서이다. 저자는 그리스 비극 원전 텍스트는 물론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비롯한 그리스 고전 텍스트를 참조하는 한편 저명한 고전학자들의 중요한 최신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여러 사상가들의 중요 저작을 인용하여 자신의 테제를 전개한다. 이 저작은 저자의 학문적인 깊이와 넓이를 짐작케 해줄 뿐만 아니라, 학제 간 연구의 모범사례가 되는 책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비극이라 부르는가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고 역사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것이 위대한 문학이라면, 그리스 비극이야말로 이의 전범이라고 볼 수 있다(16-7쪽). 그리스 비극은 인간존재의 비극성을 노래하는 애도의 문학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 비극을 정의하면서 저자는 지금까지 그리스 비극 연구가 간과해왔던, 역사의 희생자인 타자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추어 그리스 비극을 재해석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나이 대 디오뉘시아 제전에서 단 한번 공연되었던 수많은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소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의 삼대 비극 시인, 즉 아이스퀼로스(80편), 소포클레스(123편), 에우리피데스(90편)는 대략 모두 293편 가량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비극은 고작 그들의 작품 33편 정도이다. 이 작품들도 자세하게 관찰하면 주제, 소재, 극작술, 사상의 관점에서 매우 다양한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그리스 비극을 정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확인케 해준다.   

그리스 비극의 로고스적 측면
애도를 표현하는 전범으로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기본방향은 저자가 그리스 비극 작품을 파토스pathos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은 인간존재의 비극적 조건을 로고스logos 관점에서 성찰하기도 하지 않는가. 이러한 사실은 노래(파토스)와 대사(로고스)가 번갈아 가며 전개되는 그리스 비극의 재현방식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제 두 눈을 멀게 한 후 무대에 등장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코러스와 함께 파토스적으로 제 운명을 한탄하지만, 노래가 끝난 후 연설 속에서 자신의 실명이 이성적인 숙고에 의한 것임을 로고스적으로 해명하면서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의 실명은 파토스를 극복한 로고스의 승리라고 파악할 수 있고, 이는 진정 그리스 합리주의 정신의 구현이다. 또한, 그리스 비극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을 완성하기 위한 기본적인 토대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저자가 그리스 비극의 로고스 측면을 무겁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리스 비극이 화해를 전제하지 않는다고 하는 전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이를테면 173쪽). 하지만 그리스 비극의 많은 작품들이 화해와 해결로 마무리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아이스퀼로스의 삼부작 형식은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갈등과 투쟁을 승화의 형식 속에서 화해와 해결을 의도하고 있다. 또한 <오이디푸스 왕> 이후 소포클레스의 후기 작품에서도 분명한 화해와 해결이 마지막 장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또한 에우리피데스의 후기 작품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화해와 해결을 제시할 뿐 만 아니라 다소 비현실적이라고 하더라도 해피엔드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 비극을 엄밀한 의미의 비극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많은 그리스 비극 작품들은 비극 장르에 속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인간존재의 비극성을 화해불가능성 관점에서 강조하는 비극 작품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 비극은 세속화Sakularisierung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비극적 조건에 대해 절규하기 보다는 이를 비극이란 예술형식 속에서 해명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여 왔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힘들다.

비극의 화해불가능성 재고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세계에 대한 일반 중론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나서 저자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아이스퀼로스가 전쟁의 희생양인 여성과 같은 타자의 비극을 인식한 작가이기 때문에 그의 비극은 화해의 비전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173쪽). 이를테면 역사의 희생자인 카산드라와 이피게네이아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오레스테이아의 삼부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지막 장면에는 오레스테스가 무죄 방면되자 분노했던 복수의 여신들이 아테나 여신의 설득의 로고스logos로 인해 자비로운 여신들로 변모되는 승화의 과정이 극화되어 있다. 삼부작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스퀼로스는 이처럼 낙관적인 역사관을 구현해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역사의 희생자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는 저자의 말은 그 엄연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비극은 화해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아이스퀼로스 비극 보다는 소포클레스 비극에 더 잘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포클레스야말로 아이스퀼로스 삼부작 형식을 포기하고 전통신화를 단일한 작품 속에 압축해 긴장의 드라마로 변형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에서 자살과 죽음으로 끝난 아이아스의 비극적인 운명을 해석하면서, “소포클레스의 세계에는 화해도, 화해의 중재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아이아스가 ‘검은 피’를 쏟아내는 한 신과 인간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포클레스가 신과 인간 사이의 화해불가능성을 그렇게 급진적으로 주제화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선, 아이아스의 자살은 그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숙고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 분명하고(<아이아스>430-80) 자신과 세계, 그리고 신과 인간의 화해가능성을 노린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아이아스는 자살하기 직전에 제우스신에게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지 않는가(823-30)? 그러한 간청에 신이 화답하듯 아이아스의 시신은 결국 그의 친구에 의해서 수습되어 매장된다(1370-1).

이로써 고립된 영웅이었던 아이아스는 인간 공동체에 다시 편입되고 그를 위한 제의가 설립될 것(1166-7)도 암시된다. 물론 소포클레스의 비극 세계에서 신의 계획은 불가해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착오 상태에서 범해 엄청난 결과를 낳은 잘못을 인간 스스로가 다시 교정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신의 계획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소포클레스의 주인공은 이러한 신의 계획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면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과 인간 사이에 불화가 존재한다는 해석은 에우리피데스 비극에 잘 부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19작품 중에서 7 작품만을 선별하여 해석하는데, 이 작품들의 해석에서 타자의 비극 관점을 본격적으로 강조한다. <메데이아>에서는 메데이아는 자기 자신에게 낯선 ‘타자’가 되고 마는 “인간존재의 비극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480쪽). <히폴뤼토스>에선 신에 대한 인간의 위대함이 바로 죽어가는 히폴뤼토스가 아버지의 실수를 용서하는 장면에서 돋보인다(502-5쪽). 전쟁의 광포함에 의해 희생된 여성과 같은 타자의 비극적 운명이 <트로이아의 여인들> <헤카베> <안드로마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헬레네>의 해석에서도 엿볼 수 있다. 헬레네는 전쟁이란 광풍의 희생자로서 부각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전쟁과 같은 모든 악행을 자행한 인간의 ‘역사’를 통탄하면서 이에 이용당하고 희생된 숱한 ‘헬레네’를 애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로맨스-계략(romance-intrigue) 드라마인 희비극 <헬레네>에 적용될 수 있을 지는 의문스럽다. 이 작품은 현실세계를 반영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공상에 가깝고 희극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이 역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에우리피데스의 <바코스의 여신도들>을 선택해 그것을 일종의 수난극으로 해석한다. 자신의 중심테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그리스 비극』의 코다(coda)를 다음과 같이 장식한다. “인간이 신이 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고통과 절망은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608쪽).”

마지막으로, 옥의 티를 몇 가지 지적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247쪽에서 <트라키아의 여인들>은 <트라키스의 여인들>로, 271쪽에서 희랍어 인용 mounon hiat?ra는 mounon iat?ra로, 376쪽에서 eidon은 현재어 동사가 아니라 아오리스트Aorist 과거형이라고 바로 잡아야 한다. 또한 이 책에서 인용된 작품들의 참고문헌이 부록에서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정리하자면, 1. 『그리스 비극』은 원전 텍스트의 독해를 바탕으로 테제를 이끌어낸 연구라기보다는 저자가 세운 테제를 입증하기 위해 원전 텍스트를 독해한 연구이다. 2. 『그리스 비극』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적 세계관을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 해석에까지 확장해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3. 『그리스 비극』은 신과 인간의 화해가 그리스 비극 세계에선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저자의 기독교 세계관이 작품 해석에 투사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로마 고전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연구방법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문학 연구 전반에 있어서도 그 학문적 깊이와 넓이를 증명한 연구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김기영│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 강사)

08.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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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1-21 16:4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안그래도 이 책을 서점에서 보고... 다음을 기약했습니다.그리스 비극을 먼저 스스로 다 읽어보고 싶어서요.

로쟈 2008-01-21 18:48   좋아요 0 | URL
대장정이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