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의 <문학은 자유다>(이후, 2007)에 실린 두번째 평론은 '1926년...'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부제는 '파스테르나크와 츠베타예바, 그리고 릴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두 러시아 시인과 한 독일 시인의 관계에 대한 평론이고, 보다 정확하게는 이 세 시인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들을 묶은 책 <편지: 1926년 여름>의 리뷰에 해당하는 글이다(책은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파스테르나크와 츠베타예바가 편지를 교환한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릴케까지 가세했었다는 건 이번에 알게 됐다. 사정을 알고 보면 또 무지가 용납될 만한 게 이 영역본(1986)의 저본은 러시아어본이 아니라 독어본(1983)이다. 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어본은 츠베타예바와 파스테르나크의 편지들만을 묶은 것으로 <영혼들이 보기 시작한다: 편지들, 1922-1936>(2004)이란 제목이고 720쪽 분량이다.

Марина Цветаева, Борис Пастернак Души начинают видеть. Письма 1922-1936 годов

내가 아는 건 2004년판인데, 모스크바에 체류시에 구입하지 않은 게 후회스러운 책들 가운데 하나다(다행히 아직 절판되지는 않았다). 독어본은 1926년에 한정하여, 이 두 사람에다 릴케까지 가세하여 서로가 나눈 예술적 열정(혹은 "예술의 성스러운 섬망 상태")을 모아놓았던 듯하고, 그게 영어로도 번역된 것이다.

1926년이면 츠베타예바가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로 건너간 지 4년째 되는 해였는데,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가장 소중하 대화 상대자였다. "파스테르나크는 츠베타예바가 자기보다 더 위대한 시인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했고 자기가 쓴 글은 츠베타예바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었다."

가족과 함께 파리로 건너간 츠베타예바는 이때 서른 네 살이었고, 파스테르나크는 서른 여섯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숭배했던 릴케는 쉰한 살이었는데, 스위스에 있는 요양소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이 교환환 편지들은 러시아와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를 세 꼭지점으로 하여 왕래된 것이었다.

 

 

 

 

릴케에 대해 조금의 견식이 있는 독자라면 그가 두 차례 러시아 여행을 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러시아가 자신의 진정한 정신적 고향이라고 생각했다: "릴케에게 큰 영향을 준 릴케의 첫사랑이자 스승은 페테르부르크 태생 작가였는데, 그 사람과 함께 두 차례 러시아를 여행했고 그 뒤로 러시아가 자기의 진정한 정신적 고향이라고 생각했다."(42쪽) 

'페테르부르크 태생 작가'로서 릴케의 첫사랑이자 스승(멘토)였던 '그 사람'은 바로 루 살로메이다. 릴케는 1900년 살로메와 함께 두번째 러시아 여행을 떠나는데, 그때 열살이었던 소년 파스테르나크는 릴케를 처음 만나고 짐작엔 인사를 주고받는다(화가였던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가 릴케와 면식이 있었다).

"파스테르나크는 릴케가 애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 함께 기차에 오르는 모습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했고 그 장면이 파스테르나크의 가장 뛰어난 산문 <안전통행증>(1931)의 첫머리에 나온다.(존경의 뜻으로 두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42-43쪽)

참고로, <안정통행증>은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으로 번역됐었다. 이에 대해서는 '마야코프스키와 파스테르나크'(http://blog.aladin.co.kr/mramor/834190),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http://blog.aladin.co.kr/mramor/1529971)를 참조. 

Рильке и Россия

러시아에서는 <릴케와 러시아>(2003)란 타이틀의 책도 출간돼 있다. 역시나 2004년에 손에만 들었다가 놓았던 책인데,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없지 않다(다 돈의 장난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있는 주제이긴 하지만, 내가 감당하기엔 견적이 너무 나오기 때문에 미뤄놓을 수밖에 없다(내가 바라는 건 누가 이런 책을 써주는 것이다!). 

세 사람의 편지왕래는 "파스테르나크 아버지의 주선으로 릴케와 파스테르나크 사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다음에 파스테르나크가 츠베타예바에게 편지를 쓰라고 릴케에게 제안하여 세 사람의 편지왕래가 되었다. 츠베타예바는 뒤늦게 합류했지만, 츠베타예바의 욕구, 대담성, 감정의 솔직함이 하도 강렬하고 도발적인 탓에 곧 세 사람 사이의 대화가 불타오르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45쪽)

결국 츠베타예바는 릴케에게 만나자고 간청할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고 릴케는 침묵에 잠긴다. 츠베타예바에 대해서는 '시인이 쓴 산문'(http://blog.aladin.co.kr/mramor/867577)과 '츠베타예바의 산문'(http://blog.aladin.co.kr/mramor/1779102)을 참조.

하지만 "츠베타예바는 12월말 릴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며칠 뒤 릴케에게 편지를 쓰고, 이듬해에는 긴 산문으로 된 송시(ode)를 바친다." 파스테르나크도 릴케가 죽고 5년이 흐른 뒤에 완성한 <안전통행증> 말미에 릴케에게 보내는 편지를 포함시킨다. <안전통행증>은 "릴케의 영향 아래에서 쓴 것이며 무의식적으로라도 릴케와 겨루며 쓴 글이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1910)를 의식하며 썼다는 얘기다.

죽음이 갈라놓은 세 사람의 인연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릴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두 사람은 믿지 않으려 한다. 우주적으로 보아 도무지 부당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15년 뒤인 1941년 8월, 츠베타예바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또 놀라고 회한을 느낀다. 1939년, 츠베타예바가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오기를 결심했을 때, 돌아오면 파국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파스테르나크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47쪽) 파스테르나크다운 일이다.

 

손택이 보기에 세 사람의 열정은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충만했다. "이 편지들에 쏟아부은 광희(ecstasies)는 서로 떨어져 있었기에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며 서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다." 손택의 결론은 이렇다.

 


"1926년의 몇 달 동안 세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대에게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서로에게 아름답고 불가능한 요구를 할 때 타오른 그 불빛을 가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모든 것이 위선적 형식주의에 빠진(파스테르나크의 표현이다)' 지금 그들의 열정과 고집은 뗏목처럼, 등대처럼 바닷가처럼 느껴진다."(47쪽)

 

'뗏목'과 '등대(횃불)'와 '바닷가'에 대한 그리움, 그게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파스테르나크에게서나 손택에게서나, 그리고 우리에게서나 '모든 것이 위선적 형식주의에 빠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위선적 형식주의'는 '바리새주의(Pharisaism)'의 번역인데, '위선적 형식주의'를 가리키는 말이긴 하지만 여기선 직역해주는 게 더 나았다.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oday, when 'all is drowning in Pharisaism' - the phrase is Pasternak's - their ardors and their tenacities feel like raft, beacon, beach."             

 



 

 

 

 

 

 

여기서 '파스테르나크의 표현(all is drowning in Pharisaism)' 은 그의 시 '햄릿'(1946)에 나오는바, 이 시의 서정적 화자는 햄림이자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햄릿'?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에 실린 '유리 지바고의 시'에서 맨처음에 나오는 시이다(지바고의 시들은 소설의 제 17부에 해당한다. 간혹 '부록'으로 처리하거나 아예 생략한 국역본들이 있는데 무지하거나 무례한 경우들이다). 엘레노어 로우(Eleanor Rowe)의 영역은 이렇다.

 
The rumbling has grown quiet. I walk out on the stage.
Leaning against a door jamb,
I try to catch in a distant echo
What will happen in my lifetime.

At me is aimed the murkiness of night;
I'm pinned by a thousand opera glasses.
If only it is possible, Abba, Father,
May this cup be carried past me.

I cherish your stubborn design
And am agreed to play this role.
But now a different drama is underway;
This time, release me.

But the order of the acts has been determined,
And the ending of the journey cannot be averted.
I am alone; all drowns in Pharisiasm.
To live life is not to cross a field.

 

같은 대목을 <닥터 지바고>의 범우사판에서는 "세상엔 득실거리는 바리새 사람들뿐"으로 옮겼고, 열린책들판은 "다른 모든 것은 바리새주의에 쏙 빠져 있다"로 옮겼다. 범우사판으로 전문을 인용하면 이렇다. 
 

소요가 멎는다. 난 무대 위로 나선다.

문설주에 기댄 채

멀리 들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다.

나의 생애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을까.

 

밤의 어둠이 나를 향해

수천의 쌍안경을 눈알처럼 응시한다.

제발, 하나님 아버지 나의 곁에서

부디 이 술잔을 가져가 주소서.

 

나는 당신의 꿋꿋한 뜻을 사랑하며

맡겨진 이 역할들을 기꺼이 수락합니다.

그러나 지금 다른 연극이 상연되고 있으니

이번만은 나를 그대로 있게 하소서.

 

하지만 연극의 순서는 이미 정해진 것

마지막 길은 피할 수 없다.

나는 외롭다, 세상엔 득실거리는 바리새 사람들뿐

산다는 것은 들판을 지나듯  되지는 않는다.

 

 

시의 제목은 '햄릿'으로 돼 있지만 막 무대로 나가야 하는 배우의 대사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그래서 '햄릿-그리스도'이다). 사실 파스테르나크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러시아어로 옮긴 번역자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햄릿 배우 중의 하나는 가수이자 배우 비소츠키인데, 그의 <햄릿> 공연 서두에서는 비소츠키가 낭송하는 시가 바로 이 '햄릿'이다(http://www.youtube.com/watch?v=-r01fRADCII). 아래는 러시아어 원시인데, 비소츠키는 (3연을 제외하고) 1, 2, 4연을 절규하듯이 노래한다(그가 연기하는 햄릿의 독백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QJVsuq0tt24 참조).

 

Гул затих. Я вышел на подмостки.
Прислонясь к дверному косяку,
Я ловлю в далеком отголоске,
Что случится на моем веку.

На меня наставлен сумрак ночи
Тысячью биноклей на оси.
Если только можно, Aвва Oтче,
Чашу эту мимо пронеси.

Я люблю Твой замысел упрямый
И играть согласен эту роль.
Но сейчас идет другая драма,
И на этот раз меня уволь.

Но продуман распорядок действий,
И неотвратим конец пути.
Я один, все тонет в фарисействе.
Жизнь прожить — не поле перейти.

 

러시아 속담이지만, 산다는 것은 들판을 지나는 게 아니다. 만만하지 않고 팍팍하다는 얘기다. 세 시인에 관한 얘기를 (옮겨)적은 건 하루치의 우울을 소진하기 위해서였다. 모름지기 겨울이면 뗏목이라도 타고 어디 눈덮인 통나무집에라도 가야 폼도 나는 게 아닐까 싶지만(삶의 품위를 위해서), 내겐 스티로폼도 없구나...

08.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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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6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치의 우울을 소진하기에도 참으로 만만치 않은, 팍팍한 일상입니다. 그나저나 저번부터 츠베타예바의 글은 정말 관심이 많이 가는데요, 소개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될 때 영어본이라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로쟈 2008-01-06 09:20   좋아요 0 | URL
네,영어본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한두 권 나와 있던 국역본 시집들은 모두 절판 상태구요...

2008-01-06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06 15:49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정신의 '뗏목'과 '통나무집'도 우리에겐 필요한데, 다들 '팬션'만 찾는 풍토라서요(시인들의 죽음도 우울하고). '호젓한 숲길'은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필요한 것인데...

털세곰 2008-01-08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쯔베따예바의 시는 유독 외국독자, 연구가들에게 약간의 관심 밖이죠. 신난했던 삶이 오히려 포커스를 받지 그녀의 시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죠... 아, 다시 생각해보니 관심 밖이라기 보다 외국독자들에겐 러시아 독자보다 뭔가 좀 덜 전달되는 그게 있을 것 같애요. 장애물이랄까... 유독 그녀의 시는 리듬도 그렇고 읽기도 좀 뭐하고...

로쟈 2008-01-08 14:42   좋아요 0 | URL
한동안 러시아에서 연구서들이 쏟아져나온 것과 비교하면 한산한 편이지만, 사실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아닌 이상 문학연구는 연구자 개인의 관심사와 연관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도 논문이 두엇 가량 있을까 싶은 정돈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