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과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7)을 주섬주섬 읽었다(예전에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 때문에). 두 권 모두 독립된 논문들의 묶음이어서 반드시 완독할 필요는 없고 흥미를 끄는 장들만을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동일한 주제/주장이 계속 반복/변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저자가 이미 밝혀놓은 것이기도 하다.

 

 

 

  

"이 글들은 다양한 청중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니만큼, 똑같은 관점들이지만 서로 다른 맥락에서 고려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상당량의 반복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반복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반복을 원래대로 두기로 했다."(9쪽)

내가 주로 읽은 장들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서문('경합적 다원주의를 위하여')과 1장('급진민주주의: 근대적인가 탈근대적인가?'), 7장('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접합에 대하여'), 그리고 <민주주의의 역설>에서 서론('민주주의의 역설')과 1장('민주주의, 권력, 그리고 '정치적인 것''), 5자장('경쟁자 없는 정치>'), 결론('민주주의의 윤리') 등이다. 역시나 전체적인 조감도를 그려보는 데 가장 유익한 건 서문/서론이며 이어지는 1장들이 핵심을 포괄하고 있다.

<귀환>의 머리말에 따르면 "이 책의 통일적인 핵심 주제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성찰과 권력 및 적대의 뿌리 깊은 특징에 관한 성찰이다. 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좌파의 기획을 다시 정식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최근의 합리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담론을 비판하고자 이런 성찰의 결론을 끌어내려 했다."에 적시돼 있듯이 무페의 기본 입장은 좌파의 정치적 입장을 '급진적 다원적 민주주의'로 재정식화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함리적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담론을 비판하는 것이다(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뿌리 깊은 특징'은 'ineradicable character'를 옮긴 것인데 같은 뜻이지만 '근절할 수 없는'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합하다. 무페가 보기에 권력과 적대는 근절할 수 없으며 해소 불가능하다).

제목에서 이미 강조되어 있지만 무페의 정치이론의 시발점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대한 관심이다. 이것은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에서 빌려온 것인데, 11쪽의 역주에 따르면, "경제, 문화, 종교, 사회 등과 구분되는 제도적 영역으로서의 정치(politics)와 다르게, '정치적인 것'은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을 규정하는 차원"을 가리킨다. 무페가 보기에 대부분의 자유주의 정치이론가들의 무능력은 "정치적인 것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자유주의 사유의 무능력과 적대의 환원 불가능한 특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롤즈의 자유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정치적인 것'을 회피하거나 사고하지 못하는 주류적 정치관에 대한 무페의 비판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정치관은 합리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나는 이 정치관의 주요 결함이, 갈등과 결정의 차원에 놓인 정치적인 것의 특정성에 관한 안목이 없고, 적대가 사회적 삶에서 구성적인 역할을 하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종언 이후 적대라는 통념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가상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하지만 이 믿음에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12쪽) 

슈미트의 '통찰'이 필요한 것은 이 대목에서이다(역시나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specificity'를 '특정성'이라고 옮긴 것은 어색해보인다. '특성'이나 '특이성'으로 충분해보이는데, 굳이 사전에는 없는 단어로 옮길 만한 이유가 따로 있는지? 'notion'은 무조건 '통념으로, 또 자주 나오는 단어 중 'existence'는 '실존'으로만 옮긴 것도 기계적인 번역이다. 'illusion'을 '환상' 대신에 '가상'이라고 옮긴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소위 '칼 슈미트의 도전'인데, 그람시와 함께 슈미트는 무페의 이론적 프로젝트를 떠받치는 지주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은 무시하지 못할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자유주의의 결함을 이렇게 드러냄으로써, 슈미트는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제기되어(야) 할 쟁점들을 확인하게 해주어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 내 목표는 슈미트와 함께 생각하고 슈미트에 반대하여 생각하고 슈미트의 비판에 맞서 그의 통찰을 자유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슈미트의 기본 통찰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학의 중심에 '친구/적 관계(friend/enemy relation)를 갖다놓은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적의(hostility)를 정치적인 것의 차원과 연결시킨 것이다(이 점에서 슈미트/무페의 '적대의 정치학'은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과 대척점에 놓인다). 사실 이건 정체성 형성에서 기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기억에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주체 형성에 관한 라캉의 정신분석학도 적극적으로 참조한다). 왜 그런가?

"모든 정체성이 관계적이라는 것, 또 각각의 모든 정체성의 실존 조건이 어떤 차이의 긍정, 즉 '구성적 외부' 역할을 할 하나의 '타자'를 결정하는 것임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적대가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경계를 설정해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관건인 집단 정체성 형성의 영역에서는,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친구와 적 유형의 관계로 전환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달리 말해 슈미트의 용어 이해에 따르면 이런 관계는 항상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13쪽)

여기서 '구성적 외부(constituitive outside)'는 데리다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민주주의의 역설>에서는 '구성적 타자'라고 번역돼 있다): "그의 '구성적 타자(*외부)'의 개념이 모든 객관성에 내재하고 있는 적대감과 집합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우리와 타자라는 구별이 중심적이라는 점을 깨닫는 데 있어서 해체주의적 접근법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역설>, 29쪽) 

우리의 정체성, 더 나아가 집단적 정체성 형성에 '구성적 타자'가 필연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은 본질주의적 입장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비본질주의'가 따라서 무페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객관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필연적으로 유도한다.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에서 우리는 여하한 사회적 객관성도 권력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질 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즉 모든 사회적 객관성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며, 그것의 구성을 지배하는 배제행위의 흔적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구성적 타자'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결정적인 것이다. 모든 실체는 그 자신의 존재에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이 각인돼 있기 때문에 그 결과 모든 것은 차이로 주조되며, 그것의 순수한 '실현' 혹은 '객관성'으로 파악될 수 없다. 구성적 타자는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으로서 언제나 그 내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정체성은 순수하게 우연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권력을 미리 만들어진 정체성들 사이에 벌어지는 외적인 관계로서 이해해서는 안되며, 차라리 권력은 정체성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함을 함축한다. 객관성과 권력 사이의 이러한 동시적인 영향력을 우리는 '헤게모니'라고 명명한 바 있다."(<역설>, 41-42쪽)

<사회변혁과 헤게모니>(터, 1990)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의 국역본 제목인데, 지금은 절판됐다. 다행히 <귀환>의 책갈피를 보니 후마니타스의 근간 목록에 원제대로 올라와 있다(호미 바바의 <민족과 서사>, 에티엔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도 기대를 갖게 하는 근간 목록이다). 여기서 핵심은 모든 사회적 객관성(social objectivity)이 권력에 의해 구성되며, 따라서 정치적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반본질주의의 귀결이며 이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무페의 기본 입장이 도출된다.

"이러한 반본질주의적인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정치를 이해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가 존립하기 위해서 어떠한 사회적 행위자도 사회적 기초에 대한 장악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 행위자들이 그들의 주장이 갖는 특수성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한에서 그들은 보다 민주적이 됨을 의미한다.(...) 이제 더이상 민주적 사회는 사회관계에서 완벽한 조화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사회로 이해될 수는 없다. 그것의 민주적 속성은 여하한 제한적인 사회적 행위자가 자신이 전체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42쪽)

이러한 입장을 우리의 경우에 적용해보면, 자기 주장의 특수성과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주장, 곧 입에 발린 말로 '국민 승리'나 '국민 행복'을 말하는 여하한 정치적 주장도 반민주적인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의 승리', '모두의 행복'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한 약속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다.

"우리 자신이 권력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면서 권력관계의 존재와 그것의 전환에 대한 필요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라고 명명하는 프로젝트에 고유한 것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근대의 다원적 민주주의는 그것이 잘 질서잡혀진 것조차도 지배와 폭력의 부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제한되고 도전될 수 있는 일련의 제도를 만들는 데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적대감의 제거될 수 없는 속성을 부정하고 보편적인 합리적 합의를 목표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다."(42-43쪽)

첫문장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역자라면 이렇게 옮겼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권력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상을 버리면서 권력관계의 실존과 그것의 변형에 대한 필요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라고 명명하는 프로젝트에 특정한 것이다." 요는 다시 한번 적대의 제거 불가능성(ineradicable character of antagonism)이다. 제3의 길을 주장하는 기든스식의 '중도좌파' 혹은 '급진적 중도'에 대한 무페의 비판도 그러한 논리에 근거한다.  

"실로 그러한 관점은 필연적인 경계와 배제의 형태를 '중립성'이라는 가장 하에 감추는 자유주의적 사고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처럼 폭력이 '합리성'에 대한 호소 뒤에 숨어 인지되지 않고 감추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43쪽)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무페가 제시하는 전략이 '급진적 민주주의'이고 '경합적 다원주의'이다.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다원주의가 민주주의 혁명을 심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되도록 다원주의의 관념을 급진화하려면, 합리주의, 개인주의, 보편주의와 절연해야 한다는 것이다."(<귀환>, 20쪽)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에서, 갈등의 최종 해결이 궁극적으로 가능하리라는 확신은 민주주의의 기획에 필수적인 지평을 제공하기는커녕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21쪽) 

이런 맥락에서 무페는 보편주의에 대한 주장(하버마스)과 그에 대한 거부(리오타르)를 모두 비판한다. "한스 블루멘버그가 <근대의 정당성>에서 구별한 계몽주의의 두 측면을 고려하자는 로티의 안내를 따라가보자. 그것은 (정치적 기획과 동일시될 수 있는) '자기주장'과 (인식론적 기획인) '자기정초'와의 구별이다. 일단 우리가 이 두 측면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특정 형식의 합리성에 기반을 둔 것이 분명한 그 통념을 포기하는 대신 정치적 기획을 지지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23-24쪽)

<귀환>과 <역설>에서 모두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Blumenberg)가 '한스 블루멘버그'로 옮겨졌는데, 관례에 따를 필요가 있다(블루멘베르크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025028 참조). 마지막 문장은 불분명하게 번역돼 있다. "일단 우리가 이 두 측면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특정 형식의 합리성에 기반을 둔 것이 분명한 그 통념을 포기하는 대신 정치적 기획을 지지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의 원문은 "Once we acknowledge that there is no necessary relation between these two aspects, we are in the positions of being able to defend the political project while abandoning the notion that it must be based on a specific form of rationality."(10쪽)이다. 마지막 절의 'it'이 받는 건 '통념(notion)'이 아니라 '정치적 기획(political project)'이다. 그리고 여기서 'must be'는 '-임에 틀림없다/분명하다'란 뜻이 아니다.

근대의 정치적 기획과 인식론적 기획이 분리될 수 있다면, 정치적 기획이 반드시 특정한/제한적인 합리성에 정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요지이다. 다시 옮기면, "일단 우리가 이 두 측면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정치적 기획이 특정한 합리성에 정초해야만 하다는 통념을 포기하고서도 그 정치적 기획을 방어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

무페는 두 가지 기획을 구별해야 한다는 블루멘베르크/로티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로티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별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근대성 개념의 핵심부에 있는 두 전통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맥퍼슨이 보여주었듯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단지 19세기에 접합된 것뿐이며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다."(24쪽) 

 

 

 

 

캐나다의 정치학자 C. B. 맥퍼슨은 무페가 중요하게 참조하고 있는 이론가이며 <귀환>의 7장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와 함께) 자세하게 언급된다. 맥퍼슨의 중대한 기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분리시킨 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맥퍼슨의 책으론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인간사랑, 1991)과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박영사, 2002)가 소개돼 있는데, 전혀 다른 책처럼 보이지만 같은 원서를 번역한 것이다. 보비오의 책으론 <민주주의의 미래>(인간사랑, 1989),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문학과지성사, 1992), <제3의 길은 가능한가>(새물결, 1998)이 소개돼 있다. 맥퍼슨/무페가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가 근대 민주주의를 논의할 때 그것의 특징이 두 가지 상이한 전통 사이에서 표출된 것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근대사회의 정치적 형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법의 지배, 인권의 보장과 개인적 자유에 대한 존중 등의 가치로 구성되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있고, 다른 한편으론 평등과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시, 그리고 인민주권 등의 사상으로 구성되는 민주주의적 전통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전통 사이에는 여하한 필연적 연관도 없으며, 단지 유연한 역사적 표출만이 있을 뿐이다. C. B. 맥퍼슨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처럼 자유주의는 민주화되었고 민주주의는 자유화되었다."(<역설>, 15-16쪽)

'표출'이라고 내내 옮겨진 것은 'articulation'의 번역이며 <귀환>의 역자처럼 '접합'이라고 옮기는 게 적합하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이 두 가지 전통 사이에는 여하한 필연적 연관도 없으며, 단지 유연한 역사적 접합만이 있을 뿐이라는 게 핵심적인 내용이다. '민주주의 역설'이란 표제가 뜻하는 바는 이러한 우연한 접합이 낳은 효과이기도 하다: "이 책의 중심적인 주장은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밑바탕에서는 상호 조화될 수 없고 결코 서로 완벽하게 화해될 수 없는 두 개의 논리가 표출된(*접합된) 결과물임을 이해하는 것이 민주주의적 정치에 필수적이라는 점이다."(<역설>, 18쪽)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이 제기되는 건 이 지점에서인데, 그는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생존할 수 없는 체제"라고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무페는 그러한 '역설적 관계'가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요점은 이렇다.

"보편주의적인 자유주의적 논리가 평등에 대한 민주주의적 이해와 '인민'을 정치적으로 구성해야 될 필요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슈미트의 생각이 옳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두 전통 중 하나를 우리가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양자의 표출(*접합)이 역설인 지형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시키는 모순적 관계로 보는 대신에 두 논리 사이의 긴장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나의 주장은 이러한 역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을 이해하는 관건이라는 것이다."(<역설>, 25쪽)

첫문장은 비문이다. 원문은 "I state that, while Schmitt is right to highlight the different ways in which the universalistic liberal logic is in opposition to the democratic conception of equality and the need to politically constitute a 'demos', this dose not force us to relinquish one of the two traditions."(9쪽)이고, '- 사이의 대립'이란 표현은 없다. 다시 옮기면, "보편주의적 자유주의의 논리가, 민주주의적 평등 개념과 인민(demos)을 정치적으로 구성해야 할 필요와는 대립적이라는 사실을 여러 모로 강조해서 보여준 슈미트의 주장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두 전통 가운데 하나를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다양한 이론적 주제에 관한 무페의 논의를 계속해서 따라가볼 수 있겠지만 시간상/분량상 이 정도에서 일단 끊어야겠다. 당초 '민주주의 혁면과 급진민주주의'란 타이틀을 달았지만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얘기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기에 제목은 그냥 '정치적인 것과 민주주의의 역설'이라고 해둔다...

07. 12. 16-17.

P.S.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민주주의의 역설>은 오역서라곤 할 수 없어도 기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번역서들이다. 군데군데 오역이 있기도 하거니와 교열도 평균점 이하이기 때문이다. <역설>의 경우엔 고유명사 표기가 엉망이다. 클로드 르포(클로드 르포르), 디데로(디드로), 지라드(지라르), 에이펠(아펠), 커벨(카벨), 라지크만(라이크만), 앙드레 고르츠(앙드레 고르) 같은 인명 표기들은 역자가 최소한 국내에서 통용되는 표기들에 전혀 무지하다는 걸 보여준다(편집자는 무관심했다는 것이고). 나는 원저들도 읽어본 바 없을 거라는 데 내기를 걸겠지만.

<귀환>의 경우에도 '찾아보기'는 불만스럽다. 원저에 없는 항목들이 일부 추가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원저에 있는 항목을 누락시킬 이유가 있는가? 대표적으로 '맥퍼슨'이란 이름을 국역본의 색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비중이 적은 것도 아니어서 '맥퍼슨'은 여덟 페이지에 걸쳐 등장한다). 그리고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왜 'o'에 가 있는가? 39쪽에서 '실재에 대한 정의'는 'definition of reality'의 번역인데, '정의'의 한자어가 '定義' 대신에 '定議'라고 엉뚱하게 병기돼 있다.

이런 엉뚱한 병기는 영어의 경우에도 눈에 띈다. 35쪽에서 '선취들'은 '선입견들'이라고 옮겨야 할 'prejudices'를 잘못 옮긴 것인데, 엉뚱하게도 'preoccupations'란 단어가 병기돼 있다(이런 실수 혹은 창작이 역자의 '작품'인지 편집자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확인할 수 있는 건 무지와 무성의다. 적어도 역자가 가다머를 읽지 않았다는 걸 알려준다). 사소한 실수들이더라도 누적되면 책에 대한 신뢰를 좀먹는다. 더구나 공짜로 얻은 책들도 아니고 제값을 다 치르고 산 책들임에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매 2007-12-18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두번째 단락, '실재에 대한 정의'에 대한 지적은 37p이 아니라 39p에 나옵니다.
<귀환>의 경우 두챕터정도 무난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꼼꼼히 봐야되겠군요.

로쟈 2007-12-18 18:33   좋아요 0 | URL
페이지를 잘못 봤군요.^^; 그럭저럭 무난하게 읽히지만 불만스런 대목들도(실수나 오역) 눈에 띕니다(그래서 완벽한 번역은 없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좋은 번역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