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현대사상에 관한 책들의 출간이 최근 몇 년간 부쩍 늘었다. 예전에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반 독자라면 이 분야에 관한 읽을 거리가 모자란다고는 말 못하겠다. 최근 출간된 후지타 쇼조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논형, 2007)은 '연구'란 말이 붙은 제목부터가 이제 보다 '본격적인' 저작들이 소개되는 듯하다는 인상을 준다. 당장에 읽을 일은 없어 보이지만 리뷰기사는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1. 12) 천황제와 ‘전향’의 함수관계

패전을 맞이했을 때 후지타 쇼조(1927~2003)는 18세의 육군예비사관 후보생이었다. 그는 귀향하던 도중 서점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마루야마의 제자가 되었다. 전후 일본 사상에서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이 제1세대에 속한다면 후지타는 요시모토 다카아키, 이로가와 다이기치 등과 함께 제2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다지 많은 글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마루야마 학파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그가 ‘사상의 과학 연구회’의 ‘공동연구·전향’ 상중하의 3권에 기고한 4편의 논문을 엮어 출판한 것이다. ‘사상의 과학 연구회’는 마루야마 마사오, 쓰루미 순스케, 다케다 기요코를 비롯하여 문자 그대로 전후 일본 민주주의를 리드하는 지식인들의 모임으로 1946년 발족되었다. 특히 이들의 전향에 대한 공동연구가 1959~1962년에 걸쳐서 집필-번역본의 편자 해제에서는 상권이 1952년으로 되어 있지만 59년의 오기일 것이다-되었다는 것은 당시 전후 일본의 사상 상황이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1955년의 육전협(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과 스탈린 비판, 1956년의 헝가리 동란, 1960년의 안보투쟁과 그 좌절 등을 배경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인 영향력이 퇴조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신해서 근대주의적인 이론과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마루야마의 ‘일본의 사상’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을 비롯하여 이시다 다케시, 가미시마 지로, 하시가와 분조 등 마루야마 학파의 연구가 거의 이 시기에 집중되고 있었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후지타의 입장도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1956년 발표한 ‘천황제국가의 지배원리’와 이듬해의 ‘천황제와 파시즘’에서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전향 성명이 일본 민중의 천황숭배에 대한 ‘굴복’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황제와 전향은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후지타의 전향론의 기본적인 시각도 이러한 천황제의 지배원리에 대한 관심과 ‘보편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후지타는 1933년을 정점으로 한 ‘급진주의자’들의 집단전향, 1940년의 신체제운동에서 정점을 이루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강제적 전향, 그리고 패전에 의한 권력의 이동에 따른 ‘반동주의자’들의 전향과 냉전체제의 심화에 따른 점령정책의 역코스와 1952년의 노동절 탄압 직후에 정점에 달한 ‘급진주의자’들의 전향을 각각 단계별로 나누어 총론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전향, 비전향, 위장전향, 표면적 전향, 실질적 비전향 등에 대한 일면적인 판단을 배척하고 다의적인 양상의 내면으로 들어가 파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향은 단순한 강제성이나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사상이나 심경의 변화도 아니다. 그것은 곧 자발성의 문제와 강제성의 문제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장의 표제가 ‘쇼와’라는 원호를 사용해서 표기한 점에 대해서 저자는 당시에는 “이러한 종류의 연구 집단과 그 지도자조차도 원호 표기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쇼와’라는 원호를 사용하는 그 자체에 천황제와 전향의 관계가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역자 후기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넓은 의미에서의 전향이란 국가와 민족을 다른 어떤 것보다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것으로 자신의 내면세계에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는 국가권력의 강제적 행위를 가리키며, 일본의 경우 그러한 강제성과 자발성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천황제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후지타의 글은 난해하다. 마루야마 학파의 글들이 모두 그렇지만 특히 석사과정 때 읽은 후지타의 ‘천황제국가의 지배원리’는 정말 난해했다. 지금 다시 펼쳐보면 새까맣게 줄이 그어져 있지만, 여전히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난해한 후지타의 글을 옮기는 작업도 여간한 집중력과 끈기가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역자의 노력에 새삼 감탄한다.

끝으로 이미 반세기 전에 집필한 ‘전향’을 주제로 한 연구서가 오늘날 번역된 의미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는 후기에서 한국의 ‘운동권’과 ‘진보적’ 지식인의 ‘전향’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다. 식민지시대의 친일파가 해방 후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과연 ‘전향’인지 ‘변절’인지 되씹어보고 싶은 부분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전향’과 ‘비전향’, ‘변신’과 ‘변절’에 대해서도 사상사적인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박진우|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08.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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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14 08:19   좋아요 0 | URL
저의 '강박적 전공분야'(?)와 관련된 반가운 출간 소식이군요.
소중히 갈무리해두겠습니다. 감사드려요, 로쟈님.^^

로쟈 2008-01-14 08:23   좋아요 0 | URL
저는 리뷰만 기다리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