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인에 기고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의 리뷰기사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약자'가 아닌 지식인, 혹은 '약자'가 아니고자 하는 지식인이 득세할 때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사회는 이들이 비워놓은 자리를 다만 '사이비 지식인'(혹은 '집 지키는 개')들로 채워놓을 따름이다. '지식 계급'은 '지식층'으로 용해되고, '지식층'은 또 자연스레 사회 '지도층'으로 편입된다. 이것은 애도할 만한 일일까? 그나마 아직은 '양심고백'과 '지지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지식인 시대의 흔적을 다행스러워해야 할까?"

마지막 문장에서 '얌심고백'은 물론 삼성 비자금에 대해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지 선언'은 그에 대한 지지를 표하면서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PEN)’의 이름으로 낸 삼성 특검법도입 촉구성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PEN의 성명 발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상봉 교수와의 인터뷰가 기사가 있길래 옮겨놓는다(사실은 나도 얼마전에 PEN으로부터 성명에 동참해달라는 메일을 받았는데, '철학자'가 아니어서 따로 의사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문학자 네트워크'에서 보냈다면 사정은 달라졌겠지만)...  

경향신문(07. 11. 27) ‘철학자…’ 김상봉 교수 “삼성의 협박에 끌려다녀선 안돼”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 2007년이 저물어가는 한국사회에서 철학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느티나무 카페에서 이용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삼성 뇌물 500만원 폭로가 있었던 그 날(11월19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앞에서는 전국의 철학자들이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PEN)’의 이름으로 삼성 특검법 도입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참여한 철학자는 210명이다. 김남두 서울대 교수, 유초하 충북대 교수, 홍윤기 동국대 교수, 박상환 성균관대 교수, 강신익 인제대 교수, 신승환 가톨릭대 교수 등 참여자들의 면면은 한국 철학계를 이끄는 주축들이다. 이 전 비서관의 폭로와 맞물려 국회의 특검법 통과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이번 성명 뒤에는 신속하게 철학자들의 뜻을 모은 김상봉 교수(47)가 있었다. 김교수를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만났다.

김교수는 한사코 자신은 ‘잡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시작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음해성 시비 등으로 본질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던 2주일 쯤 전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의 대화에서였다.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김교수의 말에 홍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홍교수가 ‘격문’을 쓰기로 하고 김교수는 ‘연락책’을 맡았다. “과연 시민과 성직자의 양심이 이렇게 무시되고 경시돼야 하는가”를 묻는 홍교수의 ‘명문’이 나왔다. 김교수는 전국 각지에 분포된 10여명의 철학 교수들에게 연락했다. 철학자들의 중지를 모아달라고. 이윽고 210여명의 교수의 이름이 모였다.

철학자들이 발언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민교협 같은 운동단체와는 좀 다른 느낌을 주죠. 같은 말이라도 ‘철학자들은 저렇게 말하는구나’ 하는 걸 보여줄 수 있어요. 똑같은 정치·사회 이슈를 철학의 눈으로 봤을 때 더 근본적으로 성찰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겁니다. 이번 경우 다들 비리가 어떻고 얘기들을 많이 하고,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철학자 입장에서는 한 인간이 양심선언이라고 해서 발언할 때 우리는 그 양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봤어요.”

철학자들이 모여 성명을 낸 것은 이번이 여섯번째다. 2004년 탄핵 후 4·15 총선을 앞두고 정동영 열린우리당 선대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한 것을 시작으로(실제로 정위원장은 사퇴했고, 여권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이라크 파병 반대 성명, 송두율 교수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항소심 재판부에 보낸 무죄 석방과 국보법 폐지 성명, 보수단체의 전시작통권 환수 반대 서명에 전·현직 한국철학회 회장들이 악의적으로 활용될 때 학회장의 사퇴를 촉구한 성명 등 고비고비마다 이들은 발언하고 개입했다.

“PEN은 사실 실체가 없는 조직입니다. 회장도, 대표도, 사무실도 없어요. 일종의 유목 네트워크죠. 하지만 몇 차례 이런 경험을 공유하며 한국사회에 중요한 사안이 터지면 신속하게 중지를 모아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내는 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은 문구 하나도 치열하게 토론한다. 이번에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은 ‘삼성제품 불매운동’ 문구이다. “불매운동 안하겠다는 얘기는 그냥 한 번 짖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네(삼성)들이 뭘 겁내겠느냐는 말이죠. ‘이 녀석들아, 또 떠들어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국가경제 어쩌고 하는 여론몰이 때문에 불매운동 못하겠다는 것은 저쪽이 바라는 바이자, 노리는 바입니다. ‘공포의 동원’이죠.”

그는 삼성 불매운동 때문에 국가경제가 위험에 빠진다는 논리는 박정희 독재 때 독재를 비판하면 북이 남침해 올 지 모른다는 논리와 똑같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는 국가권력이든 삼성이든, 황우석이든 자신을 국가(또는 국민)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위험에 처하면 국가가 위험에 처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동일화의 논법으로 전국민을 협박합니다. 삼성 족벌체제가 무너진다고 해서 삼성이 망하겠습니까. 백번 양보해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국가경제가 무너지겠습니까. 평소엔 세계 12위 경제대국을 자랑하다가도 매번 비리 척결 얘기만 나오면 유아기로 퇴행해버립니다. 언제까지 삼성의 협박에 끌려다닐 건가요. 인간을 억압하고 노예화시키는 것은 국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도 할 수 있고 기업도 자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EN에 동참한 철학자들은 조만간 대학 내에서 ‘쟁점 강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강의명은 ‘아직도 삼성 제품을 쓰십니까?’다. “부도덕한 기업의 제품을 쓰는 것은 부도덕을 방조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한 학기에 30분이라씩이라도 할 것입니다. 기왕의 삼성제품은 마크를 지우고 쓰고, 다 쓰면 다른 회사 제품을 사도록, 민교협과 함께 지속적으로 홍보할 것입니다. 언젠가 삼성 제품 들고 있으면 부도덕하고 교양없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김교수는 지난 4월 전남대가 정몽준 의원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려 했던 계획을 철회토록 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죽고 사는 것은 돈이나 건물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정신이 죽으면 철학은 끝입니다. 정몽준씨가 대학에 어떤 건물을 지어주기로 되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돈을 주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이 기업 찾아다니며 ‘앵벌이’ 한다는 것은 학문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학자들이 양심의 가책 없이 인간을 위한 학문을 한다는 말을 한다는 게 너무 놀랍습니다. 400억~500억원 들여 삼성관, 엘지관을 지은 대학들은 언젠가 그 건물이 수치스러운 기념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들에게 분명히 물어야 합니다. 당신들 자랑스럽냐고. 그러고도 당신들이 국민 세금을 지원 받을 존재 이유가 있느냐고.”

정의원에 대한 명예철학박사 수여를 철회하라는 요구는 교수들이 먼저 내서, 대학원생, 학부생, 학생회까지 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책임이 무거운 교수들이 청년학생들보다 먼저 알고, 먼저 얘기를 하는 게 마땅합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사회적인 발언, 비판의 몫이 계속 학생들에게만 돌아가다보니 젊은 학생들이 그에 대한 비판까지 모두 떠안아야 했습니다. 학생들이 모든 걸 다 떠안게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그러면 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번 일은 일종의 교육적 효과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자기 선생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 거죠. 저 사람들은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구나. 교수회의에서도 그 점이 크게 작용했어요.”

자본의 공세에 거의 모든 대학들이 무릎을 꿇은 지금 전남대 철학과 혼자만으로는 너무 미약하지 않을까. “아직은 그런 걸 물리칠 줄 아는 대학은 전남대 그것도 철학과 뿐이죠. 그러나 처음이 어려워요. 이런 식의 사례가 생겨난다면 다른 데서도 이런 비슷한 일들에 직면할 때 생각 안할 것을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생각할 것을 두 번 생각하겠죠. 대학 사회가 자본의 매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는다는 사례를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전남대 철학과와 PEN에서 새로운 지식인 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는 신뢰를 못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자기가 선 자리를 진보적으로 견인하지 못하면서 밖에 나가서 세상을 진보적으로 견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철학계는 한창 공부하는 사람들이 일관되게 진보적 목소리를 내니까 학문후속세대도 그런 쪽으로 견인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보고 누가 ‘김상봉이 공부하기 싫어서 저 짓 하고 다닌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어떤 새로운 공동체의 전망을 열어줍니다. 한국 학계 초유의 일입니다.”

그는 “1970~80년대 진보운동 진영을 문학계와 역사학계가 견인해 왔다면 앞으로는 철학계가 견인할 것”이라고도 했다. 사실 문학계 안팎에서는 이미 근대문학의 역할은 끝났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지금까지 PEN의 활동은 새로운 지식인 운동을 위한 준비였고 어느 정도 검증도 됐다.

“정파를 만들지 않고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오직 이성을 신뢰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한국사회를 진보적 방향으로 견인해 나가려 합니다. 사실 지난 100년간 한국 철학은 외래철학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 덕에 지식이라면 많이 축적했어요. 이제는 현실과 만나며 현실을 철학적으로 해석해내고 현실을 끊임없이 참된 방향으로 견인해나갈 것입니다. 한 사회 내에서 왜 철학이 필요한가를 보여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날 새벽차를 타고 상경해 인터뷰를 하고 월요일 아침 강의가 있어 광주로 내려가야 한다며 총총걸음으로 돌아서는 김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에 철학자가 발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손제민기자)

07. 11. 27.

P.S. 아래는 PEN의 성명 소개기사이다.

경향신문(07. 11. 27) [성명] PEN “양심선언을 지지하고 엄정한 특검 수사를 촉구한다”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 (PEN, Philosophical Engagement Network)

특수부 출신 전직 검사이자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그리고 현재 변호사인 대한민국 시민 김용철 님의 양심고백을 근거로 지난 10월 29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삼성그룹 비자금 전모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지 한달이 되어가고 있다. 그 동안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우리의 직업인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 윤리 개념인 ‘양심’의 입장에서, 과연 우리 국가와 사회가 바로 이 양심을 알아보고 지원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비상한 관심으로 주시해 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삼성제국’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경제적 독재권력이 중심에 놓인 이 사건을 두고 국가 기관, 각종 사회권력들, 특히 청와대와 여야 정당, 그리고 언론의 반응을 보면서 크게 절망한 끝에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우선 첫째, 우리는 검찰이나 금융감독원이라는 국가권력 담당자들이 자기 인생을 걸고 삼성제국의 거대한 비리를 짚어낸 한 인간의 양심을 알아볼 그 어떤 의지도 없다는 데 실망한다.
― 그리고 둘째, 우리는 언론을 비롯한 이 사회의 각종 권력들이 침묵의 카르텔을 고수하면서, 김용철이라는 한 시민의 양심이 묻히고 그가 파렴치범으로 각인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처신을 보이는 데에 절망한다.

10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사제단은 김용철 전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 명의로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에 개설된 차명계좌 세 개와 굿모닝신한증권 도곡동 지점의 증권 계좌 한 개의 번호, 그리고 그 계좌들에서 발생한 이자소득의 액수까지 제시했다. 과거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 사건은 당시 박계동 신한국당 의원이 제시한 예금잔고 조회표 한 장으로 그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까이는 2006년 현대차 비자금 사건의 경우 A4 서너 장에 불과한 내부 실무자의 회계자료 제보 하나로 정몽구 회장의 구속까지 이르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사건들 모두 대검 중수부가 바로 수사에 착수했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는 한 고위공직자의 사소한 권력형 비리와 남녀 스캔들이 뒤얽힌 학력 관계 사문서위조사건을 갖고 유력한 사립대학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로 털어내다 급기야 쌍용그룹 전 회장이 집안에 은닉한 막대한 비자금까지 찾아냈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만능의 수사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검찰과 경제계의 검찰격인 금융감독원은 김용철 변호사와 사제단이 생명과 인격을 걸고 제시한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수사 착수는커녕 마치 범인들로 하여금 증거를 인멸하고 입 맞출 시간을 갖게 할 요량인 양 계속 시간을 끌었었다. 어떤 경우에도 검찰과 금감원의 수사 능력이 아니라 수사 의지가 문제다. 과연 시민과 성직자의 양심이 국가기관에 의해 이렇게 무시되고 경시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힐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삼성제국의 비리를 토설한 김용철 전 법무팀장을 파렴치범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파상적으로 행해져 그 사건을 보는 보통 시민들의 시각을 호도한다는 것이다. 한 학력 위조자에 대해서는 그 알몸 사진이나 사생활까지 샅샅이 캐던 족벌언론들은 이번 사건의 기사를 최대한 축소하고 김용철 변호사의 신상은 어두운 쪽으로 최대한 키워 드러냄으로써 ‘삼성 감싸기’에 급급했다. 호사법 제1조 1항에 따르면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는 변호사들의 모임인 대한변협은 명백히 공익을 저해하고 국가 전체를 오염시키는 은밀한 범법집단인 삼성제국의 행태를 토설한 김용철 변호사가 “의뢰인 비밀 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며 징계를 검토하겠다고 나서 양심 모욕이라는 추태의 정점에 섰다.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의 이런 비호를 등에 업은 가운데 삼성제국 안에서 드디어 비장의 승부수가 연출되었다. 김용철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검찰의 고위 간부 출신으로 삼성의 현직 법무실장인 이종왕 변호사가 변호사직까지 내던지며 김 변호사의 언행을 “모두 거짓”으로 단정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실장의 사직으로 삼성은 김 변호사 개인을 ’파렴치범’으로 부각시키고 자신들의 ’결백’을 호소해 이번 ’진실 공방’에서 여론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려는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제 싸움은 ‘삼성제국의 비리 대(對) 한 내부고발자의 시민적 양심’이 아니라 ‘변호사 대(對) 변호사’의 격투기로 축소될 전망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와 국가는 한 시민의 양심을 알아볼 능력도 없단 말인가?

양심이란 자기 신념이나 사고 또는 행위가 옳다고 믿는 주관적 확신이다 그래서 어떤 개인이 자기의 양심으로만 그 객관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양심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사회나 국가의 정의도 ‘실천적 실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한 개인이 양심을 걸고 나설 때 그 ‘진정성(眞情性)’을 알아채는 것은 그 사회나 국가가 올바르게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사회능력 또는 국가능력이다. 그럼 시민 김용철은 지금 양심적 언행을 하고 있는가?

자기 양심을 걸고 삼성제국의 비리를 고백한 김용철 변호사는 지금까지 착하고 올바른 인생만 산 인물이 아니다. 5공 살인정권의 수괴 전두환의 비자금을 기어이 찾아낸 특수부 검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실토했듯이, 삼성제국 안에서 제국의 범죄를 진두지휘한 그 범죄의 “공범자”이자 경우에 따라서는 “주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PEN)’에 참여한 우리 철학자들은 지금 이 순간, 변호사이기 이전에 이 얼룩진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점에 서서 제국의 비리를 외부에 알린 이 ‘평범한 시민 김용철’의 뒤에 서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철학적 분별력에 따르면 바로 이 순간 시민 김용철이야말로 양심의 절실함을 갈구하는 ‘양심적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삼성정치자금 사건,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을 통한 불법 상속 및 증여 시도 사건, 삼성 X파일 사건 등으로 점철되는 삼성제국의 비리 행진 안에 그것을 추동하는 내부 부패 구조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열어 보임으로써 우리 사회와 국가에 만연한 권력불신과 권력불안의 또 하나 근원이 어디인가를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의 양심선언의 내용은 우리 사회에 아주 유의미한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 삶을 더 잘 알 수 있는 더 많은 진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양심 진정성의 유의미성 조건 충족)

이제 삼성을 빼놓고는, 우리 사회와 국가의 민주주의와 청렴함을 더 이상 논할 수 없다. 삼성은 더 이상 단순한 경제권력이 아니다. 국세청을 비롯한 관료, 검찰, 사법부 판사, 그리고 여야정치권 등의 국가권력, 금융, 재계, 언론 등의 사회권력, 나아가 학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시민사회와 청와대까지도 장악하려는 전체주의적 독재권력이고자 하는 야망의 화신으로 분명히 부각되었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국가 안에서 국가 위에 군림하는 제국(帝國)이다. 그런데 시민 김용철이 말했듯이 “삼성의 역기능은 임계점에 달했지만 자정능력이 없다.”

한 법무법인의 동료들부터도 배척을 받았다. 이런 그의 처지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이익에 초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그를 내몰았다. 그는 자기 행위가 이익에 초연함을 보임으로서 자기 양심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충족시켰다.(양심 진정성에 있어서 이익초연성 조건 충족)

그리고 그는 분명히 나약한 인간이다. 그는 생래적으로 의로운 인간이 아니고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이런 자신의 나약성에 저항하기 위해 수도원 안으로 자기를 가두었다 그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는 곳에다 자신을 묶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돌아가면 자기파멸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곳에다 스스로를 결박했다. 언제든지 굽혀질 수 있는 자기 양심의 나약성에 대해 그는 스스로 저항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양심 진정성에 있어서 자기나약성에 대한 자기저항의 조건 충족)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양심의 진정성에 쏟아질 수 있는 모든 의혹과 비난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스스로 시험대 위에 올랐다. 우리는 그 앞에서 그에게 어떤 비난도 해도 되고 어떤 의혹을 제기해도 된다. 그는 비난과 비판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해명한다.(양심 진정성에 있어서 恒常的 自己試驗用意의 조건 충족)

이러고도 우리 철학하는 이들이 시민 김용철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인가?
이러고도 그를 믿을 능력과 용기가 우리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없다는 얘기인가?
양심은 오직 착하고 선량한 인간만이 가지는 선한 인성의 발동이 아니다. 아무리 악한 인간일지라도 그 어떤 계기를 통해, 그리고 스스로 올바르고 싶고 남들로부터 올바른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원천적 욕구를 갖기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공표하고 그 진정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절실함이 있을 수 있다.

우리 철학이 통찰한 이런 양심 진정성의 요건들에 비추어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거침없이 ‘시민 김용철’의 뒤에 서고자 한다. 한 나라가 ‘발전’하는 데 경제발전의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한 나라가 ‘지속 적으로 발전’하려면 그 경제발전 속에서 양심을 발휘하고 그 양심을 알아보고 그 양심대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 더 고차적인 능력이 필수적이다. 삼성의 저력은 그 경제 능력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사랑과 긍지에 있다. 그러나 족벌체제로 굳어진 삼성제국은 국민의 이런 사랑과 긍지를 끊임없이 배신해 왔다. 족벌제국 삼성은 이제 국민기업 삼성 발전의 족쇄이고 그 질곡이 되려고 한다. 양심을 알아보는 능력, 우리에겐 이제 그것이 절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한민국의 국민에게 우리가 추구해 온 철학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三星帝國, 그 非理를 吐說하는 良心을 알아보자!’
삼성제국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잠식하는 국가 안의 제국이며, 이 나라 지배엘리트 전체를 오염시키려는 반국가 범법집단이다. 따라서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삼성제국의 해체와 삼성의 진정한 발전, 그 위에서 꽃필 대한민국의 정의로운 번영을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1. 여야 정치권과 청와대는 이 삼성제국에 대한 조사와 수사를 주저하는 검찰과 금융감독원의 고위층을 직권정지하고 삼성제국 해체를 위한 특검제를 도입하라! 그리고 특검 수사가 종결될 때까지, 삼성 관리 대상자로 지목된 임채진 차기 검찰총장 내정자의 임용을 철회하라!

2. 청와대는 부패척결의 부담을 차기정부에 전가하지 말고 임기 중에 삼성사태 진상 규명에 전력을 질주하라. 청와대는 참여정부 5년간 삼성권력이 급속하게 비대해지는 것을 방치했을 뿐만 아니라 해괴한 논리를 동원하여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공언함으로써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삼성 감싸기에 나서고 있다. 청와대는 삼성 감싸기를 중단하고 특검법 통과에 적극 협조하라!

3. 금융감독원과 국세청은 변양균 사건과 현대/쌍용 비자금 수사에서 보여준 수사 강도를 능가하는 정도의 방식으로 삼성제국의 범죄기획처인 삼성 전략기획실의 운용과 그 비자금 전모를 낱낱이 밝혀내라!

4. 경제관련 정부 당국과 국회는 단 2%도 안 되는 주식으로 60개 대기업을 좌우하는 삼성가의 족벌경영체제를 이 기회에 종식시키고, 산업자본/금융자본 분리 원칙을 폐기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어떤 음험한 발상도 금지하며,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정책 기조를 공고하게 확립하라!

5. 국민의 진정한 알 권리를 외면하는 족벌언론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해체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며 삼성제국의 진면모를 분명히 알리는 데 앞장서라!

6. 대통령 자리에만 눈멀어 삼성제국의 작태에 눈감으려는 통합신당과 한나라당의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은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을 청취할 청문회를 조속히 개최하여 삼성제국의 반국가 음모를 전 국민 앞에 공개하고 공적 기록으로 남기도록 하라!

7. 이런 모든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그 어떤 명목으로 지급되는 삼성의 사회적 기여금이나 기부금도 사회적 뇌물이나 매수로 간주할 것이다. 모든 언론, 학술단체 그리고 시민단체는 삼성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그 어떤 삼성의 기부금도 거부하여 경제권력 독재 음모의 분쇄에 동참하라!

8. 그리고 이 기회에 삼성제국의 반국가적 망동을 응징하고 진정한 삼성의 경쟁력을 확립시킬 채찍을 가한다는 취지에서 삼성의 족벌체제가 종식될 때까지 일체의 삼성 제품에 대해 범국민적 불매운동을 벌일 것을 시민사회에 제안한다.

2007년 11월 19일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11-27 08:59   좋아요 0 | URL
역시 김상봉, 홍윤기 선생님이시군요!

로쟈 2007-11-27 13:43   좋아요 0 | URL
'잡일'하는 철학자들이 좀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잡일만 할 수는 없겠으나...

섬나무 2007-11-27 12:53   좋아요 0 | URL
전남대에 이런 교수님이 계셨군요. 얼마 전에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삼성비자금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 얘기가 나오는데 얘기의 갈래가 김용철씨의 폭로 저의에 대한 궁금함이라든가 그의 학창시절의 일면에 대한 얘기들이었습니다. 옆에서 듣기에 열이 뻗치는 내용이었지요... 도대체 왜 우리나라는 이런 상황을 보고 모두들 조용한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삼성공화국이라는 자조적인 단어에 안주하려는건지... 그나마 역할을 하려는 지식인과 언론의 기능을 하려는 언론이 그나마 있음에 위안을 삼아야겠습니다. 기사 전달 감사합니다.

로쟈 2007-11-27 13:44   좋아요 0 | URL
지식인 시대의 종언은 대세인 듯하지만 아직은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송연 2007-11-28 09:47   좋아요 0 | URL
김상봉선생님에게는 겸손함이 홍윤기 선생님에게는 당당함이, 그분들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정말로 이제는 철학계도 그들만의 철학이 아니라 현실속으로 움직일 필요가 절실해진 시점입니다.

로쟈 2007-11-28 18:10   좋아요 0 | URL
학술활동도 열심인 분들이죠...